


1~3편

“여러분.”
교후는 어두운 목소리로 선포했다.
“우리 왕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 순간 사방에 고통스런 신음과 비통한 울음이 흘렀다.




[ 1 ]




그는 눈을 둥글둥글 굴려보았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아 손가락을 움직여보고 발가락도 움직여 보았다. 모두가 잘 움직이고 있었다. 침도 꿀꺽 식도로 잘 넘어갔고 심장이 뛰는 소리도 두근두근 잘 들렸다.
모든 것은 한없이 정상이었다. 그의 몸에 불이 붙은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한조야!”
예진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더니 그대로 벌렁 나자빠졌다. 한조는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다가 움칫, 멈추었다. 손끝이 재가 되어 바스라지고 있었다.
‘이게 뭘까.’
그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나 그새 눈꺼풀도 타버린 모양이었다. 눈이 감아지지 않았다.
비명소리를 듣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경악에 찬 눈빛으로 한조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눈을 돌리는 사람도 있었고 고함을 지르며 다시 뛰쳐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었기 때문에 한조는 뭔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려보았으나 입 속으로 불길이 치솟는 바람에 황급히 닫아버렸다. 곧 혀끝에서 목소리가 사라지고 혀도 입술도 식도도 뜨거운 불꽃에 삼켜졌다.
‘죽는구나.’
이한조는 자신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앞에 두고서도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가 삶에 대한 애착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삶을 사랑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건실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의 몸이 불타는 상황에서도 마음만은 편안했다. 
‘게다가.’
그는 멀뚱하니 자신의 손과 팔을 바라보았다.
‘전혀 아프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잖아.’
화상을 입으면 아픈 것이 당연한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손가락이 사라져버렸지만 정말로 사라진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손가락 끝에 지금 시원하고 촉촉한 공기가 만져졌기 때문이다.
“비켜!”
누군가 허겁지겁 소화기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한조를 향해 미친 듯이 뿜어댔다. 한조는 눈살을 찌푸렸다. 눈알에 흰 가루가 들어와서 눈이 아팠다. 불에 타는 부분은 아프지 않은데 소화기에 닿은 부분이 아프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때 다시 한 번 비명과 고함소리가 났다. 한조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발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렇게 죽는 거구나.’
그는 멍하니 생각했다.
‘최소한 예진이 앞에서 죽기는 싫은데.’
예진이······. 내 서른한 번째 짝사랑.
한조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김예진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길고 자연스러운 곱슬머리, 예쁜 얼굴, 예쁜 몸매, 깨끗한 피부. 저런 여자를 사람들은 퀸카라고 부르지.
한조는 인기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많은 여자 친구들이 있었지만 전부 그냥 친구일 뿐이었다. 최소한 그녀들 입장에서는 그랬다.
‘미안해, 넌 친구 이상은 아니야.’
‘네가 그런 생각 하는 줄 몰랐어.’
‘오빠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녀들은 한조가 고백하면 너무도 당황스럽다는 듯이 이런 말로 한조를 차버리곤 했다. 그는 착하고 좋은 남자지만 연애대상은 아니라는 것이 그녀들의 일괄된 설명이었다.
결국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채로 22년째. 그러다 만난 것이 예진이었다. 한조는 그녀를 보자마자 운명을 느꼈고 또다시 풍덩 반해버리고 말았다. 사람에게 잘 반하는 것이 그의 대단한 장점인지라 이번에도 반하자마자 열렬히 사랑에 빠졌고 고백할 타이밍만 노리는 중이었다.
김예진이 그를 학교 뒤뜰로 불러내어 먼저 차버리지만 않았더라도 말이다.
‘네가 나 좋아한단 소문 들었어. 그러지 말아줄래? 나 좋아하는 사람 있는데 너 때문에 괜한 오해 받기 싫어.’
그 말을 들었을 때 한조는 너무 슬퍼서, 가슴이 타버릴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가슴속에 불이 있는 것처럼 심장이 아팠던 것이다.
‘그렇다고.’
한조는 서글프게 생각했다.
‘진짜로 타냐······.’
누군가 찰칼찰칵 사진을 찍어댔다. 한조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이렇게 남는 것이 싫었지만 지금은 불평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손과 발이 타버리고 가슴도 타버리고 이젠 목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안녕, 예진아.’
길바닥에 쓰러져 분홍색 팬티를 쩍 내보이고 있는 예진이를 향해 한조는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예진이는 한조가 좋아했던 여자들 중에 가장 진도가 많이 나간 상대였다. 최소한 팬티는 봤잖은가. 그 사실에 위안을 느끼며 한조는 목까지 올라온 불꽃을 느꼈다. 이윽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드디어 죽음이란 놈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그래도 뽀뽀정도는 해보고 세상을 뜨고 싶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한조의 뇌는 이내 불길에 타서 재가 되어 버렸고 학교 친구들은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한조. 방년 22세. 만 21세. 순결한 총각인 채로 이 세상을 떴다.
그리고······.




이한조는 눈을 끔뻑거렸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죽었는데.”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믿을 수 없는 얼굴을 했다.
“분명히 죽었을 텐데!”
고개를 들자 펼쳐지는 것은 불타는 태양과 순금처럼 반짝이는 금빛 초지, 그리고 끝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달려오는 수명의 남자들, 그들의 검은 흑마. 나부끼는 머리카락.
‘설마 여기가.’
한조는 더듬더듬 생각을 다듬었다.
‘저승?’
자신은 세상을 떴다. 그리고 다른 세상으로 오게 되었다.
그 세상은 끝없이 펼쳐진 금빛 초원과 온 몸을 철갑으로 감싼 기사가 있는 곳이었다.


* * *


긴 옷으로 온 몸을 두텁게 싸 맨 남자들이 종종 걸음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의 얼굴은 심각하기 그지없었으며 입매는 단호했다.
“이쪽으로.”
검은색과 흰색의 옷을 입은 여자들이 그들을 반겼다. 촛불에 비친 그녀들의 얼굴위로 길고 거친 그림자가 졌다. 태어나서 한 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파리한 안색이었다.
“신황의 상태는 어떤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동침할 여자는 정해졌는가?”
“씨받이 여자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혀가 잘리고 눈이 뽑힌 종년들입니다.”
“좋군.”
남자들의 선두에 있는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 수염이 허벅지까지 늘어지고 하얗게 센 남자였다.
“그러나 신황께서···후사를 남길 힘이 있을지.”
“있어야 합니다.”
여자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야스님이 저렇게 되신 이상, 신황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한꺼번에 깊고 꼬불꼬불한 복도로 들어갔다.
“그자는 나타났나?”
“그렇다고 합니다.”
남자는 혀를 찼다. 칼등처럼 얇은 콧날이 찡그러지며 사냥꾼처럼 매서운 표정이 드러났다.
“소용없는 짓을. 더러운 모라시니, 결국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어서 가자!”
짙은 머리채를 나부끼는 기사들이 말 등에 올라탔다. 그들의 표정은 무섭도록 진지했고 눈동자에는 살기가 돌았다. 말은 그런 주인의 상태를 아는지 출발도 하기 전에 발굽을 울리며 숨을 훅훅 내뿜었다.
“그자가 어디에 나타났다고 합니까?”
선두에 선 남자가 뒤로 돌아보며 외쳤다. 그러자 안광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다 찌그러진 노인이 나타나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힘이 있었고 크지는 않지만 조용히 사방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신의들녘으로 가라. 그곳에 있다.”
“과연······.”
선두에 선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힘차게 박차를 가했다. 거친 투레질 소리와 함께 말의 울음소리가 찢어질 듯 길게 울렸다.
성문이 열리자 기사들은 한꺼번에 달려 나갔다. 그들의 속도는 너무도 빨라서 순식간에 먼지구름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노인은 먼눈으로 그들을 배웅하다가 켁켁, 기침을 했다.
“모라시니 큰 어르신.”
시종들이 얼른 다가와 노인을 감쌌다. 그러자 노인은 충혈 된 눈동자를 뻐끔거리며 괜찮다는 표현을 했다. 그의 건강은 누가 도와준다고 해서 해결된 문제가 아니었다.
“싱늬 들녘 전설처럼 금싸라기와같이 빛나겠지.”
노인은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지만 눈동자에는 무시무시한 욕망과 탐심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자가 진짜라면, 우리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비밀스러운 선물은 우리 왕의 입 안에서 녹아내리게 될 것이다. 신이여···살아서 이 장면을 볼 수 있다니······.”
“조금만 참으세요, 어르신.”
시종장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이제 그것이 왔으니까, 어르신의 고생도 끝이 납니다.”
“내가 문제가 아니다. 나보다 어서 일리야스님께 그분을 데려가야 한다.”
노인은 다시 격렬한 기침을 터트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모두 죽은 목숨이다.”
“어르신······.”
시종장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육체의 모든 것이 늙고 쇄하였으나 두 눈 만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검은 두 개의 불길을 켜고 모라시니 노인은 보이지 않는 저 너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 * *


처음에 기사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을 때만 해도, 그들의 목표가 자신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조는 멍하니 서서 검은 말과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천지를 진동하며 달려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직 죽음의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고, 그 다음에는 사태 파악이 안돼서 가만히 있었고, 나중에는 기사들의 박력에 질려서 가만히 있었다.
그 다음에 한조는 저 남자들과 대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저승이 맞다면 그는 옥황상제를 만나야 했다.
‘그래, 그래서.’
한조는 심장을 두근거리며 생각했다.
‘환생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어보자.’
“저···실례합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이제 기사들은 바로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다. 한조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옥황상제는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나요?”
그때 슁,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머리카락이 얕게 썰려나갔다. 한조는 미소 짓던 얼굴 그대로 멍하니 얼어붙었다. 귀 끝이 척척해졌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바람과 함께 흩날렸다. 
“어.”
한조는 눈을 끔뻑였다. 선뜩한 피의 감촉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이건······.”
털이 비늘처럼 시커멓게 빛나는 말이 앞발을 들어 올리더니 날카롭고 찢어지는 목소리로 울었다. 그러자 기사가 다시 칼을 높이 치켜올렸다. 이번에는 바로 앞에서 치켜든 칼날이었다. 피할 새도 없이, 한칼에 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는 의지를 담고서 기사의 칼이 한조에게로 날아들었다.
“윽!”
한조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쓰러진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기사는 칼을 추켜든 채로 말 등에서 엎어지더니 그대로 스르르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한조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기사의 등 뒤, 갑옷과 갑옷을 연결하는 쇠사슬의 미미한 틈 사이로 화살이 박혀 있었다.
“도망쳐!”
멀리서 고함 소리가 나더니 또 한 무리의 기사들이 말을 달려 등장했다. 그들은 모두 흰 말과 흰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중 선두에 선 자가 화살을 든 채로 외쳤다.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바보 같으니! 도망치란 말이다!”
바닥에 떨어진 기사가 꿈틀꿈틀 두어 번 움직이더니 좍 피를 뱉어냈다. 한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잡아라!”
한조를 향해 칼날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잡아!”
식은땀이 줄줄 등을 타고 내리고 발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한조는 계속 달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은 죽지 않았다. 살아있었다. 불에 타 죽었던 것도, 기사들에게 쫓기는 것도 모두 현실인 것이다.
“사, 사람······.”
한조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외쳤다.
“사람 살려!”
뒤에서 쇄액 소리가 나더니 화살이 묵직한 것을 통과하는 소리가 났다. 한조를 쫓던 흑의 기사단이 백의 기사단을 향해 등을 돌리더니 이를 갈며 외쳤다.
“미친 모라시니. 그런다고 너희의 권위가 백 날이고 천 날이고 갈 줄 아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너희는 신의 종이 아니더냐.”
백의 기사단이 활 대신 칼을 뽑아들더니 이죽거렸다.
“혹은 교후의 종이더냐.”
“저것이 죽으면 너희들의 잘난 혓바닥도 썰어주마.”
두 기사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조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가 백마에 탄 남자 하나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한조를 향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조도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 후 달리기 시작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한조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더니 곧 무거운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거센 함성과 기합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한조는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들녘을 통과하여 키가 큰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으로 도망쳤다. 그곳은 실측백나무와 너도밤나무, 떡갈나무가 무성한 이파리를 드리우고 있는 곳이었다. 
일단 숲 안으로 들어오자 바깥의 소리는 점점 멀어지더니 이윽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사방에는 새벽의 여명과도 같은 빛만이 어스름하게 사방을 밝히고 있었고 나무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조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더 깊이, 안쪽으로 도망을 쳤다. 방금이라도 저 검은 기사들이 손을 쭉 뻗어 목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았다. 기사들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것은 적의와 살의였다. 그들은 정말로 한조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죽자마자 다시 죽는다니.”
한조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건 싫어. 싫다고.”
그는 분명히 불에 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다. 이곳이 저승이건 이승이건 살아있는 것이다. 다시 얻은 인생이라면 기를 쓰고 살아야만 했다.
“아직 좋아하는 애랑 키스도 못해봤어.”
한조는 땀을 뚝뚝 흘리며 더욱 깊고 어둑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길도 없는 숲길을 두 팔로 헤매며 걸었다. 그러자 울창한 수림 가운데 작은 호숫가가 나타났다. 아무도 손댄 흔적이 없는, 차갑고 맑은 수정 같은 호수였다. 물이 너무 맑은 나머지 속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먼 바다처럼 검푸른 빛깔로 일렁거렸다.
“군대도 갔다 오고 싶고, 취업도 하고 싶어. 이런 젠장! 기왕 다시 살아났다면 제대로 살고 싶단 말야!”
갑작스레 불이 붙었을 때는 미처 생각도 못했던 삶에 대한 의지가 솟구쳤다. 한조는 살고 싶었다. 아무런 방어도 해보지 못하고 불에 타 죽었을 때와는 상황 자체가 다르다.
그는 타들어가는 속을 잠재우기 위해 손으로 물을 떠서 입에 대고 마셨다. 끓는 속에 물을 들이붓자 섬뜩한 느낌이 들면서 뱃속이 시원해졌다. 거짓말처럼 갈증은 풀어졌지만 물이 너무 차가워서 머리가 징징 울렸다.
한조는 입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스산한 바람이 나무의 우듬지를 흔들고 지나갔다. 그것은 한조의 이마와 등줄기를 쓸고 지나갔는데 순식간에 땀에 젖은 뜨끈한 몸이 차가워졌다.
한조는 부르르 한 차례 몸을 떨고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여러 가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검고 푸른 나무의 숲에는 오래된 나무들만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다른 생명의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나무와 바람과 약간의 물이 있을 뿐, 이곳은 마치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스산한 곳이었다.
“어······이.”
한조는 나지막하게 소리를 내어 보았다.
“아무도 없어요?”
그러자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날리고 사라졌다. 한조는 떨어지는 물방울을 얼른 닦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도···없어요?”
촉촉이 젖은 풀잎과 나뭇잎이 발에 닿았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어오더니 한조의 뺨을 빠르게 훔치고 날아갔다. 새 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방이 조용했다. 살아있는 것의 소리라고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 뿐.
한조는 갑자기 두려움을 느꼈다. 철갑옷의 기사들이 내지르던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마치 밤이 낮을 삼킨 듯 사방이 어두웠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나무들이 더욱 촘촘하게 늘어선 것 같았다.
“왔던 대로.”
그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야겠다.”
최소한 백의 기사단은 자신의 편이었다. 지금쯤 싸움이 끝났을 것이다. 한조는 이곳에 있기 싫었다. 이 숲은 불길하고 또 스산했다.
“이, 이 길이었나?”
더듬더듬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하지만 워낙 길이 나있지 않고 발이 닫는 대로 달려왔던지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커다란 너도밤나무가 뿌리를 반쯤 드러낸 비탈길로 들어서며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나무의 틈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그 짧은 사이 해가 진 것이다.
“미치겠네.”
아까부터 원망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그는 먼지를 풀풀 날리며 비탈길을 내려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방향을 하나 정해놓고 쭉 그쪽으로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길을 내려가도 끝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깊숙한 곳으로 미끄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땅에는 이미 운동화가 끌린 자국이 나 있었다.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온 곳이다. 그는 나무에 손을 집고 숨을 골랐다. 점점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난 대체 어떤 세상으로 온 거야?”
그때 손을 대고 있던 나무가 스르르 옆으로 이동하듯 움직였다. 한조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오래된 이끼를 구름처럼 이고 있는 늙은 나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나무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딱딱한 나무껍데기와 굵은 밧줄 같은 뿌리는 100년도 전부터 그래왔다는 듯이 그대로 정지해 있을 뿐이었다.
“착각인가?”
한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너무 민감해진 모양이었다.
“착각인가보군. 역시 내가 너무······아아앗!”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한조는 벌러덩 바닥에 나자빠졌다. 엉덩이가 얼얼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경악에 찬 시선으로 나무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진짜였다. 진짜로 나무가 움직인 것이다.
그때 세찬 바람이 불어와 한조는 눈을 뜰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막고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한조가 비킨 만큼 나무들이 그들의 나뭇가지를 팔처럼 뻗어와 그를 둘러쌌다. 마치 정중하게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로 간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 어서 오렴.
어디선가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나지막하게 노래하듯 읊조리기 시작했다.
- 어서 오렴. 기다리고 있었단다.
한조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 그러자 자신을 둘러싼 나무들의 행렬이 보였다. 이 숲의 모든 나무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오래된 고목이 부러지는 것처럼 뿌드드드드 하는 소리가 울리고 높은 우듬지가 아래로 내려왔다.
“무슨······.”
손가락이 내려갈수록 한조의 앞에 믿을 수 없는 것들이 펼쳐졌다.

- 어서 오렴.
- 우리는 천년을 기다렸단다.
- 네가 오기를······.
- 네가 오기를 우리는 천년을 기다렸단다.
- 어서 오렴.

맑은 유리구슬이 구르는 듯한 소리가 점점 커지며 바람을 타고 속삭임이 되었다.

- 어서 와서······.

“으아아아!”
한조는 고함을 질렀다. 너무도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벌벌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순식간에 나무가 갈라지며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 웃는 것 같은 소리가 귀를 잘랑잘랑 간질이더니 봄볕 닿은 눈처럼 사라져버렸다.
한조는 발이 닿는 대로 도망을 쳤다. 하지만 아무리 가도 숲은 끝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나무가 길을 내주지 않는 곳으로 도망쳤다. 끝이 날카로운 이파리에 뺨이 스치고 잔가지에 상처가 났다.
“어디야!”
그러나 마침내 한 치의 틈도 없이 나무들이 맞닿아있는 곳에 도착한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절규하듯 외쳤다.
“대체 여긴 어디냐고!”
“이곳은 신의 들녘이다.”
묵직한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한조는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흰 갑옷과 나부끼는 흰 망토. 경첩과 버클에는 자잘한 황금색 문양으로 세련된 멋을 더했다. 흰 장갑을 낀 손으로 투구를 들어 올리자 콧수염을 짧게 기른 매서운 얼굴이 나타났다.
“누구?”
한조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남자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한조는 그가 도망치라고 소리를 지른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소리가 똑같았다.
“여기는 어디죠?”
“네가 땅을 발고 선 곳은 우리 왕의 뒤뜰. 너는 그분을 위해 이곳에 왔다.”
“우리 왕?”
한조는 멍청하게 되뇌었다.
“옥황상제?”
그 말에 남자는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다시 무덤덤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한조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쨌든 당장 이곳에서 나가자. 신의 칼침을 맞기 전에 서둘러 나가야만 한다.”
“기다려. 기다려요.”
한조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이 나무들이···움직였어요.”
하지만 남자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이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조는 질질 끌려가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그는 너무 빨리 걷고 있었다.
“아저씨 잠깐만요. 이상해요. 나무가 움직였다니까요?”
“너 우리말을 하는군.”
남자는 흘깃 눈알만 움직여 한조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린다.
“쓸데없는······. 네게 필요한 것은 육체뿐.”
“네?”
한조는 왠지 점점 불안해졌다. 자기편이라고 믿었던 사람인데, 점점 심상치가 않았다. 나무들이 고개를 쑥 빼고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한조의 발을 잡고 질질 끌었다. 가지 마···가지 마······.
“아저씨, 아저씨. 잠깐만!”
직감적으로 이 남자를 따라가면 큰일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조는 필사적으로 남자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얼른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잠깐 잡혔을 뿐인데 손목에 멍이 들고 있었다.
“왜 그러지?”
남자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조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러지? 얼른 나와 가자.”
“이상해요.”
한조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안색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당신 이상해.”
“이상하지 않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미 한조는 경계심을 발동한 상태였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도망갈 길을 살폈다. 그러자 등 뒤로 나무들이 드드드, 소리를 내며 다시 갈라졌다. 그 모습을 본 남자의 미소가 약간 일그러졌다.
“이리 와.”
그는 손을 내밀며 속삭였다.
“이리 와라, 우리는 네가 필요하다.”
“우리가 누구죠?”
한조는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당신들의 왕?”
“그래, 그는 병들고, 또 죽어가는 왕.”
남자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왕. 너를 필요로 한다.”
나무가 무성한 이파리를 흔들며 소리를 냈다. 머리 위로 비구름이 몰려와 총총 떠오른 별들을 가려버렸다. 달빛도 어둠속으로 숨어버렸고 바람소리만이 윙윙 요란했다.
“나를 왜 필요로 하지?”
한조의 모습은 이제 나무 그늘 사이로 반쯤 기어들어가 마치 어둠과 하나로 동화된 듯 보였다.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져 내리더니 급기야 분노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빠르게 앞으로 다가왔다.
“와라.”
이제 그는 자신의 초조함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안 그러면 다리를 잘라서 몸뚱이만 데려가겠다.”
“역시 당신은.”
한조는 낮게 중얼거렸다.
“내 편이······.”
다음 순간 한조의 발이 빠르게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그는 얼마 전에 새로 산 운동화를 신은채로 불타 죽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조는 젊었고 운동화는 상태가 좋았다. 하지만 남자는 한조보다 빨랐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한조의 허리를 낚아채더니 주먹을 위로 추켜올렸다. 그리고는 뻑 소리가 나도록 세게 한조의 뒤통수를 쳤다. 이윽고 한조의 몸은 죽은 닭처럼 축 늘어지더니 쓰러져버렸다.
우수수, 바람이 불더니 하늘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났다. 남자는 한조를 어깨에 짊어지며 예리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왔다. 그것은 서로 부딪치고 나부끼며 허스키하고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내려 하고 있었다.
“성지를 더럽혔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전혀 미안해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남자는 달리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 하나를 짊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는 빠른 걸음이었다.

‘너는 좋은 사람이지만.’
처음으로 고백했던 사람은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옆 반 친구였다.
‘하지만 우린 지금 공부할 나이니까······.’
그렇게 말하던 친구는 다른 학교 남자애랑 사귀기 시작했다.
‘오빠는 좋은 사람인데요. 저랑은 안 맞는 거 같아요.’
같은 써클의 후배아이는 그렇게 퇴짜를 놓았다.
그리고 저 두 가지 패턴의 거절방법은 한조가 대학에 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좋은 친구로 남아줄거지?’
언젠가 필사의 결심으로 고백한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이한조라는 좋은 친구를 잃어버리기 싫어서 어떻게든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우린 친구잖아.’
남녀사이에는 친구가 없단 말도 못 들어봤니? 한조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신 튀어나온 말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와 함께 ‘그래’ 라는 대답이었다.
동기남자들은 한조의 실연을 이해할 수 없어했다.
‘난 진짜 이해가 안 간다.’
‘너 정도면 키도 작은 편은 아니고 얼굴도 괜찮고 성적도 좋은데 왜 그런데?’
‘그래, 내가 여자라면 너랑 사겼어.’
그래놓고 지들은 다 연애질 중이었다.
한조도 진정한 반쪽을 찾고 싶었다, 그는 외로웠다. 이쯤해서 진짜 반려자를 찾고 싶었다. 그도 이제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세상을 함께 걸어갈···그런 사람을 만나,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진이를 처음 봤을 때 한조는 그런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늘 곁에 있고 싶었다. 사람에게 잘 반하는 체질이긴 하지만 이번엔 진짜라는 감이 왔다. 자신의 마음을 활활 불살라줄, 그런 사람 말이다.
그 감이 맞긴 맞았다. 예진이는 한조의 가슴을 아주 불태워 버렸다. 너무 태우다 못해 자연발화 해버릴 정도로 말이다.

3~5편
오래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경첩이 고함을 질렀다. 차가운 돌 벽은 그 소리를 하나도 흡수하지 못하고 치를 떨며 메아리를 쳤으며 그것은 고스란히 다시 돌아와 시끄럽게 귀청을 울렸다.
“그자인가?”
모라시니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을 뻗어 한조의 머리를 만졌다. 그러자 결이 고운 흑발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물건은 정상으로 보이는군. 이제 시술하면 되겠나?”
“네, 모라시니 큰 어르신.”
어둠속에서 흰 옷을 입은 여인들이 나타나 한조를 받아 챙겼다.




[ 2 ]




그들은 먼저 정신을 잃고 늘어진 한조의 옷을 벗겨냈다. 한조의 옷은 그들로서는 처음 보는 이상한 것들이었다.
상의는 한 겹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천의 문양이 조잡한데다 디자인은 통으로 짜 맞춘 듯 단순했다. 가슴팍에는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호주머니가 달려 있었는데 너무 작고 얇아서 동전한 잎 넣기도 힘들어 보였다. 단추는 작고 단춧구멍은 빳빳하여 손가락이 잘 놀려지지 않는데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쫙 뜯겨나갈 것처럼 생겨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의는 또 얼마나 조잡한지 몰랐다. 그것은 청색의 딱딱한 질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땀에 젖은 그것은 다리에 딱 달라붙어서 절대로 벗겨지지 않았다. 때문에 한조의 바지를 벗기는 대는 두 명의 시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겨야만 했다.
남자라면 자고로 블리오나 꼬뜨(중세 남녀가 입었던 긴 치마) 위에 우플랑드나 쉬르코를 걸쳐서 의복을 단정하게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렇지 않았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윤기가 흐르는 피부는 그의 태생이 고귀함을 말해주었지만 걸치고 있는 행색은 그렇지가 못했다. 길거리의 평민들만도 못한 복장이었다.
“다 벗겼으면 그를 이리로.”
하얀 달마티카를 발목까지 길게 내려 입은 여인들이 나타났다. 그녀들의 흰 옷은 비둘기의 날개처럼 눈이 부시도록 희었다. 전체적으로 펑퍼짐한 느낌이었지만 허리 부근은 알맞도록 좁아져서 그녀들의 날씬한 허리와 배가 강조되었다. 벨벳으로 만든 검은 허리띠에는 금장식물이 자잘하게 박혀 있어 일견 수수해 보이는 의상을 고급스럽게 표현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의상과는 별개로 그녀들의 얼굴은 너무도 차갑고 싸늘했다. 두 여인의 얼굴은 돌과 흙, 벽이나 모래처럼 무표정했고 그 차갑기가 겨울의 삭풍처럼 매서웠다. 그들은 남자의 나신을 앞에 두고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며 서슴지 않고 만지기까지 했다. 마치 상품을 평가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돌려보며 평가를 하더니 이미 깨끗하게 잘라진 손톱과 발톱을 피가 나도록 짧게 똑똑 깎아냈다.
“그런데.”
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먹는 겁니까?”
“글쎄.”
한조를 데려온 남자는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그는 벌거벗겨진 채로 함부로 나뒹굴고 있는 한조의 몸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며 연구를 했다.
“어디를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대령하겠습니까.”
“그것은 아직 우리로서도 알지 못한다.”
결국 남자역시 제대로 된 결론을 내지 못했다.
“모라시니 큰 어르신은 알고 계실 거다.”
“그럼 씻어서 먹기 좋게 만들어놓겠습니다.”
두 여인은 한조를 덜렁 들어 올려 옆구리에 끼고 나갔다.

따뜻한 물이 잘랑잘랑하며 한조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 느낌이 기분 좋아서 한조는 살짝 웃었다. 보드라운 손길이 등과 허리를 쓰다듬고 지나갔고 그것은 앞가슴 쪽으로 미끄러지더니 가슴의 갈라진 부분도 건드렸다.
“으······.”
한조는 느릿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서서히 의식이 수면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노랗고 부드러운 빛을 보았고 또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게 품어주는 물도 보았다.
‘뭐야 이건.’
그는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아서 모든 것이 부옇게 흐려졌다.
‘내가 바다에 온 건가?’
“일어났나?”
머리위에서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치켜들자 낯선 얼굴이 어른거렸다. 
‘뭐지? 저 양키는······.’ 
한조는 속으로 생각했다. 
‘날 아네?’
그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확 깨어났다. 한조의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가 우악스럽게 내리누르는 힘에 의해 다시 아래로 끌어내려졌다. 좌우를 둘러보자 냉랭한 표정의 두 여인이 보였다. 그녀들은 손에 거즈를 들고 자신의 알몸을 닦고 있었다.
‘알몸?’
한조는 본능적으로 손을 아래로 내려 성기를 감쌌다. 얼굴이 벌게졌다. 여자 앞에서 알몸을 보인 것은 12세 때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자 남자가 ‘이것 봐라?’ 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나? 그녀들은 이미 네 몸을 다 보았다. 나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사람을 훌떡 벗겨놨는데 워쩌크름 그라요?”
한조는 흥분한 나머지 마구 사투리를 썼다. 그는 전라도 태생인으로 흥분하면 사투리를 쓰는 버릇이 있었다. 어릴 적 좋아하는 여자애가 사투리 쓰는 남자는 싫다고하는 바람에 필사적으로 익힌 개인기다. 비록 서울에서는 개인기로 안 통했지만 말이다.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다.”
남자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방 밖으로 나갔다.
“모든 부위를 깨끗하고 꼼꼼하게 씻어야 할 거다. 그래야 먹기 좋게 청결해 질 테니까 말이다.”
“먹다니요?”
한조는 어리둥절해졌다.
“뭘요? 나를요?”
그때 여자들이 다시 거즈를 말아 쥐더니 한조의 등판을 북북 닦아내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우악스러운 손짓이었다. 한조는 깜짝 놀라 으악, 비명을 질렀다.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자, 잠깐! 씻는 거라면 내가 할게요!”
그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외쳤다.
“헉! 어딜 만지는···내가 해요! 내가 한다니까요?”
“안 된다.”
한 여인이 말했다. 그녀는 얼음장 같은 시퍼런 눈으로 한조를 쏘아보더니 단칼에 거절했다.
“너는 손도 까딱 하지 마라. 왜냐하면······.”
거기까지 말한 여인은 다시 한조를 북북 씻어내기 시작했다. 아주 약간의 더러움도, 미세한 먼지도 용서하지 않는 거친 손길이었다.
한조는 점점 불안해졌다. 여인의 뒷말이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는 눈알만 움직여 사방을 둘러보았다. 따뜻한 빛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불안하게 깜빡거리는 램프였고 램프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는 어둠이 켜켜이 내려앉아 있었다. 한조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천장의 대들보는 수증기에 닿아 곰팡이가 나 있었고 창문도 없었다.
마치 죄인처럼. 죄인처럼 숨겨 들어와 몰래 씻기는 형색이었다.
‘먹을 건가봐.’
한조는 파랗게 질렸다.
‘날 먹을 건가봐.’
그들이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며 먹는다느니 그래서 씻어야 한다느니 했다. 한조의 몸은 이제 눈에 띄게 덜덜 떨렸다. 그는 식인종이란 말이 생각났다. 틀림없었다. 그는 식인종들의 세상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것 놔!”
한조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여인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놔! 이 미친놈들아!”
한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맛이 없어!”
“맛으로 먹는 게 아니다.”
여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왜 맛으로 안 먹어! 맛으로 먹어! 기왕이면 맛있는 거 먹고 죽으란 말이야! 이런, 악!”
갑자기 우악스런 손이 뻗어오더니 한조를 아래로 처박아버렸다. 한조는 꼬르르 소리를 내며 물을 잔뜩 먹었다. 그러자 다른 여인이 그녀를 나무라며 말했다.
“더러운 물 먹이지 마라. 내용물이 중요하다.”
‘미치겠군.’
한조는 물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나를 정말로 먹을 생각인가 봐.’
“줄을 가져와라.”
그 말에 누군가 줄을 가져왔다. 한 여인이 한조를 붙잡고 아래로 내리누르자 다른 여인이 한조의 손을 뒤로 묶었다. 그 솜씨가 어찌나 재빠른지 한조는 반항할 틈도 갖지 못했다. 그녀들의 힘은 성인 남자와 맞먹는 것이었다.
“꺅!”
한조의 얼굴을 닦던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밖에서 경비를 보고 있던 남자들이 다 튀어 들어왔다. 여인은 핼쑥해진 얼굴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목에는 동그란 이빨 자국이 피가 맺힐 정도로 나 있었다.
“그렇군.”
한조에게 물린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비명만 질렀다 뿐이지 아프지도 않은 듯 했다.
“아직 이게 있었군.”
다른 여인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런 위험한 것은 뽑아버립시다.”
“망치로 깨부숩시다.”
남자들이 거들었다.
“그래서 양처럼 순하게 만듭시다.”
누군가 망치와 정을 들고 왔다. 램프의 누런 불빛에 닿은 쇠붙이가 검게 빛났다. 여인들이 한조의 몸뚱이를 잡자 남자들이 망치를 한조의 입술에 갖다 댔다.
“자, 아가야.”
이빨이 듬성듬성 썩어 들어간 남자가 정을 잡았다. 그가 웃자 누린내가 확 끼쳤다. 깨끗하게 씻겨져 상아빛으로 빛나는 한조의 모가지를 한 손으로 그러잡은 남자는 어떻게 치면 한 번에 이빨을 깨트릴 수 있을까 가늠하듯 정을 이리저리 굴렸다.
“입을 벌리거라. 안 그러면 입술이 뚫릴 테니.”
한조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누르는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무섭도록 진지했다. 이것은 모두 진짜였다. 그들은 정말로 자신의 이빨을 깨트리려 하고 있었다.
“잘못했어요.”
모기소리처럼 작고 떨리는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한조는 꿀꺽 침을 삼켰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는 너무 무서워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새파랗게 질린 뺨을 타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어요.”
“이제 안 그럴 거지?”
여인이 물었다. 한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밧줄에 묶여서 잘못을 빌었다. 수치스러웠지만 두려움이 먼저였다.
“자 얌전히 있어라.”
남자들이 다시 밖으로 나가고 두 여인은 한조를 마저 씻겼다. 그들은 한조를 목욕통 밖으로 나오게 하더니 물을 뿌리고 비누칠을 했다. 그는 마치 빨래가 된 기분으로 그녀들의 손길을 받았다. 여인들은 한조의 성기와 고환을 잡고 위로 들어 올린 후에 사타구니 사이까지 싹싹 닦았다. 하지만 한조는 약속대로 얌전히 있었다.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이제 됐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려는데 드디어 한 여인이 마지막으로 물을 촥 끼얹으며 말했다. 그녀들은 냉정한 감정가의 눈길로 한조의 몸에 더 이상 불결한 부분은 없는지, 미처 닦아내지 못한 곳은 없는지 점검했다.
“이제 시술을 하러가자.”
흰 비단 옷이 입혀지고 눈에는 가리개가 착용되었다. 한조는 벌벌 떨면서 여인들의 손에 이끌려 복도로 걸어 나왔다. 샌들이 바닥을 스칠 때마다 텅텅, 공허한 소리가 메아리쳤다. 횃불이 귀 옆에서 사르는 소리도 들리고 여인들의 치맛자락이 자신의 다리에 닿는 것도 느껴졌다.
그는 끌려가면서 길을 외우려고 노력했지만 곧 포기해야만 했다. 그들이 한조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가 방을 열고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가를 숱하게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수고했네.”
이윽고 칼칼한 음성이 들리고 가리개가 벗겨졌다. 한조는 눈을 부릅떴다. 그는 치열이 사나운 이빨처럼 듬성듬성 돌이 빠져나온 벽의 안쪽 방 앞에 서 있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그 앞에는 성질이 난폭해 보이는 건장한 남자 둘과 쪼글쪼글한 노인네가 보였다.
“여기 약이 왔습니다. 모라시니 큰 어르신.”
한조를 이리로 끌고 온 여인이 말했다.
“이놈이······.”
모라시니 큰 어르신으로 불린 노인은 말라비틀어진 고목 같은 손을 들어 한조의 뺨을 만지려들었다. 한조는 생리적인 혐오로 흠칫, 고개를 돌려버렸다. 붙들린 손에 힘이 가해졌지만 고개를 바로하지는 않았다. 기분이 나빴다. 너무도 기분 나쁘게 생긴 노인네였다.
“괜찮아. 그럴 수밖에 없는걸.”
다행히 모라시니 큰 어르신이란 노인네는 별로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온 몸이 쭈글쭈글해지고 노쇠한 주제에 눈만은 요사스러울 정도로 빛나는 노인네가 한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는 한조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응시했고, 머리카락과 똑같이 새까만 두 눈동자도 응시했다. 질감이 독특한 피부도 눈으로 샅샅이 핥았으며 나중에는 두 다리가 갈라지는 사이까지 응시했다.
‘뭐야, 이건.’
한조는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노인은 한조의 사타구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불쑥 손을 내밀어 하의를 훌러덩 위로 올렸다. 한조는 깜짝 놀라 몸을 비틀었지만 경비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목을 조르는 통에 캑캑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그 사이 노인의 손가락은 한조의 하초 속으로 쑥 들어가서는 제 멋대로 휘휘 저어댔다. 한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오늘 참 여러 가지 경험을 한다. 13세 이후 남자한테 거기를 잡힌 적은 또 처음이었다.
“검군.”
마침내 노인이 무감각한 목소리로 한 마디 했다. 그는 속옷 사이로 툭 튀어나온 한조의 성기와 그 위의 숱이 적은 음모까지도 싸늘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래, 네가 그것이란 말이지······. 자, 이리 오너라!”
다시 속옷이 얌전히 갈무리되고 올라갔던 옷도 아래로 내려왔다. 그들의 앞에 떡 버티고 있던 굵은 쇠문이 속을 긁어내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두 남자가 온 힘을 다해야만 밀리는 문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한 겹의 문이 더 있고, 그것은 세 개의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안에 든 것이 무언지 몰라도 엄청난 경비였다.
“들어오너라.”
노인이 비칠비칠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네가 필요하단다.”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뒤로 검은 어둠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램프의 노란빛이 돌벽을 스치고 지나가자, 이곳을 수궁하던 남자들의 얼굴위로 거칠고 복잡한 음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뭐하고 있어?”
뒤에서 여인이 한조를 밀었다. 하지만 한조의 발은 못에 박힌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어르신이 부르시잖아. 어서 들어가라.”
떠밀리듯 머뭇머뭇 한조는 안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두려움으로 등 뒤가 저릿저릿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의 뒤에는 무기를 든 남자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조는 저 속에 든 것이 슬슬 궁금해졌다. 저 사람들이 이토록 애틋하게 감싸 쥐는 것의 정체를 보고 싶었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저기 있는 것이 앞으로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는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문을 열면 목이 셋 달린 큰 개가 버티고 서 있고 자신을 먹이로 대령한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설의 살인귀가 목을 쭉 빼고 서서 새로운 희생물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호기심이 먼저였다. 그는 덜덜 떨면서도 한발 한발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뭐야?”
그리고 마침내 비밀의 방에 들어선 한조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건···이건 시체잖아!”
그랬다. 그토록 겹겹이 수비를 하고, 비밀스럽게 모셔놓은 것은 바로 시체였다. 그것도 흉측하게 마르고 노인처럼 주름이 줄줄이 진 고약한 시체였다. 두 눈은 흰자를 내놓고 한껏 뜨여졌으며 입에서는 혀가 길게 빠져나와 있었다. 두 손은 가슴을 긁는 동작으로 굳어버린 상태였고 가슴은 허공에 붕 떠 있었다.
마치 타는 듯한 괴로움에 고통을 못 이겨 자기 가슴을 긁어내리려던 모습 같았다.
“시체가 아니다.”
노인이 말했다.
“그는 미왕(美王) 일리야스님이시다.”
그때 등 뒤로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조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바로 여인들에게 붙잡혀서는 더 앞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들은 한조를 저 시체 앞으로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이것 놔······.”
한조는 땀을 뻘뻘 흘렸다.
“놔아······.”
“자, 이제 그를 치료해라. 이방인.”
사납게 생긴 남자가 한조의 모가지에다 바싹 칼을 밀어붙였다.
“저건 시체에요.”
가까이 다가올수록 섬뜩한 시신의 모양세가 확실히 보였다. 짙게 갈변한 피부. 주름진 살갗. 백살 노파처럼 새하얗게 센 머리카락. 쩍 벌어진 입사이로 튀어나온 길고 징그러운 어금니와 혓바닥.
한조는 사람 죽은 것을 처음 보았다. 어릴 때 외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한 적은 있지만 시신을 보지는 못했다. 시신이 저렇게 무섭다는 것도 그래서 지금 처음 알았다. 그래서 저 무서운 것에 자꾸만 자신을 끌고 가는 사람들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점점 더 크게 발버둥을 쳤다.
“미쳤어요? 시체를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에요?”         
“시체가 아니랬잖느냐.”
노인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직접 한조의 손을 잡고 시체 앞으로 끌고 갔다. 한조는 가까이 가기 싫다고 버텨 보았으나 뒤에서 남자들이 칼을 번뜩이는 바람에 울상을 지으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전하, 이 약을 드시고.”
노인이 쉰 목청을 높여 외쳤다.
“우리의 노고를 알고, 우리에게로 돌아오소서!”
“앗!”
그와 동시에 따끔한 통증이 붙잡힌 손목에서 느껴졌다. 한조는 눈살을 찌푸렸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인이 그 흐르는 것을 잡아다 시체의 위에다 들이부었다. 한조의 피가 시체의 얼굴위로 끼얹어졌다. 회갈색의 피부위로 흐르는 피가 역겨웠다. 한조는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했다.
“미친놈들······.”
노인의 손톱이 점점 안으로 파고들었다. 뼈의 갈라진 틈 사이로 노인의 손톱이 느껴졌다. 흐르는 피의 양이 점점 줄어들자 노인은 끔찍하게도 살 사이로 손가락 하나를 더 집어넣어 억지로 벌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조는 고통으로 인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절망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씻긴 여인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차갑고 냉랭한 눈동자로 한조의 손목에서 흐르는 것을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눈동자 속에서 기이한 열기를 감지한 한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쳤다. 모두들 미친것이 분명했다.
“오!”
그때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올려다보니 그는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뭐지?’ 한조는 불길한 예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전하께서!”
뒤에서 여인들도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더니 털썩 바닥에 엎드렸다. 그들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환희였다.
“맙소사······.”
그리고 한조는 그들과 정반대의 이유로 신음성을 흘렸다. 그의 고개는 빳빳해지고 그의 입술은 마치 비명을 지를 것처럼 벌어졌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돌침대 위에서 시체가 고개를 내밀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옇기만 한 흰자가 도르르 움직여 그를 보고 있었다. 주름지고 퇴색된 시체가 한조를 향해 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오오!”
노인이 자랑스럽게 외쳤다.
“나의 왕, 당신을 위해 가져온 우리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취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소서.”
그 말에 한조는 미친 듯이 반항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빨을 깨부순다 하더라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울고 불며 몸을 뒤틀다가 울부짖다가 했다.
그러자 뒤에서 여인들이 다가와 우악스럽게 한조의 팔을 틀어쥐었고 남자들이 다가와 한조의 모가지를 잡고 뒤로 홱 꺾었다. 목 끝에 칼이 겨누어지더니 이윽고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아웃!”
한조의 모가지와 몸통, 팔과 다리는 각각의 손에 의해 완벽하게 제압되었다. 그는 마치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눈만 크게 치뜬 채로 악몽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시체는 먼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마치 너무도 오래 숨을 쉬지 못했다는 듯이 깊고 묵직한 한숨이 시체의 목구멍에서 빠져나왔다. 다음으로 그는 눈을 꿈뻑꿈뻑 두어 번 움직였다. 그러자 하얀 동공에 검은 울혈 같은 것이 생기더니 그것이 눈이 되었다.
시체는 말려 올라간 가슴을 위로 끌어올렸다. 흰 머리가 촤라라 소리를 내며 나부꼈다. 앙상하게 메마른 모가지가 뼈 꺾어지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얼굴이 제일 마지막으로 올라왔다.
이제 그것은 시체라고 볼 수 없었다. 그것은 숨 쉬고 있었고 움직이고 있었으며, 먹을 것을 원하고 있었다.
바로 한조를 말이다.
“아아.”
한조는 눈물을 흘렸다. 그 무서운 것. 죽어있던 어떤 것의 손가락이 한조의 뺨에 닿았다. 묘지의 흙처럼 차가운 손가락이었다. 그것이 느리게 한조의 얼굴을 훑고 내려가 목에 닿고, 상처를 어루만졌다.
한조는 너무 무서운 나머지 기절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지나치게 건강한 그의 육체와 정신력은 기절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조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 무서운 장면들을 눈앞에서 봐야만 했다.
저것이 자신의 모가지를 쭉쭉 빠는 것을 말이다.
“살려주세요.”
한조는 노인에게 눈으로 애원했다. 손발이 자유로웠더라면 무릎을 꿇고 빌었을 것이다.
“제발···살려주세요.”
“그럴 수는 없다.”
노인은 냉정하게 한조의 청을 거절했다.
“너를 불러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들었다. 너는 우리에게, 우리 왕에게.”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져서 마지막에는 쇳소리처럼 들렸다. 한조는 숨이 막혔다.
“산채로 잡아먹혀지기 위해 온 것이다.”
“아악!”
사나운 송곳니가 한조의 모가지를 꿰뚫었다. 한조는 끔찍하고 징그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것이, 저 짐승 같은 것이 한조의 목에 고개를 처박고는 쭈압쭈압 소리를 내며 피를 빨아먹었다. 이빨로 살갗을 씹고 혀를 내밀어 짭짭 거렸다.
“으으!”
한조는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버텼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대체 얼마를 빨아 먹힌 건지 생전 처음으로 빈혈이 일어났다.
“아······.”
그때 저 무섭고 징그러운 것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피로 촉촉하게 젖은 목구멍에서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여전히 끔찍한 모습이지만 이제 눈에는 생기가 돌고 버석버석한 피부 아래로도 근육과 힘줄이 움직이고 있었다. 생명을 얻은 그것은 깊은 한숨을 몇 번 내쉬더니 이내 말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한조는 그런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치 검고 깊은 공동에서부터 울리는 듯도 한 목소리였고, 썩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도 한 목소리였으며, 얼어붙은 강바닥이 밑도 끝도 없이 갈라지는 듯도 한 목소리였다.

- 누구냐.

그것이 한조의 턱을 치켜 올렸다.

- 너는 무엇이냐.

“그것은 당신을 위해 우리가 불러낸 것입니다.”
대답이 없는 한조를 대신하여 노인이 공손하게 아뢰었다.
“마음대로 취하소서. 당신의 것이니.”
그러자 그것이 이번에는 노인을 향해 일갈하였다.

- 너는 또 누구냐.

자신만만하던 노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그는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버렸다.
사뭇 백치와도 같은 표정으로 그것이 노인을 보았다가 한조를 보았다가 하더니 사나운 얼굴로 울부짖는다. 불뚝불뚝 살갗이 요동을 치고 머리채가 공중으로 휘휘 돌더니 가닥가닥 검어지며 순식간에 잿빛으로 물들었다.

- 으아아아!

지옥의 귀신들이 한꺼번에 우짖는 듯한 비명소리였다. 밑이 깨어진 쇠솥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였다. 한조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았다. 이토록 비참한 비명소리가 또 있을까. 가슴이 먹먹한데 그것이 공포인지 공감인지 알 수가 없다.

- 괴롭다.
- 아아 괴롭다.
- 왜 나를 이리 고통스럽게 하느냐······.

“약의 부작용이?”
여인이 다급하게 다가서려다 노인에게 저지당했다. 노인의 얼굴은 다시 평소의 냉막한 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섣불리 손대지 마라.”
노인이 말했다.
“어차피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사방을 휘돌며 고통을 호소하던 그것이 다시 한조의 앞으로 돌아와 섰다. 날카롭게 돋아난 손톱으로 한조의 어깨를 턱, 짚더니 그것이 고개를 들었다. 한조는 깜짝 놀라 뜨악한 비명을 질렀다. 눈을 맞춰오는 그것의 얼굴은 아까 본 것처럼 끔찍하지 않았다.
요동하던 살갗이 일순간에 팽팽해지고 납 같던 안색도 희게 변하였다. 깎아놓은 돌처럼 뻣뻣하던 안구에 물기가 돌았고 비록 백치같은 얼굴이지만 표정이 있고 의식이 생겼다. 그것이 생명을 얻은 것이다.
마주쳐오는 두 눈동자에 절실한 빛이 서리더니 눈으로 물어왔다. 몸의 변화와 고통 속에서 그것은 한조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려왔다.
“······아니야.”
한조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아니야. 난···나는!”
“상처를 치료해라.”
노인은 한조로부터 냉정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그의 왕에게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자, 가자.”
여인들이 한조를 끌었다.
“오늘은 이만 됐다. 다음에 쓸 일이 있으면 또 불러내마.”
“다음?”
한조는 새파란 얼굴로 되뇌었다. 다음이라면, 이런 일을 앞으로 또 하란 말인가? 
“다음이라고?”
그렇게 외친 한조는 그대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 * *



처음 그 병이 발병했을 때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들의 황제가 밤마다 피부가 뜨끈하여 잠을 자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도 가벼운 불면증 정도로만 치부했다. 하지만 잠들지 못하는 밤은 점점 길어지고 급기야 황제는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불타는 것 같구나.’
황제가 말했다.
‘이 열기를 재워다오.’
의약사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황제에게 밤에 잠이 잘 오는 약을 대령하고 몸의 열기를 식혀줄 특수 제조된 얼음물을 대령했다. 그러나 황제의 화기(火氣)는 더해만 갔다.
‘나를 잠재우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
황제는 고통스러웠다.
‘내 불기를 잠재우는 자에게 권력을 주겠다.’
황제는 자신의 가슴을 피가 나도록 긁었다. 속에서 불이 일었다.
‘나를 치료하는 자는 황녀와 결혼시키겠다! 아아, 나를 치료해다오! 나는 병이 들었다!’
병은 황제를 오랜 시간동안 괴롭혔다. 그는 죽을 때까지 병과 싸웠다. 의학사들은 황제가 죽자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보위에 앉은 황제가 다시 불면을 호소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월이 흐르고 몇 명이나 되는 황제들이 병에 걸렸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황제의 직계에게서만 나타나는 병이었다. 때때로 황가의 피가 진하게 흐르는 가문에서 병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황제처럼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피부가 좀 거칠어지고 불면증이 오래가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신벌입니다.’
신관이 말했다.
‘큰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황제는 큰 제사를 드렸다. 그래도 병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일 비천한 여인과 결혼을 하소서.’
황궁 제일 의사가 조심스럽게 상소했다.
‘황가의 피에서만 나타나는 병입니다. 피를 옅게 하소서.’
그 말에 신관들은 벌컥 화를 냈다.
‘폐하는 신의 피를 이어받은 분. 피를 옅게 할 수는 없소!’
검은 눈동자와 검은 피부. 그리고 교교한 달빛처럼 광택이 흐르는 피부는 그란사나황가의 독특한 특징.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남겨주었다는 표시. 그것은 그란사나국의 자랑이고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상징이었다.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의사들은 신관을 설득했다.
‘이대로 전하가 돌아가시는 것을 볼 참입니까?’
결국 황제는 농노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다. 혀가 잘리고 눈이 종년들이 끌려와 황제와 침수를 들었다. 달이 차서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그들이 아이 낳는 곳에서는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태어난 아기들은 마치 국모의 몸에서 난 것처럼 위장이 되었다.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면서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은 조금씩 옅어지게 되었다. 조금은 틈도 없이 새까만 밤하늘 같던 황제의 눈동자에 하늘색이 비칠 때도 있었고 초록 숲의 빛깔이 비칠 때도 있었다. 검고 부드럽던 직모는 구불지게 되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짙은 밤색이나 붉은 빛깔을 띠기도 했다.
의약사들의 노력으로 잠시 차도를 보이는가 싶던 병은 한 세대가 다 가기도 전에 세 명이나 되는 황태자들의 목숨을 빼앗아가 버렸다. 국장은 한 달 간격으로 치러졌다. 국민은 도탄에 빠졌고 황가는 시름했다. 피를 연하게 하는 것 역시 소용이 없었다. 병마는 마치 저주처럼 황가에 들러붙었다.
그때부터는 병마를 다스리고자하는 노력보다 어떻게 하면 생존율을 높이느냐에 의약사들의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들은 가능한 많은 여인과 황제가 동침하기를 원했고, 때문에 많은 황족들이 태어났다. 성의 뒤뜰에 위치한 탑의 방에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종년들은 아이를 낳았고 아이들은 죽어갔다.
‘끝이다.’
황제는 신음했다.
‘신은 우리를 버린 것이다.’
의약사들이 각고의 노력을 하는 동안 신관들은 이것을 신벌로 간주하고 끝없이 기도를 했다. 그들은 그들의 황제를 살려줄 약을 보내달라고 반복하여 기도했다. 그 기도는 백년이나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신은 한 번도 계시를 보내주지 않았다. 마치 인간들의 발악이 우습기라도 한 듯이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래도 신관들은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밝은 햇살에 눈알이 시렸다. 옅은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릴 때마다 금싸라기 같은 햇빛이 비쳤다. 아직 더 자고 싶은데 눈이 부셔서 기분이 나빴다. 바람을 품은 커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그 틈을 타 한조는 고개를 베개에 박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아우······.”
온 몸이 후끈후끈한 것이 열이 있는 모양이었다. 감기 따위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그는 끙끙 앓는 와중에도 베개에 콧물을 묻히기 싫었기 때문에 손으로 슥 코를 문댔다. 하지만 코는 멀쩡했다. 기침도 없었다. 감기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왜 열이 나는 걸까. 한조는 다시 생각했다. 감기가 아니라면 몸살일지도 모른다. 그는 큰일을 치르고 나면 꼭 나중에 몰아서 아프곤 했다. 최근에 있었던 힘든 일이라면 5월에 있었던 대동제 준비다.
한조의 과는 술집을 열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서빙을 하고 남자들은 술과 안주의 재료를 날랐다. 술이 고픈 청춘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가는 대학 축제를 보면 된다. 벽면을 가득 채우도록 쌓아놓은 술병이 차곡차곡 비어가기 시작했다. 한조는 술을 잘 못하기 때문에 대체 저 술들을 어떻게 먹어치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 식탁에다 성대하게 토해놓은 것을 치우고 있을 때였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미인대회 시작했나봐!’
한조는 걸레를 내팽개치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각 과마다 내로라하는 미인들을 앞세우는 축제의 백미였다. 과의 자존심이자 프라이드! 같은 말 아니냐고 과대에게 물었다가 핀잔을 먹었었다.
‘예진이 이쁘다~.’
누군가 진심어린 목소리로 감탄을 했다. 암 예쁘지. 예쁘고말고. 한조는 절로 목에 힘이 빡 들어갔다. 사랑스런 컬러의 원피스를 입고 나온 예진이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쟨 내 여자 친구가 될 거야······.
한조는 속으로 생각했다.
예진이도 나한테 맘이 있는 게 분명해.
그때 예진이가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더니 눈웃음을 살살치며 고개를 까닥거려 아는 체를 했다. 한조는 괜히 우쭐해졌다.
‘야, 역시 우리 과 가시나가 젤 이쁘네.’
뒤에서 곰처럼 우락부락한 복학생 과대가 불쑥 나타나더니 한조에게 말을 걸었다.
‘안 그릇나?’
‘으, 응. 그렇죠.’
‘가시나 확 자빠트렸으면 좋겠네. 젖이 삼삼한게······.’
‘형!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한조는 정색을 했다.
‘예진이한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두 사람의 관계라는 건 그, 그 부위가 삼삼하거나 안 삼삼하거나 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뭐라꼬? 니 미칫나?’
경상도가 고향인 과대는 담배를 꼬나물며 아니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작고 찢어진 두 눈으로 한조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갑자기 파안대소를 했다.
‘니 설마 아직 동···정?’
한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형,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가시나들아, 니들 들었나? 한조가 동정이라칸다! 니네 중에 누가 하나 대줘라!’
‘꺅! 선배 저질!’
여자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면서도 슬금슬금 웃었다. 왜 저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까. 한조는 분노가 치밀었다. 과대가 재벌 집 아들이라는 소문 때문일까?
놀림감이 된 한조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화가 나자 다시 가슴이 답답해지고 열이 확 끓었다. 침착하자···침착하자······. 한조는 속으로 생각했다. 진정하자. 옛날 일을 떠올려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아프지나 말아야지.
‘그나저나 왜 이렇게 힘들지······.’
한조는 기운이 하나도 없는 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손가락이 금세 척척해졌다. 그야말로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있었다. 몸살이 아니라 더 중한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한조는 눈을 감은채로 곰곰이 생각했다.
‘난 뭔가에 놀라면 꼭 이렇게 앓곤 했는데?’
그 순간 기억이 몰려드는 것처럼 간밤의 일들이 확 지나갔다. 불에 타죽던 순간부터 기사들에게 쫓겼던 일. 강제로 목욕을 당하고 짐승처럼 질질 끌려가서 당했던 일들이 불시에 떠올랐다. 그 시체와 같던 면상에 생명의 꽃이 피고, 어금니로 목을 꽉 깨물던 느낌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한조는 눈을 번쩍 뜨고 서둘러 일어났다. 그리고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파랗게 질려서는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널찍한 방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는 꽃과 여자가 조각된 고풍스러운 침대 위에 혼자 앉아있었다.
그래도 무서워서 한조는 신경을 날카롭게 갈고 구석구석까지 시선을 주었다. 벽장 뒤의 어스름한 곳과 식탁 아래 깊은 공간과 바닥에 끌리도록 축 처진 무거운 커튼의 뒤쪽까지 모가지를 길게 빼고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침대가 방 중간에 떵하니 놓여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깼는가?”
그래서 하얗고 차가운 손이 어깨를 짚었을 때에는 너무 심하게 놀란 나머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는 빳빳하게 굳은 채로 고개만 천천히 뒤로 돌렸다. 그러자 중동지방 여자들처럼 얼굴만 빼고 전신을 긴 천으로 감싼 여인이 보였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파란 눈동자, 뾰족한 이목구비. 어제 한조를 씻긴 여인이다.
“어제보다는 침착해보이는구나.”
심하게 놀란 나머지 도망갈 생각도, 비명도 못 지른 것인데 여인은 한조가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이만 됐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음에 쓸 일이 있으면 또 불러내마.’
“왜 왔어요?”
한조의 입술이 비틀어 올라갔다. 눈썹은 쇼크에 빠진 것처럼 한껏 치떠지고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또, 또 하려고요?”
“무엇을 말이냐?”
여인은 한조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얼굴을 가져왔다. 
여인의 얼굴이 다가올수록 한조의 얼굴이 더더욱 이상하게 구겨졌다. 뭐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입술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돈 없어서 어학연수 못 간 것이 이렇게 후회가 될 줄이야···외국인의 얼굴이 다가오자 무섭고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여인은 한조의 귀에 자신의 입술을 바싹 대고 말했다.
“밥 먹어.”
“네?
한조는 잠시 알아듣지 못했다.
“밥 먹으라고.”
여인은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한조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덕분에 한조는 침대 아래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 여자 힘이 엄청 세다. 177센티짜리 20대 청년을 질질 끌고 갈 정도니 말이다.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밖으로 나오자 어제 봤던 그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복도를 따라 아주 좁고 나지막하게 난 몇 개의 창문 사이로 밤하늘이 보였다. 가지런하지 못한 돌 벽이 줄줄이 이어지고, 계단을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가, 방을 통과했다가 하며 한조는 전혀 실용적이지 못한 건물 속으로 끌려갔다.
어제도 이렇게 여인들에 의해 질질 끌려갔지만 그때보다는 조금 마음이 평화로웠다. 밥을 먹자고 했으니 밥을 먹여줄 것이다. 
그 뒤에 그 이상한 행위를 당한다 해도 최소한 밥을 먹을 때까지는 안 건드릴 테니 지금 당장은 괜찮을 것 같았다.
얼마나 빙빙 둘러왔을까. 드디어 마지막 문이 열리고 한조는 향긋한 음식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것은 구운 돼지와 따뜻한 빵의 냄새였다. 오기 전까지는 음식따위 안 먹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먹을 것을 앞에 두자 한조는 자신이 얼마나 굶주렸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흐르는 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먹지.”
그 너른 식탁에는 앉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여인이 이끌기도 전에 한조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여인을 곁눈질로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먹어도 되는 건가?’
한조는 꿀꺽 침을 삼켰다.
‘먹어도 되나 보다.’
결심을 굳히기도 전에 먼저 손이 나갔다.
그는 먼저 맛있는 냄새를 풀풀 풍기는 돼지고기로 손을 뻗었다. 그것은 과일의 즙과 땅콩버터로 버무려져 있었다. 포크를 쓸 여유도 없었다. 그는 손으로 고기를 뜯었다. 한입 베어 물자 제일 먼저 고소한 땅콩향이 입안을 가득 메우고 그 다음에 고기의 육즙이 피맛과 함께 입 안을 감돌았다. 평상시의 한조는 촌스러운 웰던 파였지만, 지금은 거기서 피가 흐르건 물이 흐르건 상관없었다. 맛있기만 했다.
꿀꺽꿀꺽 고기를 집어삼킨 그는 다음으로 시금치를 갈아 만든 스프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이 칼칼했다. 일단 수분이 있는 것을 입술에 대자 정신없이 삼켜버렸다.
초콜렛이 들어간 파이와 꿀로 구워낸 과자, 백합 냄비요리, 신선한 과일로 주위를 장식한 아삭바삭한 샐러드. 모두가 그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식탁 위의 것을 쓸어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달려들던 한조의 손놀림이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느려졌다. 그는 대식가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오래 굶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최소한 아플 때도 죽을 먹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아까부터 궁금했던 아름다운 백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무리 봐도 살아 있는 것 같다. 얌전히 접시위에 놓여있지만 먹으라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이건 먹는 거에요?”
그 질문에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백조의 배 아랫부분을 잡더니 두 손으로 쫙 찢었다. 한조는 식겁하여 소리를 지를 뻔 했으나 백조는 유순하게 속살을 벌려주었다. 그러자 갖은 야채와 싱싱한 굴이 드러났다. 대체 무슨 수로 요리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백조는 바깥은 생전 모습 그대로, 속살은 맛있게 구워진 음식이었던 것이다.
“음······.”
한조는 입맛을 쩍 다셨다. 동물애호가는 아니지만 백조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식이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다른 여인이 몇 개나 되는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꿀에 절인 모과와, 케이크 몇 조각 따위였다. 한조는 머뭇머뭇 접시를 받아들었다. 슬슬 왜 이렇게 잘 먹이나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맛있게 먹으렴.”
나중에 나타난 여인이 한조가 비운 접시를 보더니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야 살도 찌고.”
“먹을 데도 많아 지지.”
그리고 두 여인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입 맛 떨어지게······.’
그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다 먹어놓고 입 맛 떨어지는 한조였다.

6~8편  
아니나 다를까. 찌워서 먹이니 어쩌니 하는 대화를 하더니, 그들은 이번에도 한조를 욕실로 끌고 갔다. 이번에는 한조도 순순히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팔을 들라면 팔을 들었고 다리를 들라면 다리를 들었다. 그녀들은 이번에도 성기와 고환을 위로 끄집어 올리고는 사이사이의 살들을 청소해주었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한조는 시선을 멀리 둔 채로 숫자만 세아렸다.
여자 팬티 보고 죽을 때 이만하면 괜찮은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저승에서는 여자한테 고추를 빡빡 씻겨 지고 있으니···천국에 온 건가?
과대형이었다면 좋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늘 누렁이는 질리도록 타봤고 흑마도 타봤으니 백마 타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한조는 두 여인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백마가 자기보다 힘이 세고 호시탐탐 시체 같은 놈한테 자기를 던져줄 생각만 하고 있는 데야······.
“이 옷을 입어라.”
그들은 한조에게 새 옷을 건네주었다. 한조는 손목과 가슴부분에 거지같이 늘어지는 레이스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을 신어라.”
그들은 또 끝이 뾰족한 나막신도 건네주었다. 한조는 그것을 신었다. 발이 불편했지만 참을 만 했다.
준비가 끝나자 두 여인은 그의 팔을 각각 한 쪽씩 끼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저번처럼 발악을 할까봐 그런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조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침착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제대로 된 설명을 듣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기로 결심을 굳힌 것이다. 그는 힘 있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의외에 모습에 여인들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짓을 당할 건지 알 텐데 말이다.
그들은 다시 몇 개의 문과 구불구불한 복도와 어두침침한 방을 지나 위로, 위로 올라갔다. 어제는 이렇게 먼지도 모르고 질질 끌려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디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한조는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았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떠한 법칙이 느껴지는 이동 법이었다. 둘 셋, 한 번 돌고. 셋 넷, 문을 통과하고. 그 다음부터는 오른편, 오른편으로 쭉 돌아 들어간다.
마침내 시체가 들어있던 방 문 앞에 도달하였다. 생각대로 그 노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한조를 앞에 세워놓고는 짐승처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한참을 살펴보더니 만족한 표정으로 씩 웃는다. 고기를 가득 먹였다더니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식사는 입에 맞았나?”
“네.”
한조는 떨지 않도록 노력하며 대답했다.
“그래, 맛있게 먹었다고?”
“네.”
“그래···그래야지.”
노인은 한조의 뺨을 툭툭 때렸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살얼음이 닿는 듯 해 한조는 섬칫했다.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야 먹을 곳도 많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한조는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말했다.
“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난 왜 여기에 온 겁니까?”
그는 여기서 차마 묻기 어렵다는 듯이 잠시 말을 끊었다.
“여기는 지옥입니까?”
“지옥?”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지옥이라고? 네가 죽어서 지옥에 왔다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나는 불에 타서 죽었어요.”
한조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그러니까 저승에 왔다고···생각했어요.”
“불에 타 죽었다고?”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한조의 턱을 잡고 위로 추켜올렸다. 한조는 그의 누린내 나는 입술이 코앞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너를 태운 것은 지옥불이 아니라 신성한 불꽃이란다, 아가야. 너는 우리가 대를 이어 기도한 끝에 나타난 단 하나의 희망이지. 우리는 신관 하나를 희생하고 대신 너를 데려왔단다.”
“무슨 소리에요 그게?”
한조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는 노인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말해주세요!”
그때 첫 번째 문이 우르르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두 명의 장정이 문을 벽에다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윽고 두 번째 문과 삼중의 열쇠가 나타났다. 여인이 철컹철컹 문을 열었다.
“기다려요.”
막상 저 두꺼운 문이 열리는 것을 보자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한조는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아직 난 아무것도······.”
“네가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아가야.”
노인이 한조의 팔목을 잡고 늘어졌다.
“우린 네가 어디서 왔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아. 넌 그냥 시커먼 머리카락과 시커먼 눈을 가진 약일뿐이야.”
“놔, 놔요!”
한조는 돌벽에 딱 붙었다. 문이 열리고, 냉기가 쏟아졌다. 마치 어둡고 습한 굴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노인이 하는 말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약이라니, 무슨 약이란 말인가.
“이리 오너라, 아가야.”
노인이 어르듯이 속삭였다.
“나를 힘 빠지게 하지 마라. 어차피 너는 저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한조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막상 저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어제 보았던 시체의 모습이 떠올라서 오금이 저렸다. 나무 껍질 같던 피부, 불거져 나온 두 개의 어금니, 쭉 빼문 혀, 갈고리 같던 손가락. 무엇 하나 끔찍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여인이 다가와 한조를 붙잡았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힘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한조는 발에 힘을 주고 버텼다. 과연 밥 먹은 효과가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 오래 버틸 수 있었다.
남자들이 다가와서 그를 번쩍 들어올리기 전까지 말이다.
“먼저 그분을 쳐다봐서는 안 된다.”
노인이 함께 걸으며 빠르게 읊조렸다.
“불경한 말을 해서도 안 된다. 나의 왕이나 전하라는 호칭을 반드시 붙여야만 한다. 그 분은 지금 막 죽음의 잠에서 건져 올려져 어린아이처럼 무구한 상태시다. 하자는 것은 전부 들어드려라.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한조를 획 낚아채서는 눈을 부릅뜨고 무시무시한 어조로 말했다.
“그분이 네 몸을 탐하면 절대 거부해서는 안 된다.”
“악!”
그 말을 끝으로 한조는 어둠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어찌나 세게 집어던져졌는지 그는 세 번이나 바닥을 굴렀다. 돌바닥에 머리를 박았는지라 잠시 고개를 숙이고 신음하는 사이 드드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혀버렸다. 한조는 깜짝 놀라 큰 소리로 외쳤다.
“할아버지! 오늘은 안 들어오세요?”
밉살스런 노인네지만 여기 혼자 들어오는 것보다는 나았다.
“오늘은 너 혼자다.”
노인이 저 멀리서 대꾸했다.
“명심해라. 너는 절대로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 분을 다치게 해서도 안 된다. 그분은 신성하신······.”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무거운 소리가 나더니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한조는 혼자 남겨졌다. 그는 차가운 돌과 풀풀 사방에 날리는 냉기 속에 남겨졌다. 벽면에서 어스름하게 타오르고 있는 작은 램프 하나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작은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사람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사람 그림자가 보일 리 없지.’
한조는 꿀꺽 침을 삼켰다.
‘어제 그놈은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흠칫 몸을 떨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그것이 누워있던 돌침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조는 재빨리 침대의 뒷부분과 탁자와 의자의 아랫부분과 거대한 벽난로 속의 깊숙한 곳을 눈으로 훑었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몸을 웅크리고 한동안 가만히 있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없잖아?”
한조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역시 어제 그 일은 꿈이었던가?”
사실 생각해보면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바싹 말라 비틀어진 것 같던 시체가 자신의 피를 먹고 일어나 생명을 얻는다니, 괴담에나 나올만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온 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속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우러나왔다. 어느새 식은땀이 촉촉하게 베어버린 이마를 훔치며 그는 어색한 미소를 뗬다.
“······숨결이 곱다.”
하고 등 뒤에서 오싹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히이이익!”
한조는 식겁하여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아까 여인에게 당했던 것과 똑같은 패턴에 당했다. 앞만 꼼꼼히 살펴보면 뭐하나. 그 차갑고 끔찍한 손길은 뒤에서 나타나 한조의 얼굴을 그러쥐려 했다.
천장이 빙글 돌아가나 싶더니 하얗다 못해 창백하고 푸르스름한 낯가죽이 보였다. 그것은 시커멓게 내려앉은 눈두덩이 속에서 귀기를 띈 검은 눈동자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아악!”
한조는 뒹굴, 다시 몸을 굴렸다. 그 무섭고 두려운 것이 한조가 있던 곳을 한 박자 늦게 턱, 짚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돌바닥을 느리게 움켜쥐었다가 한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나를 피하지?”
하지만 한조는 지금 대답할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이를 딱딱 마주치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놈들은 왜 다 뒤에서 나타나고 지랄······. 식겁한 나머지 오줌을 갈길 뻔 했다.
한조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뚫어져라 바닥만 응시했다. 왜 나를 피하냐고? 당연히 무서우니까 피하는 거지! 그는 갈고리처럼 앙상하고 오래된 철처럼 기분 나쁜 광택을 빛내는 창백한 손가락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혈관이 툭툭 불거져 나온 대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앙상한 것이었다. 길게 자라난 손톱은 윤기가 없었으며 그 끝은 무척 날카로워 보였다.
저 손에 한 번 꼬집히기라도 한다면······.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조였다.
“왜 그래.”
그때 그 기다랗고 차가운 손이 천천히 한조를 향해 뻗쳤다. 한조는 또 깜짝 놀라 뒤로 풀쩍 물러났다.
“왜 그러느냐.”
저 무섭고 두려운 것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다시 바닥만 짚었다. 그러자 잿빛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그의 얼굴이 불빛에 정면으로 비쳐졌다.
한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두 개의 흉흉한 안광이 푹 꺼진 눈두덩이 위에서 불길하게 번뜩거리는 것이 보였다. 오래 굶은 짐승처럼 사납고 야성적이다.
높고 오뚝한 콧대는 살이 없어서 칼날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었으며 그 아래로 주름이 심하게 잡힌 보랏빛 입술이 보였다. 길고 검은 로브로 온 몸을 친친 감싸고 있었는데 그 위로 드러난 피부는 밀랍처럼 차가운 죽은 자의 피부였다.
그렇게 생긴 주제에 짓고 있는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앳되다. 저 얼굴에 앳되다는 표현을 써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한조의 눈에는 그렇게 밖에 비치지 않았다. 검은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지나치게 언밸런스해 더욱 두렵고 무서웠다.
다시 헛물을 켠 그는 또다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더니 곧 사납게 인상을 썼다. 안 그래도 무서운 것이 인상까지 쓰니 한조는 숨이 턱 막혔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심장을 움켜잡았다. 무서워서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나를 피하지 마라.”
저 무섭고 두려운 것이 말했다.
“네가 나를 살렸다. 너는 나의 어머니와 같다. 나를 외면하지 마라. 나를 외면하지 마라! 우리는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거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꼭 절규처럼 쏟아졌다.
“나···난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한조는 덜덜 떨면서도 할 말은 했다.
“우리 엄마 아빠 덕분에 내가 태어났는데 그게 왜 당신 때문이에요?”
“나를 잡아라.”
그것이 손을 뻗어 한조를 움켜쥐려 했다. 어찌나 팔이 긴지 저 멀리서 한 번 쭉 뻗자 한조의 뺨에 닿을 듯 했다.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한 한조는 무릎걸음으로 걸었다.
“싫어요. 저리 가세요.”
“내게 닿아라.”
그것은 호소하듯 두 손을 자신의 가슴께로 가져가 모아 쥐었다.
“싫어요. 당신은 나를 다치게 했어요.”
“너를?”
그 말에 놈이 고개를 갸웃 꺾는다.
“내가?”
전혀 기억에 없다는 태도에 울컥 화가 났다.
“그래요. 당신이 나를, 내 목을 물어뜯었어요.”
한조는 모가지를 덮고 있는 레이스를 사정없이 쭉 옆으로 뜯었다. 그러자 거기에는 붉게 부어오르고 딱지가 진 상처가 나타났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겠어요.”
“나는 모르겠다.”
그것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나는 것은···죽음 속에서 생명수를 마시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달콤하고 황홀하게 나를 적셨으나 그 양이 너무도 적어서 나는 지글지글 끓는 열통 속에 다시 남겨졌다. 한 번만 더 마시고 싶구나. 그 냄새. 그 향기···아아, 참을 수가 없다.”
중얼중얼 말을 쏟아낸 그것이 문득 가슴을 그러잡고 호소했다.
“그래······. 방금 전까지도 나는 그렇게 아팠다. 하지만 네가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었다. 이유를 알 수가 없구나. 네가···네가······.”
그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듯 몇 번이고 말을 빙글빙글 돌렸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말하는 자였다. 왜 아프지 않게 된 걸까 이유를 찾으며 갈팡질팡하던 두 눈동자에 한 순간 짙은 불꽃이 튀었다. 그 눈을 마주하자 심장이 아파서 한조는 움쩍달싹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것이 말했다.
“네가 이곳에서 첫 숨을 쉰 순간부터 말이다.”
손이 다가온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은 이미 지척에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한조는 뜨악하여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지만 이미 늦었다. 섬뜩할 만큼 차가운 손가락이 한조의 가슴을 단단히 감싸더니 와락 끌어당겨왔다.
“히이이익!”
마치 얼음으로 심장을 마사지 하는 듯하다. 한조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차가울 수 있을까. 마치 묘지의 공동에서 끌어낸 시체처럼 차갑구나.
그것은 한조의 어깨에 턱을 괴더니 만족스런 한숨을 흘렸다. 푸석하고 묵직한 머리채가 한조의 얼굴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마치 다듬어지지 않은 짐승의 털가죽처럼 거친 것으로 어찌나 결이 강하지 닿는 것만으로도 한조의 뺨에 상처를 낼 지경이었다.
“아파······.”
한조는 차가운 것에 심장이 지져지는 느낌에 발버둥을 쳤다. 너무 차가워서 불에 덴 듯 아팠다.
“아파. 아프다고······.”
심장이 아파서 눈물이 났다. 불타 죽던 날의 그날처럼, 가슴에서 불길이 번졌다. 하지만 그 불길은 이제 바깥으로 치솟지 않았다. 내부에서 조용히 활활 타오르며 아직도 나는 여기에 있다고 조용히 말을 걸고 있었다.
“너는 무엇이냐?”
이를 악물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한조를 뒤에서 껴안고 그것이 말했다. 그것역시 어딘가 아픈 듯한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놓아주지 않는 걸까. 등과 가슴을 부비며 그것은 낮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제야 내게로 왔지? 나를 다시 그 고통 속에 남겨두려는 게 아니라면 이리 와서 나를 안아다오. 하지만 그러지 못할 바엔 차라리 나를 죽여 다오. 나는 다시는 혼자 남겨지지 않을 테니.”
낮고 속삭이는 것 같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점차 굵직한 남자의 음성이 되었다. 이미 더 이상 틈이 없을 정도로 꽉 닿아있는 몸을 그것이 더욱 세차게 끌어안더니 흠뻑 숨을 들이킨다. 마치 이 세상 둘도 없는 꽃향기를 마시는 것처럼, 그는 한조의 머리와 목덜미의 체취를 깊이 깊이 들이켰다.
“아프다구요······.”
하지만 한조의 목소리는 돌바닥을 뒹구는 의미 없는 먼지처럼 어둠속에 묻혀버렸다.




또 무슨 해괴한 짓을 당할까 싶어 걱정이 되어 죽을 뻔 했지만 의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아침이 올 때까지 한조를 꼭 끌어안은 채로 숨만 들이셨다 내셨다 했을 뿐이었다.
첫 만남부터 워낙에 강렬했던지라 한조는 그것의 품속에 있는 것이 너무도 불편했다. 그것이 잠이 든 후에도 계속해서 빠져나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어찌나 꽉꽉 잡고 잠이 들었는지 마치 강철의 그물에 잡힌 것만 같았다.
밤도 한참이나 지나갔을 무렵에야 한조도 깜빡 잠이 들 수 있었다. 램프의 기름도 다 되어 약간의 연기와 함께 꺼져버리고 남은 것은 저 작은 창문 사이로 비치는 별빛뿐이었다.
심장이 멈추도록 차갑던 손은 시간이 지나자 한조의 온기를 나눠받았는지 약간은 따스하게 되었고 까칠한 생체기를 남긴 머리카락도 약간 익숙해졌다. 두 사람은 옆으로 나란히 누운 채로 깜빡 잠이 들었다. 그것은 한조의 다리 사이에다 자신의 다리를 끼우고, 한조의 뒤통수의 자신의 얼굴을 묻은 채로 잠이 들었다.
작은 창문 사이로 여명의 첫 햇살이 창백한 발을 늘어뜨렸을 때였다. 딱딱한 바닥에서, 뒤에는 사람인지 시첸지 알 수 없는 것을 업고 잠이 들었던 한조가 먼저 눈을 떴다. 그는 어스름한 햇살에 눈을 깜빡였다. 잠시 여기가 어딘지 햇갈려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뒤에서 깊은 소리를 내며 잠이 든 그것을 보고는 식겁하여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의 힘은 보통이 아니었고 한조는 아직 잠든 그것의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를 어쩌지······. 혼자 고민하고 있는데 우르르 소리를 내며 무거운 석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들이 돌아온 것이다.
이윽고 두 명의 여인을 거느린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바닥을 뒹굴고 있는 그것과 한조를 보더니 눈썹을 위로 길게 추켜올렸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다.
“이쪽으로······.”
노인은 한조에게 이리 오라는 시늉을 했지만 그것은 한조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움직이고 싶은데,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이 어찌나 세게 껴안고 있는지 몸이 빠지지가 않았다. 결국 여인들이 다가와 한조를 붙잡고 쭉쭉 위로 잡아당겼다. 그래도 되지 않았다.
“미치겠군.”
한조는 상반신은 여인들의 두 손에 잡힌 채로, 가슴 아래로는 그것에게 잡힌 채로 중얼거렸다.
“옷을 벗어라.”
보다 못한 노인이 말했다.
“그래야 나갈 수 있겠구나.”
어디서 나타났는지 여인들은 품속에서 작은 칼을 꺼내더니 그것으로 한조의 옷을 조금씩 잘라내기 시작했다. 자줏빛 자수가 놓인 상의가 잘려나가고 하의도 수십 개의 작은 조각이 되어 잘려나갔다.
한조는 이제 진짜로 미칠 지경이었다. 이 나라에 온지 겨우 삼일째인데 매일 한 번씩은 이 여자들 앞에서 벌거벗게 된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노인은 새벽빛 아래 벌거벗은 한조의 나체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하긴, 한조도 아침부터 남자 나체를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닐 것이기 때문의 그 시선을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잠깐만.’
한조는 문득 멈추어 섰다.
‘이해하는 건 이해하는 거고. 내 옷을 벗긴 건 지잖아?’
저 노인네가 왜 노려보고 지랄이냐는 생각이 들 무렵 노인이 우아한 동작으로 자신의 어깨장식을 푸르더니 망토를 벗어다가 한조에게 걸쳐주었다.
“그만 가자.”
뭐라도 한 겹 걸쳐진 한조는 다시 기분이 괜찮아졌다. 원래 그는 남을 오래 미워하는 종자가 아니었다. 단순하고, 남에게 잘 반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물론 여자들이 그 장점 때문에 자신을 찼다는 것을 한조는 모르지만 말이다-
한조는 노인의 뒤를 줄레줄레 따라갔다.
열심히 걸어가 보니 도착한 곳은 식당이었다. 이건 또 뭐람···눈살을 찌푸릴 사이도 없이 음식이 날아 들어온다. 어제는 주구장창 고기를 먹이더니 오늘은 생선이 위주다.
“야채와 함께 조리한 장어구이, 레몬즙에 절인 생굴, 꿀을 바른 흑빵과 철갑상어 알 요리. 바다가재와 삶은 생선. 모두 맛이 좋을 거다.”
맛은 좋겠다만······.
한조는 스푼을 들다 말고 침묵했다.
흑심이 눈에 보여서 먹기가 그렇다.
“저 한 개만 물어봐도 될까요?”
처먹기나 하라는 시선이 돌아왔지만 한조는 꿋꿋하게 질문했다.
“왜 절 이렇게 잘 먹이세요?”
“아가야. 네가 생각할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노인은 자신도 식사를 할 모양인지 가재 껍질을 뚜둑, 꺾었다.
“너는 그냥 잘 먹고 잘 자서, 살도 포동포동하게 찌고 혈색도 발그스레해 지고 살결에는 윤이 나도록 하면 된단다.”
그러니까 왜 먹이는 거냐고······.
한조는 더더욱 입맛이 없어졌다. 그는 냅킨으로 입을 꾹꾹 눌러 식사를 마쳤음을 알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들은···그 방에 있는 것은 식인종인가요? 날 먹을 건가요?”
“식인?”
노인은 피식 웃었다.
“아가야. 너는 우리에게 생각보다는 소중한 존재란다. 우린 너를 오랫동안 살려놓기 위해 노력할거야. 너는 그분을 위해 이곳으로 왔으니까.”
“그것을 위해 제가 이곳에 오다니요?”
한조는 답답해졌다.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저들은 답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가르쳐주세요. 왜 나는 여기에 있습니까? 저 골방에 갇힌 것은 무엇인가요? 왜 나를 이렇게 먹이는 거죠? 네?”
“때가 되면 알려주마.”
여인이 그들의 대화에 참견했다. 그녀는 한조의 접시를 치우며 차디 찬 눈빛을 보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때가 대체 언젠데요?”
“글쎄, 열밤만 자고 나면?”
다시 노인이 대화를 받았다. 마치 어린아이를 놀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한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눈동자에 활활 불이 붙었다.
‘이렇게 된 이상 혼자서 알아내는 수밖에 없지.’
그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아무리 결심을 굳혀 봤자······.
한조가 이곳에서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것은 반쯤 관에 발을 담구고 있는 듯한 정체불명의 노인과, 돌처럼 차가운 정체불명의 두 여인들. 그리고 그들을 지키는 자들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두 남자와 존재 자체가 정체불명인 시체 같은 저놈.
그 뿐이었던 것이다.

“이봐···요···오.”
한조는 커튼 뒤에 숨어서 고개만 배꼼 내밀었다.
“자는···자는 겁니까?”
그것은 처음의 잊지 못할 만남 때처럼 딱딱한 돌침대 위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두 눈은 조용히 감겨 있고 두 팔은 얌전하게 가슴위로 그러모았다. 코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색색 나고, 가슴도 오르락내리락 한다.
한조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 상태로 슬그머니 걸어 나왔다. 어제는 별 일이 없었다지만 목을 물린 충격은 크게 남았다.
이곳으로 와서 한 가지 강하게 원하게 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렬한 생명연장의 꿈이었다. 불에 타 죽고, 기사들한테 죽을 뻔하고, 이빨이 깨질 뻔 하고, 목을 물려 죽을 뻔 하면서 한조는 ‘일단 살고 보겠습니다!’ 마인드를 굳히게 되었다.
무슨 이유로 이런 곳에 떨어지게 되었는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그럼 인간은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는 원래가 태평한 성격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그래서 잘 반하며 심지가 곧은 청년이었다. 그것은 불에 타 죽은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한조는 그래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즉, 왜 자신을 이곳에 가두느냐에 대해 알아보는 일이었다.
도둑걸음으로 살금살금 다가와 그것의 머리맡에 섰다. 그것은 여전히 기분 좋은 숨소리를 내며 잠만 잘 뿐이었다. 어떻게 그 거대한 문이 열리는 대도 안 깰 수 있을까. 한조는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이봐···요.”
그는 먼저 그것의 팔을 살그머니 잡아당겼다.
“잠···자나요?”
여전히 반응이 없다. 한조는 조금 더 손을 뻗어 그것의 몸통을 잡고 흔들었다.
“일어나 봐요. 어이, 이것 봐요. 나 왔어요.”
“으음······.”
반응이 있기는 있는데 귀찮은 듯 등을 돌려버리는 것이 다였다. 한조는 그것의 얼굴 방향으로 조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다시 가열차게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이봐요. 어이. 이봐···야!”
미인은 잠꾸러기라지만, 미인도 아닌 주제에 잠 쳐 자지 말란 말이다! 한조는 이제 그것의 얼굴을 잘잘 흔들어댔다. 흔들다보니 왠지 살심이 생겼다. 이유는 모르지만 자신이 여기 갇혀있는 것은 전부 이놈 때문이었다. 이놈 때문에 내가···이놈 때문에 내가······. 여자들한테 매일 고추를 보이고 있는 거다. 고추만 보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널 패는 거다 이놈아!
어느새 발까지 올라가서 퍽퍽 차려는데 세상이 둥글게 뒤집어졌다. 엇, 하는 사이 차갑고 서늘한 바위 아래 깔린 것처럼 움쩍달싹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 깨셨어요?. 한조는 어두침침하고 음침한 낯빛이 시야를 온통 가로막는 데에 식은땀을 흘렸다. 깼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저···자다가 깨서 기분나쁘시겠지만요.”
한조는 뻘뻘 땀을 흘리며 말했다.
“전 맛이 없어요.”
“왜 그런 말을 하지?”
“그쪽이 나를······.”
그는 꿀꺽 침을 삼켰다.
“잡아먹고 싶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으니까요.”
“설마. 난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니다.”
한조는 저것이 사람이 아니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안심이 되지 않았다.
“떨지 마라.”
그것은 한조의 뺨을 기다란 손톱으로 콕 찔렀다.
“웃어라.”
“대, 댁부터 먼저 웃어요.”
한조는 살갗을 뾰족하게 찔러오는 손톱을 피하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노려보고 있잖아요. 아직.”
“믿어라. 난 무서운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서 또 헤벌쭉 웃는다.
한조의 얼굴은 핼쑥해졌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쫙 드러나서 더 무서웠다. 다시는 저것한테 웃으라는 말을 하지 않겠노라 결심하는 한조였다.
“넌 내가 널 먹을까봐 두려워하는군?”
당신이라면 안 그렇겠소? 그나저나 어딜 자꾸 만지는 거요?
어느새 그것은 뺨에서부터 미끄러져 동그랗게 솟아난 코끝과 봉긋한 입술을 손톱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한조는 애써 얼굴을 돌렸다. 그러자 그것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자신에게로 돌려놓았다. 슬그머니 위로 쳐다보자 벌쭉벌쭉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아 나 너무 무섭······. 한조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까무러치는 표정을 지었다. 저 시체 같은 것이 웃으니 무서워서 현기증이 일어났다.
“좋으냐? 응, 좋으냐? 내가 웃으니 좋으냐?”
“······기절하겠습니다.”
“그렇게 좋으냐?”
그것이 후후 웃었다. 계속 웃지 마라. 꽉 맞닿은 하체 틈으로 내가 오줌 싸면 너도 기분 별로 안 좋을 테니까.
“그나저나 식사는 하셨어요?”
한조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그 숱한 고난을 헤치고 살아남았는데 여기서 심장마비로 죽을 수 없다는 생명연장의 꿈이 이뤄낸 화제의 전환기술이었다.
“조금 먹었다.”
그 말에 그것은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나는 고기를 좋아한다. 기억이 똑바르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러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삶은 메추리 고기나 피가 베어 나오는 쇠고기 요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아까는 아무리 먹어도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군. 조금만 먹어도 금방 지루해지고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거의 먹지 못했다.”
“그랬···나요? 전 많이 먹었는데······.”
이곳의 요리사는 상당한 실력자임에 틀림없었다. 오늘의 주 요리는 버찌를 곁들인 어린 양고기와 치즈였다. 너무 맛있어서 자제하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았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었다. 이렇게 잘 먹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바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쉽지가 않았다.
자취경력 3년차. 그러나 아직도 할 줄 아는 거라곤 라면에 물 붓기, 비빔면에 물 붓기, 짜짜로니에 물 붓기, 3분 요리에 물 붓기. 조금 더 발전하자면 3분 라면에 물 붓기 3분 짜장에 물 붓기 뿐.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에 매진하고 밤에는 알바에 매진하고 틈틈이 연애사업에 매진하며, 그 사이사이에는 앞날을 대비한 자격증 시험에도 매진해온 대학생활 이었다. 언제 이런 진수성찬을 받아보겠는가. 처음에는 음흉한 여인들의 눈빛 교환에 입맛이 떨어졌던 한조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그저 음식이 나오면 마냥 좋았다.
“왜 안 먹었어요?”
“먹고 싶지 않았다. 이상해. 정말로 좋아하던 음식이었는데 전혀 맛있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지금 몹시 배가 고프다.”
그러더니 그것은 갑자기 한조의 목덜미에 콱 얼굴을 박았다. 한조는 깜짝 놀라 경기를 일으키며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한조의 팔을 잡고 위로 끌어올리더니 움쩍달싹도 못하게 막아버렸다.
“그래요?”
“그래.”
코로 목덜미와 어깨의 오목한 부위를 킁킁 거리며 돌아다니던 그것이 갑자기 덥석 어깻죽지를 한 움큼 베어 물었다. 한조는 혼이 빠져나가는 경험을 했다.
“무슨! 놓!”
“하아···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다.”
그것은 목덜미에 달린 자잘한 자수를 짓씹으며 되뇌었다.
“배가 고파···먹을 것을 다오. 나는 배가 고프다.”
“나, 나가서 먹을 걸 좀 갖다 달라고 할게요.”
한조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이것 좀······.”
그때 그것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한조의 얼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한조는 또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계속 애매하게 웃었다.
“너를 보면 속이 좋지 않다.”
어두침침한 달빛 속에서 그것의 충혈 된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한조는 조용히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너를 보면 배가 고파.”
“먹고 싶어.”
“배가 고파와······.”
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 아닌···게 아니라, 그것인즉 날 죽여서 먹겠다는 말?
한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역시 이놈은 자신을 먹을 생각인 것이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지 못할 뿐, 저것은 분명히 자신을 보고 식욕을 느끼고 있었다.
“난···난.”
한조는 핼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난 맛이 없어요.”
“내가 널 먹을 것처럼 보이나?”
응···아주······. 한조는 속으로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자존심이 상한 듯 눈썹을 찡그리더니 다시 킁킁 목덜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그러다 성에 차지 않는지 혀를 꺼내 살결을 톡, 건드려도 본다. 한조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편 목덜미로 혀를 가져가더니 또 톡, 건드려본다. 한조는 이번에도 자지러지며 어깨를 바싹 움츠렸다.
“하하하!”
한조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그것은 창백한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역시 까무러치게 무서운 얼굴이었다. 새파란 낯빛, 시커먼 눈두덩이, 칙칙한 입술과 퀭하니 도드라져 나온 눈동자와 핼쑥한 얼굴.
하지만 자꾸 보다보니 이제 처음처럼 무섭지만은 않다. 한조는 침을 꼴깍 삼키며 함께 웃어주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도시당체 왜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두남자의 호쾌한 웃음소리는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9~11편
신성황제가 다스리는 그란사나의 백색궁은 아름다운 흰색의 성채로 하늘에 닿을 듯 돋아난 첨탑과 수백 개의 아치, 그리고 그를 이어주는 뼈대가 있는 궁륭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궁륭을 받치기 위해서는 또 수많은 주랑들이 늘어서게 되었고 그것들 역시 모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흰색이었다. 육중한 하중을 견디기 위해 건설된 부벽(보강기둥)은 바깥쪽의 기둥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기둥들마다 뾰족한 탑과 호사스러운 장식품을 달아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였다.
무수한 복도와 또 그 복도를 따라난 창문에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아침마다 빛을 반사하며 흰 건물의 단조로움을 없앴으며 첨두아치의 끝에는 성스러운 신의 문장을 금으로 조각하여 신성국의 면모를 다졌다.
아름다운 궁전의 정면 출입구에는 거대한 차륜창이 나 있었는데, 그 바로 아래로는 초대 신성황제인 그란사르스가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때문에 차륜창에 빛을 받을 때면 신성황제의 머리 위로 태양의 띠가 둘러진 듯 했다. 아침마다 출입문을 드나드는 이들은 그 위용에 절로 고개를 숙였다.
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거대한 괴수의 뱃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건물의 대각(높은 벽을 지탱하기 위한 기둥)과 대각 사이로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제단에는 위대한 황제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기가 질리도록 높은 천정과 열주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그 중앙에 회중석이 자리하고 있다. 회중석 정 중앙의, 빛나는 차륜창의 바로 아래에는 바깥에 자리한 것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초대 신성황제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이 대회랑이었다. 황제가 외국 사신을 접견하기도 하고, 연회를 열기도 하는 공간으로, 보여주기 위한 곳이었다.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였다. 그들은 그란사나 백색궁의 아름다운 외관과 장려한 회랑을 보고 깊은 감동을 하였다. 이곳은 신성한 그분께서 직접 보내주셨다는 그란사나의 황제가 사는 곳이었다.
그란사나 황제는 그 핏줄의 고귀함이 가리키는 대로 이 세상 다시없을 것 같은 짙은 머리카락과 눈빛을 띄고 태어났다. 하늘의 먹물을 한 점 훔쳐다 세상에 뿌려놓은 것 같은 색이라 시인들은 그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로 후대에 전했다. 그것은 그란사나의 자랑이었고 천년을 거듭해서 내려오는 동안에도 쇄하지 않은 하늘의 증표였다.
특히나 이제 곧 황제의 보좌에 오를 신왕은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로 미왕(美王)의 칭호를 얻은 사내였다. 인간이 빚어낸 것 같지 않게 아름다운 황궁을 다스리는 아름다운 왕이라니.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은 눈물을 훔쳐내며 말했다. 지옥에 떨어질 무신론자들도 회개하였다.
“이제 신이 있다는 걸 믿겠어요.”
하지만 저 아름다운 백색궁의 뒤편, 몇 개나 되는 화단과 분수, 인위적으로 조성된 꽃밭과 별궁을 지나, 마차를 타고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저 먼 숲의 어딘가에는 2천 평에 달하는 녹색의 융단아래 우둑하니 돋아난 탑이 하나 있다.
그곳은 금방이라도 마녀가 긴 머리채를 늘어뜨려 놓고 빗질을 할 것처럼 생긴 흉흉한 탑이었다. 6층짜리 돌탑은 너무 오래되어 옆으로 살짝 기운데다 불에 탄 흔적까지 있어 몹시 지저분했다. 창은 좁게 나서 빛도 비추지 않을 것처럼 생긴데다 군데군데 아귀가 맞지 않는 돌이 튀어 나와 있어 그것의 나이가 얼마나 긴지 알려주었다.
탑지기의 초소마저 쓰러질듯 위태위태한 이 탑은 이곳은 신성하고 깨끗한 백색궁의 유일한 오점처럼 보였다.
하지만 누구도 모를 것이다. 돌보는 이 하나 없이 버려진 이 탑이야말로 그들의 제국을 지탱해온 비밀의 장소라는 것과, 이 음산한 검은 탑이 옛날에는 생명의 탑으로 불렸다는 것을 말이다.
“이름이 뭐지?”
그것은 한조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기며 물었다. 밀랍 같은 손가락에 결이 고운 검은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당겨졌다 파라라 흩날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요.”
늘 그것, 저것, 무서운 것, 끔찍한 것 따위로 저 시체 같은 것을 지칭해왔다. 한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한조라고 해요. 이한조. 당신 이름은 뭐에요?”
“일리야스.”
그것은 다시 한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덧붙였다.
“미왕, 일리야스.”
듣고 있던 한조는 어이가 없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푸석푸석하고 말라빠진 면상이 들어온다.
“누가···당신보고 미왕이래요?”
“안 이쁜가?”
그것은 한조의 반응을 살피며 되물었다. 한조는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것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흐려지더니 변명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모라시니가 말해주었다. 내 이름은 일리야스고, 이곳을 다스리는 위대한 자였다고.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로 인해 모두가 나를 보면 한눈에 반하게 되는지라 미왕의 호칭을 얻었다 하였다.”
그러더니 다시 한조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덧붙인다.
“난 안 이쁜가?”
“으···응. 이뻐요 이뻐.”
한조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정말인가?”
“물···론이죠. 아~ 이쁘다 이뻐~.”
그 말에 자신을 아름답다 칭한 일리야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맑고 밝은 목소리로 ‘그르르르’ 웃는 소리도 냈다. 미왕은 무신놈의 미왕. 마왕이겠지. 속으로 생각하던 한조는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버렸다.
“한조 .”
다시 기분이 좋아진 일리야스는 한조의 이름이 마음이 드는지 입으로 몇 번 한조 한조 되뇌었다.
“이한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중얼거리더니 씩, 입술을 귀 끝까지 끌어올리며 웃는다. 워따···꿈에 볼까 무서운 얼굴이오. 한조는 식은땀을 줄 흘렸다. 그는 당황하면 사투리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때는 열여덟 살, 고등학교 2학년 시절. 25번째로 좋아했던 여자애가 사투리 쓰는 남자는 싫다고 하는 바람에 한조는 열심히 서울말을 연습했다. 그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종류의 남자였던 것이다.
외국어보다 어렵다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익힌 한조가 자신 있게 대쉬했을 때에는 이미 그녀에게 서울에서 전학 온 놈팽이가 붙었더라····라는 슬픈 사연은 일단 차치해두자.
그렇게 열심히 익힌 표준어건만 억지로 배워서였을까, 그에게는 한 가지 부작용이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급하면 사투리가 튀어나온다는 것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돌리는데 뒤에서 자칭 미왕이 손으로 턱을 잡는다. 보기 싫어···보기 싫당게······. 아무리 애써 봐도 그놈의 힘 하나는 더럽게 세다. 결국 그 무시무시한 낯짝과 대면하게 되는 한조였다.
“좋으냐?”
또 히죽히죽.
“네? 뭐, 뭐가요?”
“내가 웃으면 좋다지 않았느냐. 내가 웃으니 어떠냐? 좋으냐?”
“······염병.”
“응?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배 고프시댔죠?”
한조는 애교 있게 배시시 웃으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러자 사방에 차려진 진수성찬이 보인다. 이 미친놈이 자신을 볼 때마다 허기가지네, 배가 고프네 하니 한조가 이곳으로 끌려오기 전에 미리미리 준비해놓은 것이었다.
“자, 이거 보세요. 참치, 황치, 놀래기, 장어, 가자미, 도미, 농어에 잉어까지. 준비할 수 있는 생선은 다 삶아 왔구요. 비둘기, 백조, 꿩, 닭, 송아지, 돼지, 사슴과 식초로 버무린 오이무침, 아몬드 파이, 생강파이, 닭 내장 파이, 소의 췌장 파이···음 소의 췌장이라···순대라고 생각하면 먹을 수도 있겠군······아! 또 스튜! 스튜도 잔뜩 준비해왔고, 과일도 종류별로 있어요.”
줄줄 읊느라 숨이 가빴다. 한조는 헉헉대며 뒤로 손을 돌려 짜잔! 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어때? 이만하면 너도 나한테 신경 안 쓰고 먹을 수 있겠지?
실로 목숨의 위험을 느끼는 데야, 그는 시중을 드는 두 여인을 닦달하여 그것이 배가 많이 고파한다고 이야기 했다. 여인들은 한조가 주문하는 대로 음식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녀들이 굽고 삶고 데치고 지진 음식들을 한조는 뿌듯하게 자랑하며 어서 처먹으라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별로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먹고 싶지 않다!”
라는 한마디로 한조와 여인들의 수고를 날려버렸으니까 말이다.
“무슨 소리에요. 저번엔 배가 고파 죽겠댔잖아요.”
“아니야. 내가 먹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야. 내가 먹고 싶은 것은······.”
일리야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조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한조는 부르르 전율했다.
“그, 그러지 말고 먹어봐요. 응?”
내켜하지 않는 일리야스를 붙잡고 한조는 음식 앞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구운 송아지 고기를 손에 쥐어 주었다. 
“싫어. 안 먹는다.”
그러나 일리야스는 고개를 훽 돌려버렸다.
“고기는 싫다. 누린내가 난다.”
“어린 송아지한테서 왜 누린내가 나요? 먹어봐요 응?”
“싫다.”
이 미친 새끼가! 한조는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럼 여기 이 생선 한 점 먹어봐요. 응?”
“그것도 싫다.”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훽 젓는다. 한조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왜, 왜요?”
“비리다.”
일리야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비리시댄다.
꽃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따끈따끈한 생선요리가 비리시댄다.
어린애도 아니고 저 덩치에, 저 얼굴로 음식투정이냐!
한조는 비죽비죽 튀어나오려는 혈관을 가까스로 눌러 앉히며 다시 웃었다.
“그럼 요건 어떠세요? 건포도를 박아 넣은 빵이랍니다. 어때요? 이건 드실 수 있겠죠? 비리지도, 누린내가 나지도 않습니다.”
“흠······.”
과연 이번에는 코까지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본다. 한조는 얼른 드시라는 시늉을 했다. 가만히 빵의 냄새를 맡던 그가 이번에는 또 뭐가 걸리는지 또 훽 고갯짓이다.
“아 왜요!”
결국 한조도 버럭 성질을 냈다.
“왜 안 먹겠다는 건데!”
성질난 김에 반말 나가신다.
“귀찮다.”
일리야스는 딱 부러지게 대꾸하더니 갑자기 벌렁 한조의 무릎위로 드러누워 버렸다. 송장이 드러눕는듯 하다.
“히이익!”
한조는 깜짝 놀라 뒤로 펄쩍 물러나려했지만 무릎위에 누우신 분의 무게 때문에 상체만 덜렁 뒤로 넘어갔다.
“뭐, 무슨 짓인겨!”
“다 귀찮아서 그런다. 네 무릎에 누워서 잠시 쉬어야겠다.”
“허구헌날 처자빠져 자는 양반이 뭐가 심들다 물팍에 눕고 그라요!”
“······무슨 말이냐.”
“저, 저리 가서 누우라고요!”
한조는 얼굴이 벌게져서 돌침대를 가리켰다. 일리야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것은 딱딱해서 누워있으면 온 몸이 아프고 쑤신다. 네 무릎은 뜨뜻하고 폭신하여 목을 뉘이자 내 몸에 꼭 맞춘 것처럼 편안하다.”
그러더니 이내 눈까지 감아버린다.
“안 그려요!”
한조는 절규했다. 시체 같은 너한테 딱 맞는 건 관뿐이야!
그는 씩씩대며 일리야스를 밀어내려 용을 썼지만 일리야스역시 자는 척을 하며 꿈쩍도 않고 버텼다. 물론 자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한조도 알고 일리야스도 알았다.
그 증거로 안 밀려나기 위해 목에 힘줄이 와방 돋아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실랑이 하던 한조도 결국 포기했다. 안 그래도 곯을 대로 곯은 양반, 목에 힘줄 터지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그는 작전을 바꿔 살살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자자, 그러지 말고.”
한조는 달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 좀 먹어봐요. 정말 맛있겠어요.”
그 말에 일리야스가 슬 실눈을 떴다.
“봐요, 봐. 이 싱싱한 포도 알 좀 봐요.”
한조는 포도 한 송이를 똑 떼어다 눈앞에 놓고 흔들었다.
“탐스러운 보랏빛이네요. 음~ 어디 한 알 먹어볼까요?”
포도는 가만히 두고 혀를 뾰족하게 세워 포도 알 하나를 핥아먹었다. 향긋한 냄새가 혀에 침이 고이게 한다. 혀끝으로 핥기만 하다가 날름, 잡아먹었다. 똑 하는 소리와 함께 알맹이가 가지에서 떨어져 나왔다. 한참을 속에서 굴리다 톡, 터트리자 처음에는 약간 시큼하고 다음에는 단맛이 찾아왔다. 신것을 잘 먹지 못하는 한조는 잠시 눈을 감고 부르르 떨었다.
“아, 맛있다.”
맛있게 냠냠 씹어 꼴깍 삼키고는 만족스런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본 한조는 간이 덜컹했다. 일리야스가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히힉!”
자주 들락거리다 보니 생각보다 만만한 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역시 첫 만남의 트라우마는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도망가려다 무릎은 아래다 두고 또 상체만 뒤로 휘청 넘어갔다. 머리가 허예졌다. 저놈이 왜 저럴까. 먹고 싶은데 안 줘서 그러나······.
한참만에야 다시 돌아온 한조의 얼굴에는 가식적인 미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포도 한 알을 따서 일리야스의 입술에 대주었다.
“자, 아~.”
하는 가식적인 목소리와 함께 말이다. 살려면 뭔 짓을 못하리. 다시 한 번 꿈틀대는 생명 연장의 꿈이여······.
하도 무시무시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기에 퉤 뱉어버리거나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군말없이 포도를 집어삼킨다. 
별로 맛이 좋지 않은지 먹자마자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군말 없이 씹어 삼켰다. 그리고는 또다시 안광이 형형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본다. 한조는 다시 덜덜 떨면서 포도 알을 땄다. 그리고 일리야스의 입가에 대주었다.
“자, 아~.”
역시 꿀꺽 받아 삼킨다. 한조는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답지 않게 농담도 했다.
“아유, 우리아기~ 잘도 받아먹네.”
“······.”
검은 눈알이 번쩍, 빛을 뿜는다. 용도 때려잡을 기세다. 한조는 저도 모르게 삭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다시는 농담 따위 하지 않으리. 아부만 하리.
하지만 그날 일리야스는 험악한 분위기와는 달리 한조의 포도를 전부 받아먹었다. 나중에 포도가 다 떨어진 한조가 빵도 뜯어서 먹여주자 그것도 전부 다 먹었다. 
음식을 먹이면 먹일수록 식탐이 당기는지 나중에는 혀를 내밀어 음식을 쥐고 있는 한조의 손가락을 싹 핥기까지 했다. 음식이 입으로 가는 그 짧은 시간도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건 뭐.’
가식적인 얼굴로 잘한다 잘한다 얼러가며 한조는 생각했다.
‘애도 아니고. 곧 죽을 거 같은 게 어리광은······.’
그리고 그 곧 죽을 거 같은 것은 한조의 무릎위에서 눈알을 번뜩대며 식사를 마쳤다.


* * *


하얗고 아름다운 그란사나 백색궁의 뒤로는 벽을 사이에 두고 선 검은 궁전이 하나 있다. 가장 빛나는 부분을 녹여 만든 황궁의 그림자처럼 똑같은 형태, 똑같은 외관을 지니고 있지만 색깔만 검었다. 완벽한 흑과 백의 대조였다.
이 궁전의 이름은 신성제국 그란사나의 신전이자 대성청(聖廳)이었다. 그 어느 나라에도 다시없을 거대한 신전이 이 신전의 정체였다.
기둥하나에서부터 장식물 하나까지 황궁과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는 이곳은 일반사람들이 보면 신전이 아니라 황궁이라고 오해하기에 딱 좋았다. 왜냐하면 신성한 검은색은 황제의 색이기 때문이었다.
두 눈과 머리에 스며든 황제의 빛깔은 천상에 닿았다는 증표. 하지만 그 증표의 색을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신관들에게 있었다. 때문에 황실의 색은 흰색이 되었고 신전의 색은 검은색이 되었다. 황실에는 밝음이 있었지만 신전에는 영광스런 검은빛이 있었다.
그란사나에는 사실 황제가 둘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나는 검은 눈과 머리카락을 가진 그란사나의 정통한 황제이고, 또 하나는 신성국가의 수도 대신관이었다. 황제는 그란사나를 지배하지만 대신관은 종교가 미치는 전 나라를 지배한다. 황제는 육체를 지배하나 대신관은 정신을 지배한다. 황제는 신성하나 신전은 신성집단이다.
겉으로는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 협력하여 제국의 평화를 주도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을 벗기고 나면 그 속에는 털을 세운 채로 서로를 경계하는 두 개의 집단이 있는 것이었다.
신성제국의 명분은 황제로부터 발생하고, 그 위세를 떨치기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했다.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끊임없이 반목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한조가 일리야스의 무릎베개를 해주느라 다리에 쥐가 나고 있을 무렵, 모라시니··· 즉, 모라시니 가문의 수장이자 건국공신 공작가의 수장인 모라시니 큰 어르신은 초조한 얼굴로 서재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은 두 여인이 서 있었고 좌측의 책이 켜켜이 쌓여있는 곳에는 짙은 색의 콧수염을 짧게 기른 기사가 앉아 있었다.
“큰일이다.”
모라시니는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전하의 상태가 호전되는 것이 너무도 느리다.”
“아직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런 듯 합니다.”
한 여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좀 더 시간을 갖고 정성을 다해 간호하다 보면······.”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아요, 미로아.”
콧수염의 기사가 말했다.
“교후(敎侯)가 돌아온다는 서신이 비밀리에 전달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돌아오려면 한 달은 더 있어야 하지 않나.”
“곧 있을 대관식을 위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한다고 합니다.”
“대관식? 그것은 전하가 회복할 때까지 미루기로 했잖는가.”
“황실에는 알리지 않고 신전 대신관들끼리 밀어붙일 작정인가 봅니다. 국가의 무운과 안녕을 비는 큰 제식의 날에······.”
“하!”
모라시니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가 없는 듯한 실소였지만 눈동자는 새까맣게 불타고 있었다.
“일리야스님이 돌아가시면 적당한 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어. 누가 있어 그분의 자리를 대신한단 말인가.”
“그것이.”
남자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입에 담기 민망하나···혀가 잘리고 눈이 뽑힌 종년들이 어둔 밤을 틈타 신전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말에 모라시니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잠시 옆으로 휘청하여 쓰러질듯 하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어떻게.”
그는 너무도 기가 막힌 나머지 말도 제대로 잊지 못했다. 한 여인이 다가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모라시니는 쭈글쭈글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신음했다.
“어떻게 그런 망측한······.”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대관식 날짜에는 맞지 않아요.”
다른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대체 누가 대관식 날에 나온다는 거죠?”
“섭정승(攝政丞)입니다.”
남자는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교후가 황실의 정통한 후계자를 찾을 때까지 섭정을 하겠다고 나셨습니다.”
모라시니는 의자에 천천히 내려앉으며 팔걸이 부분을 꽈득, 움켜잡았다. 얼굴에 시퍼런 분노가 펄펄하다.
“그가 무슨 자격으로 대관식을 치른다 하더냐?”
“신황의 힘을 업고···그를 양부로 하여······.”
사무엘 네놈이······. 그는 분노로 인해 벌벌 떨리는 손을 다 잡으며 중얼거렸다. 기어코 나라를 집어삼키려 드는구나.
천하의 둘도 없을 역적이여. 무덤에 풀도 안날 더러운 것이여. 절대로 너희 뜻대로 되게 하지는 않는다.
다행인 것은, 아직 이 나라가 신에게 버림받지는 않았다는 거다. 네놈이 제 성질에 못 이겨 시커먼 야욕을 빨리도 펼쳤구나. 그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차가운 흥분과 분노가 그들 다섯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그들은 딱딱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일리야스님을···여기 데려온 적은 있습니까?”
한참 후에 남자가 물었다. 모라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가 휩쓸고 간 얼굴에는 침통함만이 남았다.
“데리고 왔었다. 하지만 일리야스님은 기억해내지 못했다. 지금 그분께 남은 것은 기본적인 욕구와 충동, 언어능력과 빈약한 지능이다.”
“여기 있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제대로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단 한 번의 피로 그 분은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셨어요.”
여인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더 많은 피를 먹이면 어떨까요?”
“더 많은 피?”
모라시니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잔인한 희생과 천신만고 끝에 데려온 약이다. 아무리 몸에 좋은 약이라도 급히 들이켰다가는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른다. 곁에 두고 천천히 관찰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힘들 모양이었다.
“너는 가서 은밀하게 사람 셋을 구해오너라.”
모라시니는 그들이 구해야 할 사람들에 대해 지시했다.
“어디에 쓰시려고요?”
“그것은 차차 두고 보면 안다.”
대관식까지는 겨우 두 달 남짓. 그 전에 일리야스를 제대로 고쳐놓아야만 했다.


* * *


그란사나 황궁의 반대편, 수천평야의 땅을 소유하는 수도의 두 번째 신성황궁에는 교후(敎侯)가 살고 있다. 세계의 3분의 1을 장악하는 그들의 종교는 인간이 그어놓은 국가의 벽과 신분의 벽을 초월한 정신적인 제국이었다.
황궁과 똑같은 설계로 만들어졌지만 짙은 흑 빛 때문에 좀 더 단순하게 느껴지는 신전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수천 개의 방과 방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미로 같은 내부에는 화려한 장식품을 달아 보수적은 느낌을 완화하였는데 그 장식품들에 쓰인 보석은 전부 홍옥과 마노, 바다처럼 맑은 청낭간(靑琅?)과  신비한 야광 병과 산호와 호박 등이었다.
한마디로, 엄숙한 외관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 내부는 황궁도 울고 갈 만큼 화려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벽과 색 기둥에는 화려한 모자이크와 성화의 장면을 그려 넣었고, 위대한 신의 종을 살아생전 모습 그대로 재현해놓은 순금의 동상에는 그들이 사용했던 교후의 관도 그대로 씌워 놓았다.
그란사나 제국의 왕이 그 아름다움으로 미왕의 호칭을 얻었다면, 교후 사무엘은 성결한 외모와 천진한 아름다움으로 추앙받았다. 세상에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자는 많지만, 교후의 것은 첫 미명의 한숨처럼 살랑거리는 플래티나 블론드였다.
천진한 녹색 눈동자, 온화한 미소와 자애로운 두 팔. 모든 이들이 그가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교후가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교후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다른 열 두 명의 대신관들이 스스로 물러나며 사무엘의 인품에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교후 사무엘. 그는 이 세상에 베풀기 위해 태어난 자요, 신의 선함을 세상에 전하기 위한 위명을 갖고 태어난 자였다.
월요일 아침, 황궁에서는 귀족들이 회의를 하는 동안 신전의 회랑에서도 교후와 대신관들의 회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늘 하는 회의지만 오늘만큼은 그 열의와 긴장감이 남달랐다. 새로 교후가 되어 각 나라를 다니며 인사를 다닌 교후가 돌아와서 여는 첫 정식 회의였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주제역시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그들의 종교를 교역(敎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늘 논의하고 토론을 해도 늘 끊이지 않는 분쟁을 주는 주제였다.
때는 종교 교역의 시대. 그란사나의 영토가 확장되고 사방 국가의 통치권을 확립하고 문화의 중심이 되면서부터 그란사나의 전통 종교역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영토 전쟁이 끝난 후에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군대도 아니오 지배자도 아닌 신관들이었다. 그들은 의약품을 옆에 끼고 와서는 다치고 신음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황제의 군대가 짓밟고 간 뒤로는 신의 손길이 스며들어와 그들을 보호해주었다. 신성한 검은 색 후드를 두르고 그들이 나타나 선을 행했다.
그것이 전 대륙으로 뻗어나간 그란사나교의 시작이었다.
종교는 대단하다. 그것은 사람에게 목숨을 걸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정신은 육체를 지배한다. 그 정신을 지배하는 그란사나 신성황제의 위상은 나날이 드높아졌다.
북과 동과 서쪽으로는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이미 그란사나교를 국교로 지정한 나라도 있었지만 미개한 남방인들에게는 신의 숙업을 이해시킬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비가 잘 내리면 하늘이 복을 주는 것이고, 비가 안 내리면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것들에게 희생과 교통, 사랑과 정의를 가르치는 일은 너무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교역 활동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외교 대신관의 제1 비서가 발언권을 얻었다. 그는 초췌한 얼굴과 새까맣게 그을린 낯빛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오랫동안 농사를 지은 것도 같고, 또 어떻게 보면 배를 곯아 얼굴이 검어진 것도 같았다.
“해국을 건너 내려가는 남쪽에는 풍토병이 있는데 우리 신관들은 면역이 없어서 걸렸다 하면 픽픽 쓰러지기 일쑤입니다. 음식역시 먹는 족족 배탈이 나니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가져간 씨앗을 직접 재배하여 농사지어 먹습니다만 수확하는 것보다 먹는 것이 더 빠른 실정입니다.”
‘둘 다 맞군.’
교후는 입가에 차를 대며 생각했다.
“원주민들과 계속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의 종교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섞여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신관들은 너무도 고생하고 있습니다. 몸은 몸대로 망가지고 아무 성과가 없습니다.”
“그런 실정이라면 당신들에게 배분한 교역수금을 줄일 필요가 있겠군요.”
다른 대신관이 말을 받았다.
“뭐요?”
논 갈고 밭 가느라 꾀죄죄해진 신관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른다.
“가장 고생하고 있는 우리의 돈을 줄이겠다고요?”
“직접 씨를 뿌려 농사를 지어 식사를 하신다면서요. 그럼 신당교구들의 밥값은 안 들지 않습니까.”
“대신 병이 잦아 약값이 나갑니다.”
“어차피 풍토병엔 답이 없습니다. 몸이 익숙해 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요.”
신관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는 이제 완전히 투쟁 상태로 접어들었다. 아직 젊고 경험이 없는 신관이다 보니 생각하기 전에 말이 먼저 나가는 타입인 모양이다.
호사스럽게 꾸며진 방에 아름다운 남자들이 가득 들어차서는 서로를 독기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교후는 마치 방관하는 듯한 자세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자들이 왜 이러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새로 교후가 된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상대를 깎아내리려는 것이다. 생김새만은 하늘에서 떨어진 양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들이나 치고 박고 이죽대며 싸울 때는 시정잡배와 다름없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본격적으로 설전을 시작하는 두 사람 사이로 교후가 슥 손을 들어 올려 좌우를 갈랐다. 모두의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된다.
“남방에 교역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이 방에 있는 자중 가장 고귀한 자, 아름다운 자. 성화에서 방금이라도 빠져나온 듯 아름다운 교후가 온화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예산을 늘려드리겠습니다. 직접 농사를 지을 필요 없습니다. 땅을 빌리세요. 그리고 전소작인을 구하세요. 그리고 그들에게 씨를 뿌리고 밭을 갈게 하세요. 나는 농사꾼을 만들려고 당신들을 거기 보낸 것이 아닙니다.”
“교후.”
신관의 얼굴이 번쩍번쩍 빛이 났다. 교후는 그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었다.
“남방 교역에 힘써주세요. 사람이 필요하면 서신을 부치세요. 내 아낌없이 지원하리니.”
교후의 지원을 두둑이 약속받은 신관이 자리를 뜨고, 다른 시안들도 처리가 되자 방에는 교후와 외교 대신관을 제외한 열 한 대신관이 모였다.
훈훈하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려지니 방 안에는 냉기가 가득하다. 교후의 표정은 아까 와 같이 온후하나 눈동자는 차갑고 미소 짓는 입가에는 그늘이 진다. 그들은 이제 쓸데없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중요 시안으로 들어갔다.
“약을 놓쳤다고 들었습니다.”
교후가 물었다.
“약은 어디로 갔습니까?”
한 대신관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신의 들녘과 마주하는 오래된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신의 들녘? 그가 살아나왔나요?”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쪽 기사들은 전부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교후는 곰곰이 생각하는 척을 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약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것이 살려내는 왕이 문제인 겁니다. 그는 어떻습니까?”
“여전합니다. 검은 탑에서 죽음의 잠에 잠들어있습니다. 병의 예상경로대로라면 대관식이 있을 무렵 하여 죽을 것입니다.”
교후는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더니 곧 결론을 내린다.
“불태웁시다.”
“불태우자고요?”
대신관들이 술렁거렸다. 교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불태우시오.”
“하지만 어찌···그분은 정통한 혈통을 잇는 마지막 황자십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돌아가셔도 우리에게는 아직 신황이 계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돌아가실 분입니다. 굳이 우리 손으로 돌아가시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나 만일의 경우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신의들녘에 나타난 것이 진짜 약이라면? 그것이 왕을 만난다면?”
그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
“나도 내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왕이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날뛴 결과입니다. 어차피 죽을 사람, 더 고통에 시달리기 전에 우리가 끝냅시다. 황실의 피는 보존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구요.”
“이 역시 신의 뜻입니다.”
누군가 교후의 말을 받았다. 교후의 마음에 들기 위한 아부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교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뜻이 신의 뜻이지 않겠습니까.”




그날 밤, 아름다운 황궁의 단 하나의 흠으로 불이던 검은 탑이 불길에 휩싸였다. 수백 년간 몇 번이나 파괴될 뻔 했으나 꿋꿋이 명맥을 유지하던 탑이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달려와 불을 끄려 노력했으나 화마의 기운이 어찌나 강한지 그것은 만 하루를 불타고서야 겨우 잠잠해졌다.
이윽고 그 속에서는 세 구의 새까맣게 탄 시신과 탑 제일 위쪽에 있어 피해가 약간 덜한 한 구의 시신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사람들이 시체의 얼굴을 물에 헹구고 탄 피부를 덜어내고 눈꺼풀을 들어보니 시체의 새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왕이!”
사람들은 이틀간 슬피 울며 장례 치를 준비를 하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자는 드문드문 있었으나 검은 눈동자를 가진 자는 극소수. 즉 그는 대관식도 치르기 전에 요절해버린 일리야스였던 것이다.
신전의 적극적인 도움아래 장례는 극진히 치러졌다. 이로써 수대에 걸쳐 황제를 배출한 모라시니 가문의 마지막 황위 계승자가 끊어졌다. 적통한 피가 흐르는 황실의 핏줄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교후의 주도 아래 열린 어전회의에서 다수의 귀족들이 교후의 편을 들었다. 거의 만장일치하다시피 교후의 섭정이 결정되었다.
교후 사무엘을 배출한 헤라쉬 가문의 기세는 대단히 등등해졌다. 교후의 자리와 황궁이 똑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고, 그 위에 선 자가 바로 사무엘이었다. 수백 년간 이어진 신전의 염원을 교후가 된지 3개월도 안 되어 해치운 사무엘이었다. 그란사나의 두 황제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었다.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게 되었다.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권력의 시작이었다.
왕의 장례차가 궁을 빠져나가 멀리 황제들이 묻힌 묘지로 향했다. 그 모습이 가히 쓸쓸하다. 황궁의 신성한 검은빛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경박한 금빛이 나풀나풀 내려와 덮는다. 적당한 황실 후계자를 찾을 때까지 그의 섭정은 계속될 것이다. 그 핏줄을 대체 언제 어떻게 찾는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교후님 역시 황실의 핏줄이긴 핏줄이지 않나요? 그런데 왜 다른 헤라쉬가문 사람들하고 왜 이렇게 틀리게 생기셨죠?”
“그것이···교후님은 사실 양자라는 소문이 있어요.”
“양자?”
장례식을 집도하는 교후를 바라보는 두 명의 수련신녀들이 속닥거렸다.
“저 음침한 헤라쉬 가문 사람들과 우리의 교후님이 같은 핏줄이라고 누가 믿겠어요? 게다가 저 밝은 금발을 보세요. 헤라쉬 가문의 사람이라면 응당 짙은 머리 빛과 눈빛을 타고 날 텐데 교후님 혼자만 저렇게 났잖아요.”
“과연.”
말을 받던 수련신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들린다. 다 들려.’
교후는 기도문을 읊으며 생각했다.




[ 3 ]




한조는 거칠게 떠밀렸다.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자빠질 뻔 했으나 다행히 재빨리 무릎을 꿇어 다치지 않았다.
“여기서 기다려라.”
묵직한 음성이 명령을 내리더니 이내 문 닫히는 소리가 쿵 났다. 눈을 떴다간 눈알을 뽑아버리겠다 협박했기 때문에 한조는 그들이 사라지고서도 한동안 안대를 벗을 생각을 못했다.
최소한 10분간은 그랬다.
천성이 낙천적이고 즉흥적인 한조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안대를 풀어버렸다. 저번에 갇혀있던 곳이 꾸질꾸질한 탑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어디 감옥이나 지하창고 같을 줄 알았는데 웬걸. 저번보다 훨씬 안락해 보이는 방이다.
차갑고 두터운 성의 돌 벽이 아니라 내부는 나무로 장식되어 있었고 벽면은 석회반죽으로 도장을 해놓은 데다가 아름다운 꽃그림까지 그려 놓았다. 벽난로의 앞에는 접의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벨벳으로 감싼 쿠션과 함께 자두, 포도, 딸기 따위가 예쁜 유리그릇 속에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유리구슬이 달린 샹들리에까지 걸려 있다. 몇 개의 책이 꽂혀 있는 책상에는 밀초(蜜-)가 밝게 타고 있었다. 음울한 램프 따위가 아니라 환한 촛불이었다. 촛불 하나의 위력은 약하나 수십 개가 활활 타니 낮처럼 밝다.
침대는 계단 네 개 정도의 단 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한조는 침대를 둘러싸고 있는 부드러운 자줏빛의 커튼과 천개(天蓋)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방은 안락하면서도 적당히 화려했다. 유일하게 아름답지 않은 것은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심통 난 귀부인의 초상화였지만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었다.
방의 원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눈썰미가 있는 사람임에 분명했다. 벽의 중앙 부분을 따라 난 몇 개의 기둥에는 성스러워 보이는 그림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바닥에는 푹신한 호랑이 가죽까지 깔려 있었다.
“와.”
한조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두텁고 긴 커튼이었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훽, 커튼을 열어젖힌 한조의 얼굴은 급격히 구겨졌다. 커다란 창문을 기대했으나 두꺼운 벽이 나타났다. 원래 창문이 있기는 있었는지 급히 발라 메운 흔적이 보였다.
“젠장.”
한조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이 나라인지 저승인지 도시당체 알 수 없는 곳으로 온지도 이제 꽤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그간 본 것이라고는 습하고 어두침침한 돌 벽뿐이다. 왜 여기에 온 건지, 저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날 언제 죽일 건지 등등. 묻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은 한없이 많은데 아무도 상대하주지 않으니 짜증이 난다.
이래저래 사람만 물건 취급. 멋대로 옮겼다가 몰아넣었다가 수틀리면 다시 옮겨놓고. 이게 대체 뭐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그나마 말을 걸어주는 것은 스스로를 미왕이라 칭한 미친놈뿐이니······. 한조는 스스로가 한심하여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바깥을 보고 싶다.’
그는 쓸쓸하게 벽을 쓸었다. 좋은 방도 더 이상 한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세상을 보고 싶어.’
단단한 벽을 아무리 쓸어봤자 바깥을 볼 수는 없었다.
갑자기 우울해진 한조는 바닥으로 주르르 몸을 미끄러트렸다. 부숭부숭한 호랑이 털 위로 엎어져서는 움쩍달싹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지금쯤 기말시험은 다 끝났을까?’
그는 호랑이 털을 세아리며 생각했다.
‘곧 방학일 텐데 애들 아르바이트 자리 구하려고 분주하겠네.’
지금까지는 생명의 위협을 계속해서 느껴왔는지라 두고 온 것들을 제대로 그리워하지도 못했다. 그러던 것이 한 번 봇물이 터지자 그리움에 목이 멨다. 
시골에 계시는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아빠 얼굴도 떠올랐다. 시집간 큰누나 얼굴부터 이제 초등학교 들어가는 막내 동생 얼굴까지 순차적으로 떠오른다. 형이 딱지 접어 줘야 하는데······. 피카추 모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섬뜩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한조는 저도 모르게 심장을 움켜쥐었다.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도 모르는데, 돌아갈 방법은 있을까?’
‘그 전에 저들에게 살해되어 잘게 썬 고기가 되면 어쩌지?’
‘날 왜 잡아두는 걸까. 대체 왜······.’
한조는 호랑이 머리가죽 부분을 꽉 움켜쥐었다. 낯빛이 순식간에 파리해졌다. 한조는 거칠어지는 숨결을 겨우 다 잡았다. 불길한 생각을 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만 상할 뿐.
후, 깊이 한숨을 내쉬자 조금씩 평정심을 찾을 수가 있었다. 한조는 훅훅 숨을 내쉬며 다시 생각을 골랐다.
‘죽일 거면 벌써 죽였겠지. 날 여기 두는 건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
천성이 낙천적인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어쩌면 나한테 볼일이 끝난 후엔 돌려보내 줄지도 몰라!’
갑자기 희망이 샘솟아 한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뺨이 상기되고 눈이 별처럼 빛이 났다.
불러온 것도 그들이니 돌려보내는 방법도 그들이 알 것이다. 지금은 그것들이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자. 그들이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저 시체 같은 것한테도 잘해주자. 그러면 언젠가 보내줄 것이다.
한조는 어서 일리야스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결심을 굳힌 얼굴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며 어서 그가 오기를 바랐다.
‘오기만 와봐라.’
두 눈이 별처럼 빛나다 못해 숫제 이글이글한다.
‘아주 그냥 있는 대로 잘해 줄 테니!’
이까지 부득부득 갈며 결심을 굳힌다. 표정만 봐서는 오기만 하면 요절을 내버릴 듯하다.
그는 문을 똑바로 보는 자세 그대로 약 30분간 서 있었다.
슬슬 다리가 아파왔다.
“한조!”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시커먼 것이 불쑥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시퍼런 낯빛, 음흉한 얼굴, 주체 없이 허우적대는 팔다리. 그래 너 왔구나. 미친놈.
“일리야스님!”
한조가 어찌나 밝게 맞이하는지 뛰어 들어오던 자세 그대로 일리야스는 움찔 굳었다. 저런 모습의 한조는 처음이었다. 만날 밥 좀 먹고 다른 거 -일리야스는 한조가 계속 강조하는 다른 먹을거리가 뭔지 사실 궁금했다- 먹을 생각은 꿈에도 말라며 윽박지르기만 하던 한조이기 때문이었다.
“일리야스님! 어서 와요!”
“······이미 왔다.”
“자자, 여기 앉아요.”
한조는 고국의 습관 그대로 바닥을 탕탕 두드렸다. 일리야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조의 옆에 앉으며 생각했다. 멀쩡한 의자 놔두고 왜 바닥에 앉힐까.
한조는 콧김을 훅 뿜었다. 자못 기세가 등등하다. 당신이 원하면 뭐든지 하겠어요. 입과 손과 발이 되어 드리겠어요. 저를 먹지만 마세요. 제가 밥을 먹여드릴게요.
“그나저나 여긴 어딘가요?”
다정하게 손도 잡아주며 한조가 물었다. 앙상한 손가락이 휘감겨오는데 어찌나 딱딱하고 마디마디가 차가운지 마치 죽은 고기를 잡는듯 하다. 한조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으나 곧 미소를 되찾았다. 속이야 어떻건 간에 입가는 화사하게 웃고 있다. ‘짐승도 기르다보면 정이 든다는데······.’ 그는 생각했다. ‘내가 잘해주면 네가 설마 날 해치지는 않겠지’
“오늘도 안색이 안 좋네요.”
한조는 일리야스의 이마를 다정하게 훔쳐주었다. 일리야스는 갑작스레 매달려 오는 한조 때문에 적잖이 당황하여 어깨를 흠칫흠칫 거렸다. 순진하기는. 한조는 속으로 웃었다. 얼굴은 다 살은 것처럼 삭은 주제에 손 좀 만지고 얼굴 좀 쓰다듬었기로서니 깜짝 놀란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남자끼린데 뭐 어떻습니까. 설마···여자 손 모가지도 한 번 못 잡아보셨나요?”
여자 손 모가지도 한 번 못 잡아본 건 한조 자신이었다.
“그, 그렇지 않다.”
“그럼 잡아 보셨구요?”
“······.”
말이 없다. 한조는 쿡쿡 웃으며 일리야스의 거친 잿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2대 8로 말끔하게 정리하여 귀에다 슥슥 꽂아놓자 아주 인물이 난다. 한조는 자신의 실력에 흡족하여 미소를 진하게 지었다.
“이제 보기에 좋네요.”
“보기에···좋은가?”
“네, 아 거기······. 네, 이제 예쁘게 됐습니다.”
두피에 착 달라붙도록 깨끗하게 갈라놓은 가르마 위로 돼지털 한 가닥이 꼬불꼬불 솟아있다. 한조는 손바닥에 퉤 침을 뱉어 그것을 슥슥 넘겼다. 됐다. 이제 멀끔하다.
“예쁜가.”
한조의 칭찬에 일리야스는 흐뭇하게 웃었다. 예쁘다니까 좋댄다.
분위기가 좋아진 김에 한조는 칭찬을 아끼지 않기로 결심했다. 잘 보여야 한다. 이놈한테 잘 보여야만 살 길이 생기는 것이다.
“아무렴요. 여자들이 다 홀딱 반하겠습니다.”
“여자들이 반하건 말건 상관없다.”
“상관이 없긴 왜 상관이 없어요!”
한조는 목청을 높였다. 저도 모르게 파리넬리톤으로 처 올라간다.
“예쁜건 중요해요, 일리야스님. 안 그러면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고요. 사람들은 예쁜 사람을 좋아해요. 그러니까 머리도 제가 이렇게 예쁘게 해드린거잖아요.”
“그렇군.”
일리야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한조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나는 예쁜가?”
“네?”
“나를 보고 예쁘다고 했잖나. 나는 네 눈에 보기에 예쁜가?”
“그, 그것은······.”
한조의 등 뒤로 식은땀이 쭉 미끄러졌다. 나는 예쁜가? 예쁜가? 예쁜······. 일리야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한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장수 만만세! 그는 오래살고 싶었다.
“무, 물론입니다.”
“그렇군. 그렇구나.”
일리야스가 잇몸이 드러나도록 밝게 웃었다. 그가 웃으니 저도 모르게 정신이 아찔해진다. 짐승처럼 불거져 나온 저 잇몸 좀 보소······. 한조는 이마에 손을 대고 ‘아!’ 가냘픈 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한조야. 나는 네가 다가오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예쁘냐?”
정신이 살포시 가출하려는 한조에게 일리야스가 기어코 마지막 공격을 가한다. 이런 인정사정없는 놈! 한조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물론···물론입니다. 어여쁘십니다. 사랑스러우십니다.”
“사랑!”
그 말에 갑자기 일리야스가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는 차마 눈 뜨고 못 볼 표정을 지었다. 길게 찢어진 입술이 귀밑에 가서 걸린다. 엄마···엄마 나 쟤 무서워······. 한조는 쓰러지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절 저었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이 순간을 견디면 벽에 똥칠할 수 있는 것을······. 한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태연자약한 얼굴로 긴 의자에 놓여있는 잘 익은 자두 한 알을 잡고 껍질을 깠다.
몇 번이나 계속된 습관으로 인해, 일리야스는 저 먹여 주는 줄 알고 한조의 무릎에 누워 입을 벌렸다. 엄마 새를 기다리는 새끼 새 같다.
하지만 한조는 손가락으로 일리야스의 입술을 꾹 다물린다. 그리고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먹지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
손에 힘을 주자 자두가 부드럽게 으깨어진다. 그 짓뭉개진 것을 일리야스의 뺨에 치덕치덕 바르는 한조였다.
“왜···이러는 거냐?”
찝찝한 느낌에 일리야스는 인상을 썼다.
“이렇게 하면 피부에 좋아요.”
한조는 자두를 둥글리며 온 얼굴에 처발랐다.
“피부가 좋아지면 얼굴도 예뻐져요.”
기분이 안 좋은지 인상을 쓰던 일리야스가 대번에 얌전해진다.
짜식, 예뻐진단 말에 아주 사족을 못 쓰는구나. 저런 면상을 한 주제에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있는 모양이다.
낙천적이고 정이 많은 한조의 단점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건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여 결론을 도출한다는 점이었다. 설상가상 일리야스의 창백한 뺨에 붉은 기가 약하게 돌자 그는 제대로 감 잡았다고 생각하여 의기양양해졌다.
‘불쌍한 놈. 내가 네 연애를 도와주리라.’
그 방에 둘 밖에 없는 것이 참말로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봤더라면 아주 꼴값을 떨고 있노라 했을 것이다.



12~14편
일리야스와 한조는 탑에 살던 때와 같이 매일 만났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에는 한조가 그를 만나러 갔는데 이제는 그가 한조를 만나러 온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한조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두 여인의 시중을 받아가며 목욕을 해야 했고 늘 새 옷을 입어야만 했다. 고국에 있을 때는 하루에 두 번 세수하고 여름에는 이틀에 한 번, 겨울에는 일주일에 한 번 샤워하는 것으로 몸을 깨끗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제는 매일 목욕하지 않으면 찌뿌듯할 정도가 되었다.
이상을 느낀 것은 어느 날 여인의 몸에서 비릿한 냄새를 맡았을 때였다. 한조는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이상했다. 이런 냄새가 날 리가 없는데······. 하지만 목욕을 마칠 때쯤 되자 그 냄새는 점점 강해져서 더 이상 모른 척 하기가 힘들었다.
“저기요.”
한조는 여인의 소매를 잡고 맑은 눈동자로 올려다보았다. 물속에서 고추를 잠수함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게 내버려둔 채로 여자한테 말을 걸게 되다니··· 대단한 발전이었다, 한조.
“당신도 목욕을 하지 그래요. 좀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여인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대화에 아무런 가감이 없는 것이 한조의 장점이자 단점이라······. 스무 번째 짝사랑, 옆동네 살던 수미한테 ‘너 몸에서 냄새나’ 했다가 철썩 뺨 맞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거늘. 한조는 또 생각나는 대로 입을 놀렸다.
“나는 괜찮다.”
여인은 잡힌 소매를 끄집어 올리며 말했다.
“요즘 몸이 안 좋다. 그러니 목욕할 수 없다.”
이번에는 한조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몸이 안 좋은데···왜 목욕을 못 해?
“감기에요?”
“아니다. 별로 대단치 않은 몸살일 뿐이다.”
“그런데 왜 목욕을 못해요?”
그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한조를 깜짝 놀라게 했다.
“왜냐니? 당연한 것이 아니냐? 열과 물은 피부에 균열을 낸다. 이 좁쌀같이 피부에 돋아난 구멍을 통해 물이 들어오면 어쩌자는 것이냐.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은데 너는 나를 죽이고 싶은 거냐?”
한조는 골이 띵하였다.
“잠깐만···지금 뭐라고요?”
“이것을 보아라.”
여인이 불쑥 얼굴을 코앞까지 내밀었다. 으악 징그러! 한조는 저도 모르게 움찔 놀랐다. 옆에서 봤을 때는 그냥 하얀 피부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인체의 신비다. 저 많은 모공은 뭐지? 여자피부가 아니라 거칠거칠한 남자 피부 같다. 그것도 씻지 않아 곳곳에 때가 끼어 아주 더러운!
“허벌 멍쳤는게······.” 
한조는 저도 모르게 물을 두 손 가득 떠서 여인의 얼굴에 끼얹었다. 말했듯이, 그는 생각이전에 손과 발과 혓바닥이 먼저 나가는 남자다.
“무슨 짓! 꺄악!”
처음으로 여인이 여자다운 목소리를 냈다. 그만큼 물이 무섭다는 뜻일까. 한조는 자기야 말로 비명을 지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봐요. 물은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오히려 깨끗하게 몸을 씻어주니까 건강해지고 나도 지금 이렇게 건강······.”
거기까지 말한 한조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불신에 가득한 눈동자로 여인을 지긋하게 노려보자 그녀가 처음으로 시선을 회피한다. 점점 예감이 현실이 되어간다.
“······물이 건강을 해친다고 생각하는데······.”
한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 왜 이렇게 자주 목욕을 시키죠?”
“그야.”
여인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너는 전하가 드실 거니까 깨끗하게 씻겨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한조의 미간이 더더욱 찌푸려졌다.
“물이라는게 이렇게 위험한데··· 얼굴에 때가 덕지덕지 끼어도 씻을 생각을 안 하고, 물에 맞으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위험한 것인데··· 그런 위험한 목욕을 나한테 매일 시킨다는 것은······.”
점점 분노의 오오라가 더해진다. 한조는 결국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님아들 너무하잖아!”
“미안하다. 이것은 나도 정말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다.”
그렇게 말한 여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부드러운 천으로 한조의 등을 벅벅 문지르기 시작했다.
“넌 깨끗해야 해! 전하가 드셔야 하니까!”
“싫어어어어!”
밖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모라시니는 쯧쯧 혀를 찼다. 
드디어 약이 목욕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우리의 몸은 너무도 허술하여 피부의 수많은 구멍을 통해 온갖 무서운 것들이 들어오게 되어 있다. 뜨거운 물에 닿으면 그 구멍이 완전히 열리게 되어 고약한 것들이 우리 몸 안으로 바로 들어올 수 있게 된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런 것을 저렇게 매일 시켰으니······. 
오늘만큼은 한조의 분노를 모두 받아줄 수 있는 모라시니였다.

그날 저녁, 일리야스가 한조를 만나러 왔을 때, 한조는 입이 댓발은 나와 있는 상태였다. 요 근래 과잉친절을 베풀던 한조였기 때문에 일리야스는 그의 이런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왜 그러지, 한조?”
“······.”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으냐?”
“······일리야스님.”
묵묵하게 올려다보는 눈빛에 불신이 가득하다.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주십시오.”
“뭣 때문에 그러느냐.”
일리야스는 약간 불안해졌다. 한조는 그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었다.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의 잠 속에 빠져 있을 때, 사과 향처럼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그것을 쫓아 깨물자 향긋한 맛이 났다. 욕심대로 마음껏 들이마시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그곳에는 한조가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었다. 그만큼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나오자 일리야스는 불안했다. 까만 눈동자가 혼자서 갈팡질팡했다.
“당신······.”
한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물었다.
“목욕···언제 했습니까?”
“목욕?”
대체 무슨 말을 할까 속으로 벌벌 떨던 일리야스의 고개가 갸우뚱 꺾어졌다.
“그게 뭔가?”
“으아아악!”
한조는 비명을 질렀다. 역시다! 역시 짐작대로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전부 드러워 죽겠다! 한조는 자신의 몸이 다 근지러운 느낌이었다.
“이리 오십시오!”
그는 분기탱천하여 일어나더니 저벅저벅 일리야스에게로 다가와 섰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그의 상의자락을 꽉 잡는다.
가슴팍에 한조의 손길이 스치자 일리야스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얼굴이 짙붉어지고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를 모른다. 파랗던 피부가 은은한 도홧빛으로 물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조는 자기 할 일에 여념이 없었다. 길게 내려오는 상의 자락을 잡고 훽 위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일리야스가 웁웁 소리를 냈다. 아뿔사···한조의 키가 일리야스보다 작다보니 옷을 끌어올린다고 끌어올렸는데 중간에 걸린 것이다. 일리야스는 모가지에 옷자락이 걸려 끙끙거렸다.
“좀만 참아요!”
한조는 일리야스를 아래로 찍어 내리며 기세 좋게 옷자락을 팍팍 벗겨냈다. 쓸데없이 길기만 한 옷가지가 흩어지고 맨살이 드러난다. 그럴수록 일리야스의 피부는 벌겋게 달아오른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한조의 손을 꼭 잡는다. 그러더니 열렬한 목소리로 외친다.
“한조! 내, 내가 잘 할 테니!”
“잘하긴 뭘 잘해!”
그러나 한조는 이미 정신이 나갔다. 평소에 깨끗한 남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으나 이것은 정도가 심하다.
우리 만난 지 오래됐잖니. 근데 아직 한 번도 목욕을 안 했단 말이니. 이런 드러운 놈······.
“으헛!”
마지막 남아있는 속옷까지 벗겨낸 한조는 일리야스를 질질 끌고 욕조로 데려갔다. 한조의 방에는 커다란 나무통으로 만들어진 욕조도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그들의 정체를 알고 나니 큰 분노가 치솟는다. 저렇게 위험한걸 내 방에 두다니! 한조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일리야스님!”
팩 돌아간 눈으로 노려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움찔 놀란다. 얼굴이 잘 익은 홍시 같다. 한조는 여전히 비딱한 어조로 말했다.
“이게 목욕이라는 겁니다. 자 여기 들어가세요.”
“그, 그래.”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순순히 나무통 안으로 들어간다. 한조는 여전히 세모눈을 한 채로 일리야스의 등을 북북 밀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일리야스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더니 곧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목욕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아 좋구나. 그렇다. 거기다. 그래 거기. 옳지 좋구나.”
좀만 더했다간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긋지 아니는가 웅장하게 시조도 뽑겠다.
“좋지요? 정말 좋지요?”
고생을 하면서도 보람에 찬 한조다. 뜨거운 수증기에 닿은 이마에서는 땀이 죽죽 비꾸러진다. 그것을 아무렇게나 훔쳐내며 그는 헤헤 웃었다. 이 시체 같은 것을 깨끗하게 닦고 있으려니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가 생각나···가 아니라 그냥 기분이 좋다.
“어 그런데.”
한참 등을 닦아내려가던 한조가 일리야스의 등판에 손을 대며 물었다.
“이건 뭐에요? 흉턴가?”
천천히 등을 만지자 일리야스가 간지러운지 작게 웃었다.
“왜 그러지? 내 몸을 만지고 싶으면 그냥 만지고 싶다고 해라.”
아니 그건 아니고······. 한조의 손이 주르르 미끄러졌다. 저 대책 없는 왕자병은 어디서 기인한 걸까?
“흉터가 있어요. 하나 둘···좀 많은데요?”
“뭐? 그러느냐?”
“어디서 다치셨어요?”
“글쎄···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 저쪽에서 뭔가가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거기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접시에 먹거리를 들고 들어오다가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그리고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충격이 컸음이다.
“저······.”
어찌나 놀랐는지 그대로 기절이라도 할 기세다. 한조는 침묵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귀를 찢는듯한 비명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굉장한 기세다. 한조는 귀를 틀어막았다.
비명소리에 사방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다른 한 여인과 탑에서부터 봤던 두 명의 힘센 남자들, 모라시니 노인과 처음 보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 그 중에는 예쁜 여자애도 있어서 한조는 눈이 반짝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물어볼 새도 없이 모두가 일정한 톤과 일정한 박력으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몸도 성치 않은 분께 목욕이라니!”
“너는 자객이냐?”
“약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죽인다!”
한 목소리로 외쳐대더니 또 한 동작으로 다가온다. 한조는 깜짝 놀라 뒤로 펄쩍 물러났다. 여기 온 뒤로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만 지금처럼 강하게 와 닿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분노하고 있었다. 정말로 한조가 일리야스에게 위협을 가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위협을 가하는 건 너흰데!’
한조는 억울했다.
“그만해라.”
한조를 위험에서 구해준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일리야스는 스스로 몸에 물을 끼얹으며 느긋한 목소리로 일렀다.
“목욕은 내가 원해서 한 것이니 그를 나무라지 마라.”
“하, 하지만 전하!”
모라시니가 창백한 얼굴로 다가왔다. 노인네···풍 왔나? 손까지 떤다.
“목욕은 위험한 짓입니다. 피부의 구멍을 통해 물이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건장하실 때라면 몰라도 지금 같은 때에 전하께 목욕을 시킬 수는 없습니다.”
“나는 건장하다.”
일리야스가 호통을 쳤다.
“나는 충분히 목욕을 견뎌낼 수 있다.”
무려 ‘견뎌내는’ 거냐. 듣고 있던 한조의 골이 다시 한 번 띵 하였다. 우리 동네 때밀이 아줌마들은 그럼 투사겠군 그래.
“전하의 몸은 정상이 아니십니다. 그 증거로 전하는 아주 간단한 것들도 기억하지 못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병환중이십니다. 부디 몸을 추스르십시오.”
“어허!”
간단한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대목에서 일리야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그는 촤르르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서서는 대뜸 성질을 부렸다.
“그만하라지 않느냐! 나는 건장하다! 충분히 건장하니 걱정하지 말아라!”
“저, 전하.”
그때 모두의 시선이 한 점으로 이동하였다. 그들의 얼굴이 미묘해지더니 곧 기쁨으로 변하였다.
“전하 정말로 건장하신······.”
“그렇군요. 전하, 벌써 그것도 가능할 정도로 건장해지신······.”
“건장해 지셔서 다행······.”
모두가 말끝을 흐리더니 수군수군하며 뒤로 물러난다. 그 모습을 한조는 ‘어라?’ 하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쟤네들 갑자기 왜 저래?
뒷걸음질로 뒤로 물러난 그들이 얌전하게 문을 닫았다. 잠시 밖에서 와글와글 하는가 싶더니 곧 사방이 조용해졌다. 일리야스도 다시 욕조로 들어갔다. 허리를 넘어서게 긴 머리채가 물 위에 둥둥 떠다니며 불길하리만치 흰 육체를 감싼다.
“당신······.”
한조는 일리야스를 쳐다보았다.
“뭘 보여준 거에요?”
일리야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응? 뭘 보여준 거냐구요, 응?”
어미 닭처럼 호들갑스럽던 그들이 대체 뭘 봤기에 저리 물러난 걸까··· 너무도 궁금한 한조였지만 일리야스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흥, 관둬요. 나도 다음에 보면 되지 뭐. 치사하게 나만 안 보여주다니.”
결국 한조가 삐져서 볼멘소리를 내자 일리야스는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다음엔···너만 보여주겠다.”
“알았어요. 다음엔 꼭 보여줘야 해요?”
드디어 약속을 받은 한조는 새끼손가락까지 걸고서야 기분이 풀어졌다.


* * *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내면까지 완벽하다 칭송했다. 빛을 받으면 짙은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흑단 같은 머리채와 총기로 가득한 검은 눈동자. 때때로 그 검은 눈동자에는 죽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돌았지만 그마저도 왕의 풍모라 칭송받았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니 스승도 혀를 내둘렀다. 신학에도 조예가 깊은지라 신전에서는 출가시킬 계획이 없느냐 조심스레 물어왔다.
건강한 몸은 열두 살을 넘기면서부터 빠르게 성장하더니 열네 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벌써 앳된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늘기만 하던 팔다리가 길쭉하게 빠지며 근육이 붙기 시작하자 나이 든 귀부인들도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었다.
아몬드 형으로 휘어진 눈매는 깊고 그윽했으며 그 아래 우뚝하게 솟아난 콧대는 자못 늠름하다.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간 인중아래 입술은 보기 좋은 과실처럼 여물어 도톰하게 돋아나니 남자고 여자고 거기에 닿고 싶어 사족을 못 썼다.
검술 또한 뛰어난지라 기사의 직위를 얻자마자 저 멀리 남방 이민족들의 토벌에 나선 적이 있다. 어리고 경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작전을 수행하고 돌아왔다.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기품이 넘치고 디딛는 발걸음 걸음마다 수려하다. 미왕. 그 호칭을 그는 이미 소년시절에 얻었다. 모두가 그의 이야기를 했고 그를 보고 싶어 했다. 궁중에서 그의 인기는 황제의 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고저가 없는 낙막한 목소리로 군주론을 읊을 때의 그는 또 어떠했는가. 새까만 눈동자에 깃든 지식에의 탐구는 짙은 욕망을 닮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소년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소년은 성과 사랑에 대해 지독하리만치 무관심하게 성장했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이 바로 지식의 열정이었다.
그는 지식에의 탐구를 사랑하는 자였다. 그것도 굉장히.

‘그랬는데.’
모라시니는 머리를 싸맸다.
‘그토록 총명하시던 분은 어디가고 이런 맹추가······.’
그는 눈알만 굴려 일리야스를 올려다보았다. 한 시간째 책을 붙잡고 씨름하나 일리야스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것도 가장 간단한 모음과 자음을 말이다.
“자 보십시오.”
바트레 종남작(Baronet 준남작. 남작과 기사의 사이)이 입가를 부들부들 떨면서 다시 한 번 되짚어준다.
“이것이 모음 ‘ㅏ’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ㅏ’다음은 무엇이겠습니까. ‘ㅑ’입니다. 아시겠어요? 작대기, 작대기 하나 차입니다.”
이래도 멍······.
“자자, 이것도 보세요 전하. 아까 설명 드렸죠? 한 백번쯤······. 그러니 이제 이해하실 때도 되었습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네? 그렇죠? 그런 거죠?”
이쯤 되면 숫제 애원수준이다.
“여기 이 오묘한 소리를 내는 ‘ㅗ’를 보십시오. 오···하고 발음이 납니다. 여기서 또 작대기 하나만 그으면 무엇이 됩니까. ‘ㅛ’ 입니다! 아시겠지요? 네? 네?”
저래도 멍······.
“그럼 보세요 전하. 아까 제가 'ㄱ''ㄴ''ㄷ' 가르쳐 드렸죠? ‘ㄱ’뒤에 ‘ㅏ’를 붙이면 뭐가 되겠습니까. 그렇죠! ‘가’가 됩니다! ‘가!’가!”
“가라.”
일리야스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바트레 종남작은 신이 나서 외쳤다.
“이제야 이해를! 맞습니다. 갑니다!”
“가라고.”
일리야스는 바트레 종남작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가라니까.”
그제야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바트레 종남작이 살풋 미간을 찡그렸다.
“네?”
“그만 돌아가라 했다. 나는 피곤하다.”
그 말에 종남작은 울상을 지었다.
“하, 하지만 전하.”
“뭐냐,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느냐.”
“‘가······’ 쓰실 수 있으세요?”
눈치를 살살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 공작에게 일리야스는 다시 멍 때리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쓸 수 있을 리가 없지···알면서 구차하게 왜 묻누?
옆에서 지켜보던 모라시니는 다시 머리를 싸맸다. 어디서 돌가루 날리는 소리가 났다.
“······그만하면 오늘은 되었네.”
모라시니의 허락에 일리야스는 입가를 쭉 찢었다. 신이 난 모양이었다. 
바트레 종남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이게 아닌데···아닌데 하면서 사라지는 뒷모습이 영 위태위태하다. 필기구와 책을 챙겨 밖으로 달려 나가려는 일리야스를 모라시니가 제어했다.
“전하.”
“왜 그러느냐?”
마구 달려가서 한조를 만나고 싶은데 모라시니가 붙잡으니 성질이 난다. 일리야스는 사나운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정말로 이해가 안 가십니까?”
“그렇다.”
일리야스는 당당하게 말했다. 좀 부끄러워해주면 좋으련만 하등의 수치도 없는 모양이다. 짐승을 붙잡고 이야기를 할까, 참으로 답답하다.
“약을 만나러 가고 싶으신 게지요?”
“그렇다.”
“약이 그리 좋습니까?”
“그것도 그렇다.”
“그럼···제가 약을 못 만나게 하면 기분이 나쁘시겠네요?”
그 말에 일리야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해진다. 모라시니는 말없이 그 시선을 마주하였다. 새까만 눈동자가 뜨겁게 뭉쳐지며 활활 끓어올랐다. 저것이다. 저 눈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잡아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도 모라시니는 기분이 좋았다. 저 멍충한 것의 속에, 아직도 그들의 왕이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잘 들어라, 모라시니.”
일리야스는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듯이 말했다.
“나를 방해하면 나는 너를 죽여 버리겠다. 네 양 다리를 묶어놓고 도끼로 두 토막 내 찢어죽이리라. 거대한 수레바퀴에 매달아 거열형(車裂刑) 처하리라. 뼈까지 분쇄하여 가루를 낼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주둥아리 놀리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놓고 스스로 물러나 허리를 조아린다. 모라시니의 공손한 태도에 일리야스는 다시 몸을 돌려 복도로 나아갔다. 들불처럼 날뛰던 불길이 어느 순간 즐겁고 유쾌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조가 머무는 방 앞에 서자 축 처지고 무거운 것으로 변하였다. 경비병이 문을 여는 동안 그는 눈매를 찡그리기도 하고 입가를 늘어뜨리기도 하며 표정을 굳히더니 힘없고 슬픈 얼굴로 안으로 들어선다.
“뭐야, 또 야단맞았어요?”
일리야스의 표정을 본 한조가 호들갑을 떨었다.
“또, 또 공부 못한다고 야단맞았어요?”
“그래, 한조.”
일리야스는 두 팔을 쫙 내밀었다.
“날 좀 위로해다오.”
한조는 혀를 차며 다가오더니 일리야스를 꼭 안아주었다. 불쌍한 새끼··· 생긴 것도 이런 놈이 어쩌자고 머리까지 나빠 가지고서는······. 그는 진심으로 일리야스를 동정했다.
“어쩌자고 그래요. 진짜 모르겠어요? 으이그···이리와요. 내가 가르쳐줄게.”
“그러는 너는 글을 아나, 한조?”
“······아니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데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이냐.”
“······우리나라 글은 가르쳐줄 수 있는데.”
한자도 월화수목금토일 포함 50개는 쓸 수 있고. 읽는 건 좀 더 읽고. 이만하면 고급인재.
“그 말은 어디다 쓸 수 있고?”
“······하등 없죠.”
“그럼 그냥 내 머리나 저번처럼 빗겨다오. 속상한 말은 하지 말아라. 지금은 그저 네 품에서 쉬고 싶구나.”
바트레 종남작이 들었다면 니가 뭘 했다고 피곤하냐! 외칠만한 대목이었다.
“자, 그럼 또 제가 예쁘게 해드릴까요?”
“좋지.”
한조는 헤벌쭉 웃으며 일리야스의 머리를 예쁜 2대 8가르마로 탔다. 그러자 또 꼬실꼬실한 돼지털 한 가닥이 쏙 삐져나왔다. 침으로 슥슥 넘기려던 한조는 손톱으로 콕 집어 뽑아버렸다. 일리야스는 따끔한 아픔에 어깨를 움츠렸으나 가타부타 말 하지는 않았다. 조그만 아픔에 칭얼대는 남자로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당당하고 담대한 남자로 보이고 싶었다.

“어떻습니까.”
여인이 모라시니의 뒤에 서며 말했다.
“저대로 두어도 되겠습니까?”
“안되겠구나.”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에 과일을 치덕치덕 바르는 모습을 보며 모라시니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저대론 안 되겠어.”
너를 죽이겠노라 위협할 때 일리야스의 내면에서 잠자던 왕의 기질을 보았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한조와 노닥거리는 모습도 보았다. 그것은 기분 나쁜 예감이었다. 어쭙잖은 미소를 띠고 불쌍한 척 하는 사내의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결코 보지 못했던, 볼 수도 없었던 왕의 모습이었다.
그가 어떻게 황태자가 되었던가. 무수한 희생 끝에 얻은 자리가 아닌가. 일리야스라면 황궁을 위해 지옥에서라도 기어 올라올 위인이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충성을 바쳤고, 지금도 충성하고 있다. 허투루 일이 돌아갈 때에는 자신만이 아니라 모라시니 가문 전체가 위험해지는 것이다.
왕은 분명히 깨어나려 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매일 피를 빨아먹으라 분명히 일러두었거늘 그는 한조를 더 이상 아프게 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왕이 거부하는 이상 모라시니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일리야스는 다시 약해지고 있었다. 팽팽하던 피부에 그늘이 잡히고 안 그래도 마른 몸은 더더욱 말라간다. 눈 밑이 퀭해지고 정신이 산만하다. 약발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혹은 전하가 스스로 그것을 원하는지도 모르죠.’
일전에 만났던 남자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약과 함께 있고 싶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옭매고 있는 겁니다. 정상적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요.’
모라시니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눈빛이 야비하게 번들거렸다.
스스로 알을 깨지 못하고 있다면 이쪽에서 망치로 두들겨주는 수밖에. 그 속에 들어있는 어린 새의 날개가 망치에 으깨어진다 하더라도 하는 수 없지. 
시간이 지나면 뼈는 다시 붙을 것이고 어린 새는 큰 새가 되어 창공을 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날도 배터지게 먹고 배터지게 마신 두 사람은 호랑이 가죽위에 오붓하게 드러누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 들어 날씨가 쌀쌀해졌기 때문에 여인들이 화로에 불을 지펴주었다. 가죽에다 배를 깔고 서로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려니 솔솔 졸음이 쏟아졌다.
작게 하품하며 몸을 뒹굴 거리는데 왼쪽 뺨 위로 일리야스의 시선이 쏟아졌다. 하품하는 모습을 들켰나 싶어 멋쩍었다. 한조는 배시시 웃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리 그윽하게 내려다보니 괜히 부끄러웠다.
“한조야.”
“네.”
일리야스는 한조의 짧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때때로 두렵다.”
“뭐가요?”
“내가 두렵다.”
“당신이요?”
일리야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창백한 뺨 위로 짙은 음영이 진다.
“내 속에 있는 것이 두렵다.”
‘네 속에 있는 거라면···.’
한조는 생각했다.
‘그 드럽게 안 좋은 머리?’
“걱정 마세요, 일리야스님.”
한조는 일리야스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었다. 그래···너도 걱정이지? 나도 걱정이다. 너 인물도 이런 게 머리도 그래서 앞으로 뭐해먹고 살래? 기술이라도 닦아야 할 텐데 몸뚱이도 변변찮아 보이니 난 너만 보면 10급 공무원 카페를 알려주고 싶단다. 어쩌면 주지식 교육은 너한테 잘 맞을지도 몰라.
“당신 속에 든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라요. 제대로 모르니까 무서워하는 거에요. 똑바로 응시하면 정말로 별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럴까?”
“그럼요.”
한조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는 학습장애아를 위한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 이 세계도 있을까? 있다고 치자.
“그렇구나.”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으로 일리야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눈가가 촉촉한 것이 감동한 모양이다.
“으이그.”
한조는 쯧, 혀를 차고는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자 그 품으로 일리야스가 무리 없이 안겨든다. 자신보다 머리 두 개쯤 더 큰 남자지만 한조는 넉넉하게 안아주었다. 마치 어린 동생을 안는 듯 했다. 막내 동생 놈도 성적 개판으로 나오면 울면서 형 품으로 달려왔다.
‘형···엄마 알면 나 깨져. 성적표 나왔다고 말하지 마. 응?’ 물론 한조는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나 동생이 알지 못한 것은, 신세대이신 어머니가 담임선생님과 메신저 텄다는 사실이었다.
“착하다 착해. 아이 착해~. 우리 아기 울지 말고 뚝.”
부둥부둥 껴안고 등을 슥슥 쓸어주자 일리야스가 눈을 감고 고른 숨소리를 낸다. 이럴 때 보면 참 애 같은 사람이다. 좀 많이 크고 좀 기분 나쁘게 생긴 애기.
일리야스가 진정을 찾자 이번에는 한조가 울적해졌다. 오랜만에 동생을 떠올려서일까. 그는 갑자기 그리움에 콱 목이 메었다.
“왜 그러느냐.”
일리야스가 한조의 이상을 알아채고 말을 걸었다.
“어디가 불편 하느냐?”
“아니요, 아닙니다.”
하지만 한 번 터진 감정의 격류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한조는 그만 욱 하는 소리와 함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팔베개 했던 손을 슬그머니 거두며 한조는 등을 돌리고 누워 울었다. 고향에 가고 싶었다. 낮도 밤도 알 수 없는 곳에 갇혀 오늘이 대체 며칠 째인가. 그는 그만 집에 가고 싶었다. 안 씻는 서양인들에게 둘러싸여 살기는 싫었다.
“울지 마라. 한조야.”
일리야스는 한조의 등을 쓸어내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왜 그러느냐. 내가 무엇을 잘못 했느냐.”
“일리야스님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세요.”
잘한 것도 없지만 잘못한 것도 없다. 한조는 끅끅 울음을 삼켰다. 
“그냥 집에 가고 싶을 뿐이에요.”
“그런 말 하지 마라!”
갑자기 일리야스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한조는 울다가 놀라서 일리야스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눈물이 또르르 굴러 떨어져 일리야스의 손등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그것은 순식간에 일리야스에게 흡수되어버렸다. 일리야스는 한조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주며 목소리를 죽였다.
“그런 말마라 한조야.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나는 무섭다.”
“뭐가 무서우세요?”
“네가 떠날까 무섭다.”
“하지만 전 여기 사람이 아니에요.”
“안다.”
일리야스는 한조를 꼭 껴안았다. 차가운 몸이 정열적으로 부딪혀오니 한조는 숨이 막혔다.
“여기는 제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어요.”
“그것도 안다.”
일리야스는 한조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가 그대로 고개를 파묻어버렸다.
“안다. 안다. 하지만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는 거냐.”
“네?”
예상외의 말에 한조는 우는 것도 잊고 눈만 끔뻑거렸다.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하지만 여기에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요?”
그 말에 일리야스의 표정이 비수에 찔린 것처럼 새하얗게 되었다가 곧 본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물론 일리야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한조는 몰랐지만 말이다.
“내가···네 친구가 되어 주겠다.”
일리야스는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는 한조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가족이 되어주겠다. 연인이 되어주겠다. 나를 사랑해라. 그러면 될 것이 아니냐.”
마지막 건 좀·····. 이라고 생각하며 한조는 눈을 끔뻑였다. 이제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일리야스가 꽉 껴안아준 덕분이었다. 심각한 우울증으로 번질 수도 있었던 것이 일리야스 덕분에 1단계에서 멈출 수 있었다. 여기 온 후로 한조는 짧지만 광적인 우울증에 빠질 때가 있었던 것이다.
“고마워요.”
저도 모르게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이자 일리야스의 어깨가 강하게 경직된다. 한조는 그 어깨를 토닥토닥 해주었다.
“고마워요. 진짜로······.”
“나는 진심이다.”
“알아요, 알아.”
그래서 고맙다는 거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나를 위해 저렇게까지 해주다니 참으로 고맙다.
오자마자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 했다. 가장 자신을 무섭게 했던 그것이 언제 이렇게 다 커서 자신을 위로해주니 고맙고 또 뿌듯하다. 너무도 다정한 위로에 한조는 다시 눈물이 날 뻔 했다.
부드럽지만 완곡한 손길로 일리야스를 떼어내니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떨어진다. 하지만 두 팔만은 아직 한조의 목에 걸쳐진 채였다. 그것만은 풀기 싫다는 듯이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한조는 웃음이 났다. 아직 애다 애. 애 데리고 내가 무얼 하리.
한조가 웃자 일리야스는 골이 났다. 그는 자신이 정말로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지 한조를 잡고 아래로 내리눌렀다. 한조는 어어? 하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일리야스는 귀신같이 생긴 주제에 아이 같은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장난을 좋아하니 이번에도 장난일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아래에 깔려서도 웃고 있는 한조를 일리야스가 잡아먹을 듯이 주시했다. 하지만 이제는 옛날처럼 무섭지 않았기 때문에 한조는 또 계속 빙글빙글 이었다.
“난 진심이라고 했다.”
“저도 안다고 했어요.”
“그런데 왜 웃는 거냐.”
일리야스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내 말이···장난 같으냐?”
“아니 나는······.”
왠지 점점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한조는 웃는 낯빛으로 이제 장난은 그만하라는 시늉을 보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심사가 꼬인 일리야스는 그 몸짓에 눈이 돌아갔다. 아무리해도 한조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지 않으니 화가 났다. 저 웃는 입. 평소에는 저것이 웃으면 참 기분이 좋고 마음이 넉넉해졌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저것이 얄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에잇! 얄밉구나!”
그렇게 소리친 일리야스는 한조의 입술을 꽉 깨물어버렸다. 
“아얏!”
한조는 화들짝 놀라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입술을 물고 늘어지는 일리야스 때문에 도저히 뒤로 피할 수가 없었다. 절로 식은땀이 쫙 흘렀다. 잊고 있었던 공포가 파바박 뇌리를 스쳤다. 먹힌다. 잡아먹힌다. 그 생각을 하자 오금이 저리고 손발이 발발 떨렸다.
“이, 일리야스님.”
아랫입술이 붙잡힌 채인지라 한조는 어눌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이것 좀···놓아······.”
“싫다.”
일리야스는 얄밉고 또 얄미운 한조의 아랫입술을 질겅이며 대답했다. 안쪽살을 쪽, 빨자 한조가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너무도 얄미워서 입으로 깨문 것인데 막상 먹어보니 맛이 좋고 찰지다. 일리야스는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한조의 입술을 쏙쏙 빨아먹으며 말했다.
“내 말이 진심이라고 믿어줄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
“미, 믿어요. 믿으니까 제발 좀······.”
한조는 벌벌 떨리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것이 다시 일리야스를 자극했다. 또 웃는다. 또 웃어. 얄밉고 화가 나는구나. 이 입술에 더 혼을 내주어야겠다.
그는 입을 크게 벌려 텁, 한조의 입술을 전부 먹어버렸다. 아래에 깔린 한조가 끼앗, 희한한 비명을 지르더니 이제 온 몸을 벌벌 떨기 시작한다.
입술을 전부 삼키고 안으로 쪽쪽 빨아들이자 말캉말캉하고 기분 좋은 것이 혀끝에서 파르르 떨었다. 상대의 반응을 느끼자 왠지 기분이 너무 좋아지면서 스스로가 뿌듯하고 또 자랑스러워지는 일리야스였다.
‘어떠냐.’
일리야스는 속으로 웃었다.
‘나를 애 취급하더니 꼴 좋구나 한조. 자, 나의 뜻이 이처럼 확고함을 너도 이젠 알겠지?’
하지만 그때 한조는 일리야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헤아릴 정신이 없었다. 잡아먹힌다는 생각 때문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트라우마란 이처럼 강해서 스스로 다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부지불식간에 튀어 올라와 사람을 흔들어놓는다. 
한조는 이제 울고 있었다. 일리야스가 자신을 이렇게 막대하니 서럽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깨물린 입술이 아프고 난폭하게 다뤄지느라 쓸린 살갗이 아프다.
한조가 울자 당황한 것은 일리야스였다. 화가 나서 그랬을 뿐이지 울릴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당황하여 입술을 놓아주자 한조가 흑흑 울음소리까지 내며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왜 그러느냐 한조야. 누가 너를 때렸느냐?”
“때린 거나 마찬가지시지요.”
한조는 팩 토라진 목소리로 외치더니 얼굴을 가려버렸다.
“친구가 되어준다 하시더니, 왜 제게 이러십니까.”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네가 하도 장난처럼 굴기에······.”
“그래서 이러셨다고요.”
한조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치 꼴도 보기 싫다는 듯한 태도에 일리야스는 간장이 타들어갔다.
“됐습니다. 어차피 여기 사람들은 저를 인간취급도 안 하는걸요. 맨날 저를 보면 먹겠다는 말만 하고 누구하나 신경도 안 써줍니다. 일리야스님까지 그러신다 해도 전 하나도 안 서운합니다. 안 서운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서러워죽겠다는 태도다. 너까지 나한테 이러기야? 온 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15~17편
31회의 실연경험을 거치며 사람 원망하는 데는 도가 튼 한조와, 죽었다 깨어나느라 정신연령이 10세가량 밖에 되지 않는 일리야스의 싸움이다. 결국 일리야스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허둥지둥 한조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한조야. 한조야. 내가 잘못했다. 내가 다 잘못했다. 그러니 이러지 말아라. 응? 네가 우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구나.”
“흑흑.”
사람이란 아무도 관심을 안 가져주면 지 혼자 처울다 잡초처럼 일어나게 되어 있으나, 누가 옆에서 어화둥둥 위로해주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펑펑 울기 마련이다. 이제 한조는 숫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다리를 옆으로 한 채로 원망하는 말도 조불조불하기 시작했다.
“미워요. 일리야스님 미워요.”
그 말에 일리야스는 대경실색한다.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를 좋아해야 한다!”
“하지만 미운걸요.”
한조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드디어 일리야스를 올려다본다. 눈물로 촉촉한 얼굴을 보니 어째 일리야스는 더욱 기분이 야릇해지고 기운이 펄펄해졌다. 게다가 저 입술···. 평소보다 더욱 도톰해진 것은 필시 자신이 물고 빨고 하는 통에 저리 된 것이렷다.
일리야스는 자신이 그를 저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갑자기 자신이 뿌듯해졌다. 미안한 감정은 서서히 사라지고 어느새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한조를 내려다보는 자신이 있었다.
“뭐···뭐에요?”
한조는 일리야스가 갑자기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니 어색하여 볼이 불그스레해졌다.
“하, 한조야.”
일리야스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느새 일어나 앉아 슬슬 뒤로 물러서는 한조의 손을 화급히 잡았다. 그러자 한조가 깜짝 놀라 고개를 외로 돌려버렸다. 일리야스는 조급증이 더해졌다.
“한조야. 한조야. 내가 널 아끼는걸 알지?”
“알아요.”
한조는 그 말에 줄줄이 볼멘소리를 늘어놓으려 했다.
“알긴 아는데···읍!”
하지만 더 이상은 일리야스가 참지 못했다. 그는 한조의 허리를 움켜쥐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의 입술을 빼앗았다. 아까 했던 것처럼 입속에 와락 구겨 넣고 마구잡이로 빨아들였다. 과자를 빨아먹을 때나 스프를 빨아먹을 때와 똑같은 짓을 하는데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쿵쿵 요동을 치는지 알 길이 없다.
일리야스는 숨이 가빠져서 코로 훅훅 바람을 내뿜었다. 한조의 눈꺼풀이 눈앞에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코로 울컥 치미는 것이 있었다. 눈앞이 아찔해지고 머리가 멍하다. 요염하다. 어쩜 이리도 요염할까······.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이런 짓은 처음이기에 그들의 입 맞추기는 더럽게 서툴렀다. 그야말로 서로 입만 박치기 하고는 막대사탕 빨듯 쭉쭉 빨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좋아서 뿅 갈 지경이었다. 한조는 처음에는 저항하려 했으나 너무도 기분이 좋은지라 차마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아흐···’ 달뜬 신음이 입술사이로 흘러나갔다. 시체처럼 차가운 것이 속은 너무도 뜨겁다.
한참만에야 서로의 입술을 놓아준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회피해버렸다. 피부가 간질간질하고 열이 올라 울긋불긋하다. 
일리야스는 하늘만 보고, 한조는 땅만 보았다. 일리야스는 천장에 얼룩진 무늬를 헤아리고, 한조는 호랑이 가죽의 털 개수를 헤아린다.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헤아린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게 된다. 그러다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흠칫하여 다시 천장으로···땅으로 고개를 돌리는 두 사람이었다.
······좀 병신 같았다.

“다 네 탓이다.”
한참 후에야 일리야스가 툭 내뱉었다.
“네가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주지 않으니, 나도 그런 장난을···흠흠. 친 거 아니냐.”
“그럼 다 제 탓입니까?”
한조는 호랑이 털을 고르며 말했다. 어찌나 오래 골랐는지 털이 아주 매끄럽고 윤기가 잘잘 흐른다.
“전 믿는다고 했는데···일리야스님이 저를 격식 없이 대해주겠노라 했을 때 믿는다고 했는데······.”
“격식 없이?”
이 부분에서 일리야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격식 없다는 말은 안 했는데······.”
“하지만 친구로 삼아주신다면서요.”
한조가 빙글 돌아앉았다. 어느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조의 얼굴을 마주한 일리야스의 창백한 피부가 다시 벌그죽죽해진다. 비겁하다. 자기 혼자만 평정심을 찾다니. 일리야스는 아직도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했다.
“그, 그래도 친구 사이라도 격식이 없는 것은······.”
‘오호, 요것 봐라.’
한조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을 하였다.
“······그럼 일리야스님. 제 친구가 되어주신다고 하셨죠?”
일리야스는 죽어라 천장만 보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근데 어쩌죠? 우리나라에서는 친구가 되려면 일단 반말을 해야 하는데?”
“뭣이라?”
드디어 화들짝 시선을 마주친다. 당혹스런 표정이다. 한조는 베싯 웃었다.
“거봐요. 역시 못해줄거면서······.”
“아,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일리야스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부, 불러라. 불러! 누가 뭐라 했느냐? 불러라! 내 이름을 불러라!”
“후후후. 그럼~ 그럴까~ 일리야스?”
시킨다고 바로 냅둥 반말을 하니 일리야스의 표정이 확 굳는다. 얼씨구? 니가 부르라매? 한조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안되겠죠?”
“무, 무슨 소리냐. 방금은 내가 당황해서 그랬다. 하,하,하. 너한테 반말로 불리니 기분이 좋구나.”
······손에 힘들어간 거부터 좀 푸시지? 아프거든?
전혀 믿기지 않는 말을 하며 일리야스가 사납게 웃었다. 어떻게 하면 웃는다는 표정에 사납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리야스는 똑 그렇게 웃고 있었다. 길게 뻗어 나온 송곳니가 아주 사납다.
‘하여튼 이래서 오냐오냐하고 키운 것들은······.’
한조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너 그래서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어느새 방금 전의 손끝이 저릿하고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분위기는 확 지워지고 장난과 웃음이 넘치는 분위기로 돌아왔다. 한조는 다시 분위기가 바뀐 것에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서운했다. 기분이 이상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더욱 오버하며 일리야스를 놀려댔다.
“됐어요. 역시 일리야스님은 거짓말 한 거였어.”
“아니다. 아니라니까? 한조야아~.”
마치 토라진 애첩을 달래는 나이든 영감쟁이처럼 일리야스가 쩔쩔 메었다. 그 모습을 곁눈질 하며 한조는 속으로 웃었다. 자기 속에 이런 능구렁이가 들어있을 줄이야. 여자로 태어났다면 남자 여럿 홀렸음직한 솜씨로다.
남자로 태어났음에도 이미 한 남자를 홀리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한조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좋아요, 그럼 나한테 사과를 주세요.”
한참만에야 한조가 앵 토라진 척을 하며 입을 열었다. 
“사과?”
일리야스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한조에게 사과를 쥐어주었다. 한조는 그제야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미안할 때 사과를 준답니다.”
한조가 미소를 짓자 일리야스의 얼굴도 부드러워졌다. 그는 주섬주섬 몇 개의 사과를 더 들고와서 한조에게 안겨주었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남자가 말도 못하고 사과만 쥐어주는 모습에 한조는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알 수는 없지만 일리야스는 한조를 엄마처럼 따르고 있었다. 큰형이나 친한 친구한테 하는 행동이 아니라 전적으로 한조를 의지하고 한조말만 듣는 것이 진짜로 다섯 살짜리 아이를 돌보는 기분이었다.
일리야스는 한조의 방으로 들어오면 두 팔부터 벌려서 꼭 껴안겨 왔다. 그리고는 골이 난 목소리로 오늘도 선생이 자기를 돌 머리 취급했다고 투덜거렸다. 
물론 자기야 기분이 나빠서 투덜대는 말이겠지만 한조가 듣기에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 저주를 퍼붓는 악마의 목소리다. 저 시체 같은 낯짝이 킬킬킬 웃으며 남 흉 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게다가 비주얼은 왜 이렇게 저주와 잘 어울리는가. 남들이 그냥 하는 말인 ‘확 죽여버린다!’ 같은 말도 일리야스가 하면 포스가 남달랐다. 밤에 어둔 곳에 앉아서 킬킬대며 누구를 죽이니 살리니 하는 일리야스를 볼 때마다 한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때문에 한조는 일리야스에게 그런 말 하면 나쁜 사람이 된다고 몇 번이고 주의를 주었다.
“일리야스님은 나쁜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전 나쁜 사람이랑은 같이 있기도 싫어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훽 돌리면 뒤에 남은 일리야스는 안절부절 못해하며 한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했다. 
일리야스는 자기가 무척 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라 -한조는 그냥 덜 떨어진 애 취급했다- 대놓고 비위는 못 맞추고 어흠 어흠 헛기침을 해가며 자기는 그렇게 쪼잔한 사람이 아니라는 둥, 한조 네가 나를 너무 과소평가한다는 둥 하는 말만 잔뜩 늘어놓았는데 그것을 듣고 있다 보면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와 결국 용서해 줄 수밖에 없었다.
격한 포옹을 마치면 한조는 일리야스를 무릎에 누이고 과일이나 빵 따위를 잘게 쪼개어 먹여주었다. 이제 일리야스는 한조가 먹여주지 않으면 식사를 아예 안하려고 했다. 때문에 그는 이 방에 수시로 들락거리게 되었는데 그것을 모라시니와 여인들은 무척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한조는 일리야스가 자주 와주니 할 일이 늘어서 좋았고 또 심심하지 않아서 좋았다. 
대채로 그들은 종이 따위를 접으며 놀았다. 한조도 일리야스도 글을 몰랐기 때문에 방 안의 장서들은 아주 좋은 놀이수단이 되어 주었다. 
여인들은 한조에게 책을 주었지만 한조는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그 책들을 곱게 접어서 종이놀이를 하고 놀았다. 종이가 두텁고 결이 고와서 학 접고 놀기 딱이었다. 
위로 누나둘 아래로 여동생 둘을 두고 있는 한조는 갖가지 안방놀이의 제왕이었다. 종이 몇 장과 돌 몇 개만 있으면 하루가 후딱 흘러갔다. 
열등생들이 그러하듯이 공부하기를 죽음처럼 싫어하는 일리야스는 그런 한조가 마냥 대단하고 좋았다. 하찮은 종이로 그가 창조해내는 것을 봐라. 몇 번 종이를 뒤집어 까더니 학이 나오고 거북이가 나오고 나중에는 거북이 알도 나왔다.
“한조는 원래 살던 나라에서 대단한 사람이었나 보구나.”
일리야스는 탄복하는 시선으로 한조를 올려다보았다. 한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진짜로 한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어버린 일리야스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자못 진지한 어조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내 너를 귀히 쓰리라.”
한조의 입술이 씰룩씰룩 치켜 올라갔다. 야, 너나 나나 글 모르긴 마찬가지거든? 귀히 쓰긴 개뿔이···.
하지만 한조역시 표정만은 진지하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낸 한조는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똑같이 진지한 장면을 연출했다.
“감사합니다, 일리야스님. 반드시 제게 한 자리 거하게 주세요.”
“날 믿어라.”
일리야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환하게 웃으며 다시 한조를 꽉 끌어안고 얼싸 둥개 바닥을 뒹굴었다. 
한조는 어어, 하며 뒤로 넘어갔다. 부딪힌 머리가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일리야스를 잡아 주었다.
“한조야. 한조야.”
두 팔로 끌어안다 못해 두 다리로 한조를 사정없이 결박한다. 그러더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구 뺨을 비빈다. 꼭 커다란 곰 인형을 선물 받은 어린 여자애 같다.
“왜 이러세요, 일리야스님.”
한조는 이제 적당히 하라는 표정으로 일리야스를 밀어내려 했지만 일리야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네가 좋다. 네가 너무 좋다.”
이 양반이 벌건 대낮부터 그런 말을 내 눈 앞에서 하면··· 한조는 같이 웃었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렸다. 저놈의 상판때기는 무슨 말을 하건 어쩜 저렇게 무서울까. 눈을 벌겋게 하고 입을 귀까지 찢으며 너무 좋다고 하는데 왜 난 널 죽이겠다는 복수의 다짐으로 들리는 거냐.
“저, 저도 일리야스님이 좋습니다.”
이 덩치만 커다란 어린애를 어떻게든 진정시키기 위해 한조도 일리야스의 등을 마주 안아 주었다.
“정말이냐? 너도 내가 좋으냐?”
일리야스가 반색을 한다. 한조는 가볍게 웃으며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예, 저도 일리야스님이 좋아요.”
아무 뜻 없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갑자기 한조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일리야스는 다시 광희 난무하여 한조를 껴안고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하는데 한조는 아무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놈을 좋아하는구나.’
한조는 가슴 한 켠이 뜨끈해져오는 감각을 느꼈다.
‘예진이를 좋아했을 때만큼은 아니라도···내가 이놈이 참 마음에 들었구나.’
일리야스는, 그의 피를 빨아먹고 되살아났던 괴물은, 한조에게 애정을 주고 한조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종족을 넘어 -한조는 일리야스가 인간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공간을 넘어 일리야스는 한조를 따르고, 이 위험한 곳에서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이곳으로 오자마자 감금되고, 짐승처럼 다루어지며 목숨의 위협을 느꼈던 한조에게 일리야스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좀 무섭고 좀 더럽고 좀 못생기고 좀 덜 떨어지긴 했지만 이놈이 있어서 그래도 이만큼 견뎌왔다 생각하니 한조의 가슴이 뿌듯해졌다.
“네, 일리야스님.”
한조는 일리야스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으며 눈물이 글썽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도 당신이 좋아요.”
“아아, 한조!”
일리야스는 콧김을 훅훅 날리며 한조의 뺨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었다. 지난번 입맞춤 사건을기억하는지라 한조는 잠시 움찔했지만 곧 얌전히 뺨을 맞겼다. 하지만 일리야스가 점점 입술 가까이 움직여오자 슬며시 고개를 돌려 피해버렸다. 지난번엔 얼떨결에 했지만 이번엔 어림도 없다. 오빠 그렇게 싼 남자 아니란다.
“아 왜!”
그와 반대로 쌀 대로 싼 남자 일리야스는 한조가 입술을 피하자 불만이 가득했다. 한조는 실실 웃으면서 일리야스의 툭 튀어나온 입술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서부터는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세요.”
“네가 진짜로 좋다!”
“네네, 그래요 그래.”
“아, 진짜라니까!”
“알았어요. 아유···그만 좀 포기하고 놔줘요.”
그렇게 두 사람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뽀뽀를 하니 마니 하는 동안, 그들을 지켜보는 두 쌍의 음습한 시선이 있었다.
벽의 맞은편, 준엄한 표정의 부인이 그려진 초상화의 뒤편에는 한조를 감시하는 여인과 일리야스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은 종남작이 서 있었다. 그들은 한참동안 한조와 일리야스가 하는 모습을 보다가 싸늘하게 뒤로 돌아섰다. 
“못 봐주겠군요.”
여인이 말했다.
“제 눈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저 분이 전하라는 것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트레 종남작이 말을 받았다.
“그분을 세 살 때부터 보았는데, 맹세코 그분의 어머니도 일리야스님께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겁니다.”
“어차피 저 모습은 일리야스님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여인은 냉기가 날리는 눈동자로 아직도 좋다고 웃고 떠드는 일리야스와 한조를 훑어보았다.
“모라시니님이 말씀하신대로 진행해야 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혹여라도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잖습니까. 지금 일리야스님의 모습이 부작용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요.”
여인은 냉기를 풀풀 날리며 저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것은 당신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뒤에 남은 종남작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방 안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일리야스가 웃고 떠들고 있었다. 종남작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모든 것을 가진 대신 심장이 없는 자와, 아무것도 없지만 심장을 지키는는 쪽.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전하.’




원래 기운이 없고 사람이 축 늘어져 있는 편이긴 했지만 요 며칠 사이 일리야스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졌다. 그것은 눈치가 없는 한조도 알 수 있었다.
두 눈은 죽은 생선마냥 흐릿하고 눈 두덩이는 시커멓게 착색이 되었다. 안색은 나날이 창백해져서 이제는 파리하다 못해 그냥 파란색이 되어 버렸다.
말소리는 기운 없이 축 끝이 늘어지더니 나중에는 거의 안 들리게 되었고 숨소리는 고르지 못하다. 간혹 손가락 끝을 발발 떨 때도 있었는데, 그가 그럴 때마다 한조는 일리야스의 건강이 얼마나 안 좋은지를 알 수 있었다.
“정말로 괜찮으세요? 모라시니님은 뭐라고 안 그래요?”
“그를 부르지 마라. 나는 그놈이 싫다.”
일리야스는 한조의 무릎에 고개를 묻으며 연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나보고 너를 먹으라 한다. 너를 먹으면 밤마다 나를 달구는 홧홧한 고통도 사라지고 식도를 태우는 고통도 잠들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 말을 누가 믿을까. 너를 먹어 내가 낫는다고 내가 너를 먹을까.”
일리야스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게 위해를 끼칠 바엔 차라리 내가 이 고통과 함께 앓다 죽고 말거다, 한조야.”
“······.”
한조는 물끄러미 일리야스를 내려다보았다. 혼잣말 하는 그의 안색이 너무도 안 좋아서 금세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나마 네 옆에 있으면 그래도 낫다. 네가 숨 쉬는 곳에 오면 숨도 쉬기 쉬워지고 머리도 덜 아프다. 그래서 모라시니도 내가 여기 오는 것을 말리지 않는 거다.”
“일리야스님.”
한조는 가만가만 일리야스의 손등을 쓸었다. 원래 뼈 가죽만 남은 사람이었지만 점점 심해진다. 한조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시체 같던 것이 자신의 피를 마시고 생명을 피워 올렸다. 그것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모라시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약이다’ 여인들의 말도 떠올랐다. ‘여기 약이 왔습니다.’
“만약에.”
한조는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나를 먹어서···정말로 낫는다면······.”
“무슨 소리냐.”
일리야스가 피식 웃었다. 한조는 주저하지 않고 과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일리야스가 말릴새도 없이 그것으로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붉은 피가 뚝뚝 방울져 흘렀다. 일리야스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무슨 짓이냐! 상처가 났잖느냐!”
“이것을 먹어요. 일리야스님.”
한조가 손을 내밀어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일리야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어버렸다. 화간 난 모양이다. 하지만 한조는 이제 와서 무를 수가 없었다. 되든 안 되든 그들의 말대로 자신이 정말로 약이라면, 이것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상처는 났어요.”
한조는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아깝잖아요. 한 번만 빨아 봐요.”
그 말에 일리야스의 얼굴이 머뭇머뭇 돌아왔다. 두 눈에 갈등하는 빛이 역력했다. 한조가 억지로 갖다 부친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를 맡자 참을 수가 없어졌다. 일리야스는 먹이를 기다리는 개의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해 했다.
“아, 안 된다···그럴 수는······.”
“남자가 결단력이 있어야지! 에잇!”
일리야스의 우유부단함을 참지 못한 한조가 결국 그의 입속으로 손가락을 넣어버렸다. 부지불식간에 입천장을 찔린 일리야스가 욱, 소리를 냈지만 곧 표정이 몽롱해진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어때요?”
한조의 근심스러운 표정에 일리야스는 손가락 하나를 잡고 쪽쪽 빨았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더 열심히 빨아 봐요.”
한조는 손가락을 싹싹 핥고 안쪽으로 빨아들이는 부드러운 혀의 감촉에 살짝 진저리를 쳤다. 일리야스는 다시 열심히 손가락을 빨았다. 조금조금 흘러나오는 그 액체를 참지 못하고 혀로 상처부위를 건드려서 또 빨았다. 
그것을 먹자 점점 기분이 좋아지고 몸이 가벼워진다. 지근지근 머리를 누르고 있던 두통도 사라지고 몽롱하던 머리도 밝아졌다. 이렇게 좋을 수가······일리야스는 한조의 손을 붙잡고 혀로 싹싹 훑고 잇몸에 비비고 이빨로 깨물고 하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아······.”
이윽고 그의 입술에서 신음이 새어나갔다. 그 신음을 듣자 한조는 괜히 부끄러워졌다. 성인남자에게 손가락을 쭉쭉 빨리고 있자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이, 이제 됐나요?”
“아직.”
일리야스는 눈을 감고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완전히 손가락을 빠는 행위에 매혹되어 버렸다. 한조의 손가락은 길이가 길고 나긋나긋하며 살성이 좋았다. 그것을 빨면 맛있는 것이 흘러나와 입안을 적셨다. 좀 더···좀 더······. 너무도 맛이 좋아 욕심이 생긴다.
“한조.”
일리야스가 나른하게 속삭이며 눈을 떴다. 그러자 그 앞에는 홍당무가 된 한조가 앉아 있다. 그는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조.”
천천히 손을 뻗어 한조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한조는 또다시 호랑이 가죽을 내려다보며 그것의 털 고르기를 시작하려 했다. ‘저런 숙맥······.’ 일리야스는 나른하게 웃었다. 당황하는 한조를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한조의 얼굴을 당겨와 이마를 부딪치며 기쁘게 웃었다.
“한조.”
“이, 일리야스님.”
한조는 아무래도 호랑이 털 고르기에 미련이 많은지 여전히 시선은 거기다 붙인 채다.
“왜 이러세요. 이, 이제 됐잖아요.”
“누가 뭐래느냐? 고맙다고 이런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 일리야스가 씩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본 한조의 가슴이 방정맞게 쿵쾅거렸다. 예전에는 그가 웃으면 무서워서 혼비백산 하였는데 지금은 혼이 빠진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다. 일리야스가 웃으니 같이 웃고 싶어지고 심장이 자꾸만 뛰어 혈액순환이 엄청 잘 된다. 덕분에 온 몸이 시뻘겋다.
‘저놈이 갑자기 왜 저럴까.’
한조는 붕붕 뛰는 가슴을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생각했다. 입을 맞추고, 좋아한다고 방방 뛰고 나더니 사람이 좀 변한 느낌이었다.
‘나를 희롱할 줄도 아네. 저놈이 원래 저런 캐릭터가 아닌데 마치 다른 사람 같잖아.’
봄 처녀 희롱하듯 한조를 희롱한 일리야스는 한조의 무릎에 떨어진 과도를 잡아들더니 그곳에 묻어있는 한조의 핏방울을 싹 핥았다. 그러면서 야리야리한 표정으로 한조를 아래위로 훑어볼 줄도 안다.
처 말라비틀어진 게 눈 밑은 시커매갖고 뭔 매력이 있겠냐만은, 한조는 그 모습에 또 넋이 나간다.
‘이러지 마라.’
한조는 두근대는 심장을 손으로 움켜쥐며 생각했다.
‘동생 같은 놈한테 왜 심장이 뛰는 거냐.’
심장이 너무 뛰어 괴롭고 얼굴을 마주치기 힘들어서 괴롭다. 괜히 부끄러워 그냥 호랑이 털이나 고르며 이 순간을 모면하고 싶건만 일리야스의 집요한 시선이 놓아주지 않는다.
“한조.”
자꾸만 고개만 숙이고 있으니 일리야스가 다가와 한조의 턱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한조, 나 좀 보아라.”
다정하지만 견고한 손길에 어쩔 수 없이 한조가 고개를 들었다. 일리야스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피를 마시니 머리가 맑아져서 나 스스로를 돌이켜볼 수가 있게 되었다. 한조야. 나는 점점 내가 변해가는 것을 안다. 그것이 좋은 방향일지 나쁜 방향일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한 가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그는 한조와 똑바로 눈을 마주쳐왔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될 때가 온다 하더라도 너만은 다치게 하지 않으마.”
“일리야스님?”
답지 않게 강하고 결의에 찬 일리야스의 시선을 받으며 한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방 안에 갇힌 신세라지만 멀리서 치는 천둥소리는 들을 수가 있었다. 하루 종일 줄기차게 퍼붓는 빗줄기는 그날 밤이 되어도 그칠 줄을 몰랐다.
‘그놈은 뭐하지?’
올드보이 찍는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갇혀있는 신세인지라 한조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목욕재계하고 일리야스 기다리기뿐이었다. 슬슬 예전 같은 경계심도 사라져 이제는 주는 대로 잘 먹고 잘 자고 목욕도 매일 깨끗하게 하고 새 옷을 갈아입으니 얼굴에는 광채가 나고 몸에서는 귀티가 흐른다.
멀리 비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깜빡깜빡 잠이 왔다. 요즘 일리야스는 밤이 되기도 전에 이곳에 와서 아침이 될 때까지 개기다 가곤 했다. 손가락에서 피를 빤 이후로 잠시 괜찮은 듯하더니 다시 불면증이 도진단다. 덕분에 한조는 밤새도록 일리야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어야만 했다.
일리야스는 호기심이 많았다. 그는 한조가 이곳과는 전혀 다른 어떠한 곳에서 왔다는 것을 외국정도로 알아먹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사후세계를 믿어요.’
한조는 일리야스의 길게 자라난 손톱을 다듬어주며 말했다. 그 손톱은 너무나 길고 뾰족했기 때문에 때때로 한조를 아프게 했기 때문이었다.
‘사후세계에 대해선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고들 해요.’
‘천국과 지옥?’
‘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천국에 가고, 나쁜 짓을 많이 하면 지옥에 간다고 하죠.’
‘그럼 나는 천국에 가겠군.’
일리야스는 한조의 무릎을 베고 당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한조는 식은땀을 흘렸다. 차마 생긴 걸로 봐서는 당신은 곧장 지옥행이라는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그리고 자신은 죽어서 천국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한조는 말을 돌려버렸다.
한조가 해주는 여러 이야기들 중에서도 일리야스가 제일 흥미를 보이는 부분은 바로 한조의 연애부분이었다. 특히 그는 한조가 31번이나 실연당했다는 부분에서 몸이 안 좋아진 후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을 정도로 좋아했다.
‘그렇구나, 너는 인기가 없구나.’
그 말을 하던 일리야스의 표정은 무척이나 기뻐보였다.
‘뭐 그런 셈인지도 모르죠.’
기분이 나빴지만 한조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너는 인기가 없었던 거구나. 인기가 없었어.’
그 사실이 정말로 마음에 드는지 일리야스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너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었구나. 그렇구나.’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지금까지 전부 실연당했다지 않았느냐.’
아, 할 말이 없······.
‘괜찮다, 한조.’
일리야스가 다정하게 한조의 팔을 감싸 쥐며 곱게 아래위로 쓰다듬었다.
‘내가 있잖느냐.’
니가 있는데 뭘 어쩌라고··· 덜 떨어진 것들끼리 모여서 놀아보자고? 한조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얌전하게 있었다.
‘한조야. 나는 다정하게 대해주겠다. 손안의 구슬처럼 사랑해주겠다.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옷을 입혀주고 제일 기름진 음식을 먹여주겠다.’
아 네··· 고맙······. 한조는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여인들은 그에게 제일 부드러운 옷을 입혀주고 제일 기름진 음식을 먹여서 포실 포실 살을 찌워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조야. 한조야. 이제 보니 너도 나를 좋아하고 나도 너를 좋아하는구나. 그렇지 않으냐?’
안 그래.
한조는 속으로만 반항했다. 그렇게 말하는 일리야스의 얼굴이 너무도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쩐 일인지 일리야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자신도 기분이 좋아졌다. 꼭 예전에 예진이를 좋아할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저놈을 상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꽤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갑자기 창백한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와서 한조는 잠시 당황하였다. 어느새 일리야스가 와 있었다. 차가운 바깥의 공기를 잔뜩 묻힌 채로.
“일리야스님.”
한조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어요?”
일리야스는 말없이 한조의 옆에 앉았다. 어느새 한조가 하는 대로 호랑이 가죽위로 올라 올 때는 신발도 얌전히 벗을 줄 안다.
“왜 안색이 안 좋으세요? 오늘도 공부 못한다고 야단맞았어요?”
일리야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행동이 느릿느릿한 것이 어딘가 안 좋아 보인다.
“기운이 없다.”
한참만에야 일리야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더니 힘없이 옆으로 누어버렸다.
“어? 일리야스님. 일리야스님.”
한조는 일리야스를 흔들었다가 흠칫 놀랐다. 차갑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오는 일리야스의 냉기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일리야스는 탄식하듯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여기 오니 좀 낫구나. 아까는···숨도 쉬기 힘들었다. 요즘 들어 점차 몸이 나빠지더니 이제는 심장에서 펄펄 뜨거운 기운이 치민다.”
“심장이 안 좋다고요? 모라시니님을 불러드릴까요?”
“그자가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잖아요.”
막 한조가 일어나려 했을 때였다. 덜컹,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모라시니 노인이 들어왔다. 한조는 잘됐다 싶어 말을 건넸다.
“모라시니님. 일리야스님이 이상해요. 어서 데려가서 치료해 주세요.”
“그럴 것 없다.”
예상외로 모라시니의 반응은 싸늘했다. 보릿자루마냥 바닥을 뒹구는 일리야스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그분은 지금 약발이 떨어져서 그럴 뿐이다.”
“약발요?”
너 약했니? 하는 표정으로 일리야스를 내려다보자 일리야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한조는 다시 모라시니를 올려다보며 눈으로 말을 건넸다. 얘 안 했대는데요?
“······그 약이 아니다.”
어느새 한조에 대해 대체적으로 파악을 하게 된 모라시니는 눈빛만 보고도 말이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손가락을 딱 부딪치니 삽시간에 장정들이 방 안으로 들이닥친다. 한조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른하던 표정에 긴장이 서리고 몸에는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온 남자들 중에는, 한조를 이곳으로 끌고 왔던 짧은 콧수염의 기사도 있었던 것이다.
“······모라시니.”
일리야스가 헉헉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동자가 번쩍거렸다.
“하지 마라.”
“무엇을 말입니까?”
모라시니는 시치미를 뗐다. 두 손을 뒷짐 지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리니 너구리가 따로 없다.
“뭐건 간에···하지 마라.”
“당신은 지금 정상이 아니십니다. 전하.”
모라시니가 말했다.
“당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찬란하던 당신의 옛 모습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아름답던 얼굴도, 명석한 두뇌도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초라하고 불쌍하십니다. 모두의 사랑을 받던 당신은 어디가고 곯아터진 모습으로 저런 것에게 애정을 갈구하십니까. 마치 개와 같은 모습입니다.”
너무도 모욕적인 말에 일리야스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그는 앞으로 달려 나가려다 뒤에서 가로막는 힘 때문에 팩 고꾸라졌다. 손과 발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지만 그 뿐이었다. 일리야스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모라시니는 그 비참하고 무력한 모습을 굽어보며 냉정하게 일별했다.
“모두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당신은 후일 제게 고마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 마! 하지 말라니까!”
“일리야스!”
일리야스의 고함 소리와 함께 한조도 그의 이름을 부르며 비명을 질렀다. 콧수염을 기른 기사가 한조의 팔을 한 번에 붙잡더니 머리 위로 훽 옭아맨다. 어마무시한 힘이다. 한조는 신음하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이미 발은 바닥에서 반 뼘 가량 떠 있다. 
팔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아팠다. 그보다 무서웠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모라시니가 칼을 들고 다가오자 한조는 이를 악 깨물었다.
“왜 이러는 거냐고 대체!”
“아가야. 전하께서 좀 아껴주셨다고 네 분수를 잊지 말아라.”
모라시니는 한조의 턱을 잡고 난폭하게 흔들었다. 그러자 모가지의 핏줄이 울툭불툭 움직인다. 그 핏줄이 지나는 곳에 모라시니의 칼날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그는 닭이나 소, 개나 돼지를 보는 눈길로 한조를 주시하며 어디를 어떻게 찔러야 피가 잘 빠질까 가늠했다. 너무도 흉흉한 눈빛에 이한조는 기가 질렸다.
“찌를 거면 빨리 찔러.”
한조는 잇새로 내뱉었다.
“각오하고 있을 테니, 빨리 해치우란 말이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스물 두 살짜리 어린 청년이 부리는 호기를 모라시니는 정면에서 비웃었다.
“아가야, 너는 전하를 위해 예비 된 약일뿐이다. 전하를 위해 너를 불러왔으나, 네가 전하를 망친다면 차라리 너를 죽이고 운명과 함께 자멸하리라.”
“한조!”
일리야스가 달려왔으나 덩치가 좋은 남자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세 명의 남자가 우르르 몰려가 그를 붙잡으니 일리야스로서도 도리가 무도리다.
“한조! 이런 젠장! 이거 놓지 못할까!”
일리야스는 미친것처럼 발광을 했으나 남자들은 더욱 강하게 그를 붙들고 늘어졌다. 아무리해도 그들을 떨쳐낼 수가 없자 일리야스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모라시니의 칼날이 한조의 모가지로 파고드는 모습에 간이 덜컹 내려앉아 차마 지켜볼 수가 없었다.
사악, 모가지를 가누는 칼날의 감촉에 한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까지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날아가고 또다시 생명이 위협받는다. 가슴속에 응어리가 맺혀 눈물로 뚝뚝 흘러내렸다.. 내가 왜······. 한조는 칼이 목줄기를 파고드는 느낌에 헛바람을 삼켰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해야만 한단 말인가.
여인이 다가와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았다. 양철통을 두드리는 맑은 소리에 한조는 헉, 격한 숨을 들이마셨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심장이 격하게 두근거렸다.
흡족할 만큼 피를 받아낸 모라시니가 등을 돌리자 콧수염의 기사도 한조를 내팽개쳤다. 한조는 죽은 짐승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아니고 비명도 아닌 것이 입끝에서 머물다가 사라져버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의 피가 빠져나갔다. 한조는 바닥을 더듬으며 무릎을 꿇었다.
“한조!”
일리야스가 부르는 소리는 들렸지만 눈앞이 흐릿하여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조는 뱅뱅 앉은자리를 돌며 일리야스를 찾았다. 무섭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리야스는 쭉 손을 뻗으며 한조에게 닿으려 했지만 아무리해도 되지 않자 슬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하다. 내게 힘이 있었더라면.”
“당신은 힘을 가질 것입니다.”
모라시니가 피를 담은 그릇을 들고 다가갔다.
“당신은 누구보다 강한 분이십니다. 저것에게 마음 주지 마십시오.”
그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당신 어깨에 수만의 목숨이 얹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그저 분노로 타오르는 눈동자로 모라시니를 노려볼 뿐이었다. 남자들에게 잡혀 있지만 않았더라도 모라시니의 모가지를 잡고 분질러버렸을 것이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모라시니는 일리야스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지금 이 백치 같은 상태로는 아무 설명도 안 먹힐 줄 알았다. 
‘지금은 나를 그렇게 보아도.’
그는 충신의 간곡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나중엔 내게 감사하게 될 겁니다.’
남자들은 일리야스의 턱관절을 잡고 꾹 눌렀다. 일리야스는 몸부림을 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수가 너무 많았고, 일리야스는 너무 약했던 것이다.
이윽고 한조의 피가 울컥울컥 일리야스의 목울대를 넘어갔다. 일리야스가 그 과정에서 심하게 몸부림을 쳤기 때문에 처음에는 다량의 피가 공중에 흩뿌려졌다. 그러자 모라시니가 표독스럽게 외쳤다.
“다 받아먹으시오! 아니면, 저것의 피를 더 뽑아오리까?”
그 말에 일리야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자들이 그의 코를 잡아 눌러 더 크게 입을 벌렸다. 숨넘어가는 소리가 나더니 울컥울컥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러자 반항도 잠잠해지고 이내 축 아래로 처진다.
먹인 사람이나 먹은 사람이나 모두가 피투성이가 되었다. 반항이 심할 줄 예상하고 많이 뽑아놓기 다행이었다. 모라시니는 자신의 얼굴에 튄 한조의 피를 혀로 슬금 핥았다. 그러자 몸에 기력이 돌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과연···괜히 신물이 아니로다.
모라시니는 기가 막힌 효과에 혀를 내둘렀다. 온갖 좋다는 약보다 저것의 피 한 방울이 훨씬 효과가 좋지 않은가. 이리 좋은 것을 저리 많이 드셨으니 곧 반응이 올 것이다.
“으······.”
모라시니가 눈짓을 하자 일리야스를 잡고 있던 남자들이 뒤로 물러났다. 힘없이 아래로 추락하려던 일리야스의 무릎이 공중에서 주춤하더니 천천히 곧게 펴졌다. 축 처졌던 팔뚝에도 빳빳하니 힘이 들어갔다. 기운 없이 구부러졌던 허리가 조금씩 곧게 되고 산발하여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의 검은 우플랑드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수십 개의 촛불도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치 일리야스의 주변에만 바람이 부는 듯하다.
남자들은 불안한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빠졌다. 잿빛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뱀처럼 날리며 춤을 추었다. 그것은 주인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거리더니 한순간에 붉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마법 같았다. 한조로 피로 완성되는 마법······.
일리야스는 신음하며 탁자를 짚었다. 탁자를 짚는 손이 피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다. 이윽고 탁자의 귀퉁이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파삭, 부서져버렸다. 그가 신음하며 이를 가는 소리가 마치 얼음을 강판에 가는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고개를 들었다. 방 안 가득한 사람들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고 발을 들여다보고 마지막으로는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그의 입술에서도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일리야스님.”
한조는 비틀거리며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일리야스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리··· 왜 그러세요?”
피를 한 번에 너무 많이 쏟은지라 조금만 움직여도 심장이 벌떡거려 너무도 괴로웠다. 한조는 그래도 손으로 바닥을 더듬으며 엉금엉금 기었다. 일리야스를 찾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말 좀 해보세요. 네?”
의식이 흐려지는지 점점 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눈도 보이지 않아 고통스러웠다. 눈알에 힘을 주고 끔뻑거려보니 사방은 여전히 흐릿하고 컴컴하여 사위를 알아볼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지고 웃음소리도 요란했다. 일리야스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고 싶은데 누구도 한조에게 신경을 써 주지 않았다.
“이리와라.”
엉금엉금 기다보니 남자들의 발에 밟혀 손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허둥대는데 보다 못한 여인이 다가와 한조를 이끌어주었다. 저쪽 구석 어디로 한조를 데려간 그녀는 한조의 목에 약초를 발라주고 거즈를 대고 붕대도 감아주었다. 
치료를 받은 후에야 한조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헉헉 거친 숨을 토해내며 눈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생리적인 눈물이 두어 방울 흘러내리자 조금씩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한조는 눈알만 굴려 일리야스를 찾았다.
‘어디에 있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찾는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스치는 시선에 모라시니의 얼굴이 잡혔다. 모라시니는 누군가를 향해 열심히 뭐라고 떠들며 그의 손에 키스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사이, 가장 중간에 장신의 남자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반쯤 등을 돌리고 있는지라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입고 있는 옷이 일리야스의 것과 같았다. 한조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닐 것이다. 저 남자가 아닐 것이다. 일리야스의 허리는 늘 엉거주춤하니 굽어있고 머리카락도 저렇게 짙지 않다. 다른 사람일 것이다. 다른 사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조는 그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당당한 자태와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기품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안한 예감에 한조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곧 심장을 감싸 쥐고 털썩 주저앉긴 했지만 눈만은 남자에게서 떼지 못했다.
이윽고 남자가 고개를 돌리더니 저만치 바닥에 앉아있는 한조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한조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남자가 한조를 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죽은 가금이라도 보는 듯 차갑고 무감각한 표정이었다. 한조는 멍하니 입만 벌렸다. 태어나서 저렇게 생긴 사람은 처음 보았다.
“오늘은 축배를 듭시다!”
콧수염의 기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너무도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일리야스님이 돌아오셨으니 어린양을 잡읍시다! 가장 훌륭한 포도주를 대령하겠소!”
“당연히 축배를 들어야지요! 밤 새 마시고 여기저기 토해놓을 때까지 아무도 자리를 뜰 수 없을 겁니다! 물론 일리야스 전하도 포함해서요!”
모두가 기뻐하며 그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의 몸짓에는 스스럼이 없었다. 모두가 그 남자를 일리야스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조는 믿을 수가 없어 눈만 끔뻑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저 남자는 일리야스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일리야스님.”
한조는 식탁 밑을 내려다보았다.
“일리야스님. 어디계세요.”
긴 의자의 뒤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들이 웅성웅성 시끄럽게 떠들며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 장신의 남자를 일리야스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조는 무표정하게 그들이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마치 진짜 일리야스를 숨겨두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사람이 방을 빠져나가고 떠들썩한 목소리도 멀어지자 한조는 여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일리야스님은 어디계세요?”
“방금 보았지 않느냐.”
여인이 답해주었다.
“아까 나갔던 사람 중에 있었나요?”
“그 사람들 중에 가장 아름답던 남자다.”
“아니요. 그 분은 일리야스님이 아니에요.”
한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분이 나를 그런 눈으로 볼 리가 없어요.”
그 말에 여인은 주변을 정리하다 말고 물끄러미 한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한조의 옆으로 다가와 땀으로 흠뻑 젖은 한조의 젖은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혀주었다. 강한 쇼크와 자극으로 인해 한조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몸에서는 찬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는 아프다. 쉬어야 한다.”
“일리야스님부터 찾고요.”
“방금 나가신 분이 일리야스님이라 하지 않았니. 어서 가서 누워라.”
똑같은 대화가 반복되자 결국 여인은 성질을 냈다. 그래도 한조가 말을 듣지 않자 거칠게 땀을 닦아주며 싸늘한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멍청한 것아. 설마 일리야스님이 너를 진심으로 아껴주었다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그것은 전부 네 착각이다.”
반 강제로 한조를 침대에 뉘어놓고 여자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한조는 멍하니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여인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착각?”
한참만에야 그 말을 입 밖으로 낸 한조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목을 칼에 찔린 것보다 더 강한 아픔이 심장을 강타했다.
“착각이라고?”
그는 스스로의 화를 참지 못하고 베개를 집어던졌다. 접시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성질을 내자 목에서 왈칵, 피가 다시 뿜어 나왔다. 한조는 씩씩 거리며 더 던질 것을 찾다가 그대로 획 고꾸라지고 말았다.




[ 4 ]




성지 그란사나. 흰 백합화와 달빛을 숭상하는 아름다운 나라.
초대 신성황제 그란사르스가 그 주춧돌까지 직접 쌓아 건축한 그란사나교의 성지. 천년을 버텨낸 신성한 도시.
어느 나라건 깊이 들어가 보면 썩은 물이 철철 흘러넘치기 마련이다. 가지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가 공존하니 미소 짓는 뒤로 칼날이 오간다.
그란사나에는 황제가 둘 있다. 실질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황제는 검은 눈동자와 짙은 머리카락을 대대로 물려받은 그란사나스의 후손이고, 다른 하나는 성스러운 검은 색으로 온 몸을 휘감고 손에는 신의 표장을 든 교후라. 황제가 빛이면 교후는 어둠속에서 사람들을 조정하고 분쟁을 조절해왔다.
아무리 교후의 권력이 강하다 한들 그란사나에는 신의 대통을 잇는 황제가 있다. 무신론자들은 그들의 검은 눈과 머리를 돌연변이의 일종이라며 백안시하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황제를 보면 눈물을 흘렸다.
황제에 대한 사랑이 이토록 절대적인지라 성청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황실의 아래였다. 그란사나에서 독립되어 하나의 종교독립국가로서의 위치를 확립하고자 하는 성청에게는 그것이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주장은 그란사나의 수도를 교후국으로 인정하고 정치적 분립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황제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황제도 교후도 입지가 변하기 시작했다. 성혈의 저주로 인해 죽어나가는 황제의 혈통들이 그 원인을 제공했고, 병을 치료하기 위한 신전의 노력이 그를 뒷받침하였다. 하나로 뭉치지 못한 권력은 수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 교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성장해왔다.
아무리 그렇다한들 교후가 섭정을 하겠다 설칠 정도가 되니······. 그 상황의 심각함이 상상을 초월함이다.
사정을 이렇게까지 악화시킨 것은 선황 악시아 황제 탓이 컸다. 그는 평생을 발병할까 벌벌 떨면서 살아온 자로 나중에는 그것이 정신병으로까지 이어졌다.
병만 내려주고 그들의 황제를 돌보지 않는 신에게 신전에서는 수백년에 걸친 기도를 했으며 내부적으로는 병을 고치기 위한 연구를 거듭했다. 악시아 황제는 신전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는데 그 규모가 국가 전체 예산의 반 이상이나 되는 것이었다. 
평생 동안 발병을 두려워하여 성청에 숨다시피 했던 악시아 황제는 어이없게도 끝까지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고 있었다. 대신 그는 병에 걸릴까 벌벌 떨다 정신병을 얻었게 되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성청 흑색궁의 깊은 곳 어디. 결이 고운 공단으로 커튼을 깔고 야광주를 매달아 밤을 밝힌 어느 깊은 곳이 있다. 밖으로는 검고 긴 우플랑드로 온 몸을 감싸고 목에는 금줄 하나만 맨 청명한 모습이나 남들 눈이 없는 곳에서는 능라 비단을 찢으며 논다. 걸치는 것은 금색과 은색과 적색과 옥색이고 열 손가락 전부에는 에메랄드 반지를 낀다.
신성해야할 성청 한 가운데서 웃음소리가 작게 흘러나온다. 과즙을 깨물어 삼킨 듯 목소리가 달콤하고 윤기가 흐른다.
“이리 오너라.”
늙고 주름진 손가락이 날씬하고 사랑스러운 손목을 붙잡는다. 하지만 바람처럼 가볍게 그 손길을 피한 아름다운 청년은 후후 웃으며 달아나버렸다.
“이리 오라니까.”
늙은이가 주섬주섬 다가갈 때마다 청년은 잡힐 듯 말듯 애만 태우며 이리로 저리로 뜀박질을 했다. 늙은이는 애가 타서 입맛을 다셨다. 그는 누추한 손을 가슴으로 그러쥐며 애닮게 말했다.
“벌꿀 같은 네 머리카락 좀 만져 보자. 이것아. 내가 너 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그럼 죽으세요, 폐하.”
청년은 야멸치게 말했다.
“내가 당신이 죽는다고 눈 하나 깜빡 할까봐?”
“아이고, 왜 또 심기가 상했느냐. 이리로 와라. 내가 안아봐야겠다.”
“흥.”
청년은 코웃음을 치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고 있던 가운을 털썩 떨어트렸다. 그 안에 입고 있는 것은 속이 훤히 비치는 꼬뜨 한 자락뿐이다. 속바지도 하나 입고 있지 않았다. 깨끗하게 위로 묶은 머리를 풀어헤치자 풍성한 금발머리가 파도처럼 물결쳤다.
노인은 청년의 그런 모습을 보자 개처럼 낑낑대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금방이라도 뛰어가서 허리를 낚아채고 싶은데 늙은 육신이 저주스럽다.
청년은 노인의 그런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꼬뜨 자락이 벌어지며 허벅지가 훤히 보였다.
“주, 죽겠구나.”
노인이 앞섬을 움켜쥐며 우는 소리를 했다. 노인이 아니라 10살 어린아이 같았다.
“사무엘, 이리 오너라. 이리.”
“아직 안 돼요.”
청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번에 제가 넣어드린 그 여자들과는 왜 동침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년들은······.”
노인은 울상을 했다.
“너무 못생기고 더러웠는걸.”
“그 못생기고 더러운 년들한테 씨를 뿌리기 전까진 저한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다 하지 않았던가요?”
“그랬지. 그랬지만······.”
노인이 눈에 띄게 약해진 것을 본 청년은 천장에 연결되어 있는 긴 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곧 한 무리의 사내들이 몇 명의 여자들을 데려왔다. 혀가 잘리고 눈알이 뽑힌 종년들이었다.
“히익!”
남자들을 본 노인은 침대위로 올라가더니 이불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리고는 오들오들 떨며 외쳤다.
“저, 저리가라. 저리가. 너희들하고 있으면 병이 옮을지도 모른다.”
“병은 안 걸린다니까 그러네.”
청년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나이에 맞지 않게 질질 짜기 시작했다. 금실 은실로 수를 놓은 침상위에 노인의 우는 소리가 장시간 이어졌다. 하늘 한 번 보았다가 땅 한 번 보았다가 하던 청년이 결국 한숨을 쉬며 노인에게로 갔다.
이불을 걷어내자 흉측하게 늙은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청년은 노인의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고 입술에 키스도 해주었다. 쭈글쭈글한 입술에서는 쉰 맛이 났다. 하지만 교후 사무엘에 그것은 권력의 맛이었다. 그것도 아주 맛있는.
“저것들과 동침하여 임신시키십시오.”
사무엘이 소곤거렸다.
“그러면 제 몸에 넣어드리겠습니다.”
“저, 정말 그럴 테냐?”
“그 전에.”
사무엘이 웃으며 황제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저년들을 임신시키셔야죠?”




어디나 그러하듯이 황궁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최소한 공민(公民)의 신분은 되어야 간신히 그 문턱을 넘어볼 수가 있고 반자유민은 물론이고 비자유민은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가난과 무지가 흰 벽궁을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귀족이라 해도 종남작처럼 작위가 낮은 사람은 출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신원이 확실한 대귀족의 심부름을 왔다거나,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을 경우에는 입구에서부터 막히기 일쑤였다. 특히나 지금처럼 궁의 주인이 없어 시국이 어수선하고 흑색궁과의 대치로 신경이 날카로울 때는 더더욱 말이다.
두 필의 갈색 말이 끄는 마차 한 대가 그란사나 백색궁의 정문 앞에 섰다. 경비병은 그들을 들여보내줄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였으나 마차에 탄 사람은 완강했다. 그들은 반드시 지금, 그것도 정문을 통과해야겠다고 우기고 있었다.
“정히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만.”
슥 안에서 늙은 손 하나가 나타나 경비병들에게 얼굴을 보여 주었다. 경비병들은 놀란 얼굴을 했다.
“모라시니 대공!”
“쉿, 조용히 해라.”
모라시니는 손을 흔들어 가만히 있으라는 시늉을 했다. 경비병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황궁을 수호하는 근위대에 소속된 자들로 궁의 돌아가는 상황을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자들이었다. 모라시니는 친황제파로 교후의 섭정을 반대한 몇 안 되는 귀족 중 하나였다. 근위대도 친위대도 황실에 귀속된 자들인지라 그들 역시 교후의 섭정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오늘 이 문을 열어주면 너희는 황실에 충성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유도 모르고 문을 열어드리기는 곤란합니다.”
모라시니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비켜라. 너희가 지금 이 문을 막으면 너희는 너희도 모르는 새 역적 짓 하는 것이다.”
“가게 해드려라.”
그때 뒤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모라시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근위 대장이었다. 그는 마차를 향해 깊이 굽어 절을 했다. 그런데 절하는 위치가 모라시니가 아니라 모라시니의 앞쪽을 향하고 있다.
“가시지요.”
“······고맙다.”
안에서 유리구슬처럼 차갑고 무감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젊고 기품이 있는 목소리였다. 
마차가 안으로 들어가자 경비병들이 그들의 대장에게 물었다.
“왜 문을 열어주셨습니까.”
“너희는 몰라도 된다.”
근위대장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일이 잘못될 경우 그게 너희들한테도 좋을 테니.”




백색궁의 지하 감옥. 흑색궁의 지하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모르지만 백색궁의 지하 감옥은 고문실이 내장된 더러운 거대한 포로수용소였다. 정복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이 감옥에도 적군의 기사들이 가득 들어차고 신음과 고문이 난무했겠지만 지금은 손버릇이 나쁜 종복(從僕)이나 침방 비자(婢子)를 가두어 둘 뿐이다.
횃불 모양의 벽 촛대가 음침하니 사방을 비추고, 무거운 돌쩌귀를 움직일 때마다 그 소리가 요란하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누린내가 진동하고 더 깊이 들어가자 죄수들이 싸놓은 똥과 오줌의 냄새가 발효되어 풍겨왔다.
그 누가 신성황제가 다스리는 백색궁의 아래에 이런 끔찍한 곳이 있었노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비밀스럽게 지하 감옥을 방문한 세 명의 남자는 코를 감싸 쥐고 인상을 찡그렸다.
넓은 지하 감옥에 서니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몇 갈래로 갈라진 길 앞에서 잠시 주춤 하려는데 젤 끝에 선 이가 등을 밝히며 말했다.
“이쪽으로.”
“어떻게 길을 아시오?”
“예전에 여기 갇힌 적이 있어서 압니다.”
“어째서 여기 갇혔단 말이오?”
“그것이···초대황제 탄신일의 축일전례(典禮)에 그만 코를 골고 자버렸지 뭡니까.”
“······.”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다행이 아닙니까. 하하하, 하하하하.”
국가에서 거행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에 종남작이긴 하나 귀족이라는 작자가 코 곯고 잤다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나머지 두 남자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한참을 들어가도 그들이 목적하는 곳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세 남자는 같은 자리만 빙빙 돌다 처음 왔던 곳으로 나오게 되었다. 짙은 콧수염의 기사가 힐난하는 눈빛으로 바트레 종남작을 흘겨보았다.
“이래서야 원······.”
“아, 역시···좀 더 깊은 곳에다 숨겨놓았나 봅니다.”
그때 제일 뒤쪽에서 묵묵하게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이쪽으로 오너라.”
“어떻게 아십니까, 전하.”
“예전에 이곳에 갇힌 적이 있다.”
“예? 전하께서요? 어떻게······.”
눈치 없이 꼬치꼬치 캐물으려던 바트레 종남작을 콧수염을 기른 기사가 팔꿈치로 쳐서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남자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앞으로 선선히 입을 열었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의 형님은 광인이었다.”
남자는 바트레 종남작이 짚은 곳과는 정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정결(貞潔)왕이라 불릴 만큼 성정이 곧고 올바른 사내였지만 그것은 외관상 보여 지는 모습만 그러했을 뿐이지.”
“정결왕이시라면 독사에 물려 죽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옅은 불빛에 비친 입술에 미소인지 조소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어린다.
“형님에게 광기가 있어 그는 내게 그 기운을 풀곤 했다. 나는 형님의 변덕에 의하여 때때로 이 감옥에 갇히곤 했지. 그래 이 길이다. 조금씩 기억이 나는구나. 이럴 땐 형님께 감사해야 하나?”
길고 긴 복도를 들어가서 아래로 굽이치는 계단을 또 내려가자 훨씬 더럽고 훨씬 끔찍한 냄새가 나는 감옥이 나타났다. 바트레 종남작은 고개를 옆으로 꺾고 웩, 구역질을 올렸다. 이것은 인간이 참을 수 있는 냄새가 아니었다. 콧수염의 기사는 구역질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일그러진 얼굴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여기다. 이리 오너라.”
침착한 것은 선두에 선 자 뿐으로 그는 계속해서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쇠문의 안쪽. 환기를 위해 설치된 연통과 거리가 가장 멀고 오래된 돌 틈으로 지하수가 새어 축축한 진흙투성이 속에서 돼지처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딱 보기에도 이곳에서 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붉은빛이 도는 얼굴색에 칼날처럼 얇고 뾰족한 코와 입술. 눈동자에는 창백한 분노와 조용한 결의를 담고 있었고 틀어쥔 주먹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들이었다. 

18~20편
“주술사들아.”
방문자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는 강한 불신이 서려있었다. 남자는 천천히 손을 뻗어 굵고 두터운 창살을 잡았다. 후드 속에서 튀어나온 희고 아름다운 손은 너무도 깨끗하여 이 곳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남방의 주술사들아.”
“당신은 누구시오.”
창살 밖에서, 창살 안에서. 그들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서로를 주시했다.
“왜 우리를 찾아왔소.”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남자가 후드를 벗자 술처럼 붉은 보랏빛 머리카락이 흐트러진다.
“너희와 계약을 맺으러 왔다.”
“그렇다면 당신은 교후요?”
오래된 나무처럼 가닥가닥 주름진 얼굴의 주술사가 물었다. 그는 짧고 밋밋한 소매에다 계집아이의 머리채처럼 가닥가닥 땋아놓은 술이 잔뜩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질문에 자신을 왕이라 밝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는 이 신성한 핏줄의 정당한 후계자다. 나를 그런 것과 비교하지 말아라.”
“당신이 왕이라면 내가 지금 보는 것이 귀신이겠구려.”
주술사가 말했다.
“왜냐하면 이 나라 왕은 불에 타 죽었다 들었으니까.”
“나를 봐라.”
남자가 한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뒤를 따르던 콧수염을 짧게 기른 기사가 청동 촛불을 하나 빼 와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사방이 밝아지며 남자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남방의 주술사야. 나를 봐라.”
주술사는 길게 주름진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남자를 흘깃 남자를 보았다가 그만 심장이 얼어붙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짐승의 우리같이 더러운 지하 감옥에, 불길하리만치 흰 피부위로 그려진 이목구비가 요사스럽게 빛이 난다.
핼쑥하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지만 눈을 뗄 수 없는 요사스러움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전 대륙을 다 뒤져도 그란사스의 백색궁에만 존재한다는 새까만 검은 눈동자······.“왕이시군요.”
주술사는 씁쓸하게 뇌까렸다.
“어둔 촛불하나로만 감상하기 아까운 미모이외다. 이 늙은것의 두 눈이 죽기 전에 호사를 누리는구려.”
“아부는 관두어라.”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일리야스가 말했다. 그런 말은 태어났을 때부터 하루에 백번도 더 넘게 들어왔다.
“나는 너와 거래하러 온 것이다.”
“무슨 거래를 원하시오.”
주술사는 슬픈 목소리로 아뢰었다.
“당신같이 고귀한 자와 우리가 무슨 거래를 하겠소.”
“땅을 지키고 싶으냐.”
일리야스는 허리를 굽혀 주술사와 눈높이를 같게 했다.
“너희들의 정신을 지키고 싶으냐.”
“그것은 당연한 일이외다. 하지만 당신들의 힘이 막강하니 끝까지 버텨내지 못할 것인지라 슬프고 억울한 일이오.”
“내가 힘을 주겠다.”
일리야스는 창살을 잡은 손을 미끄러트렸다. 그의 목소리는 뱀처럼 낮고 간교하여 어떤 이에게는 음악 같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연인의 속삭임 같기도 하다.
“어떠냐. 너희 야만 한 것들에게 그란사나의 황제가 힘을 실어주겠다.”
그는 왕자시절 받은 왕의 호칭이 아니라 이제 황제의 호칭을 스스로에게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 대가를 치를 수 있겠소이까?”
“그것은 두고 보면 네가 알리라.”
일리야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가 웃자 삭막한 지하 감옥에 붉은 장미꽃이 만개하는 환상이 펼쳐졌다.
주술사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여자보다 더 간악한 것이 그의 앞에서 웃고 있었다.




어느새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이 쌩하니 불어와 절로 어깨가 움츠러졌다.
그의 충직한 기사가 일리야스의 등에 망토를 걸쳐주었다. 검은담비의 털로 겉을 두른 훌륭한 것이다. 일리야스는 보드라운 털에 뺨을 비볐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졌다.
“날이 쌀쌀합니다. 마차로 돌아갑시다.”
“조금만 더 걷겠다.”
“무모한 짓은 하지 마십시오. 방금도 굳이 정문으로 들어와야 한다 하셔서 많이 곤란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일리야스는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어느 집 주인이 자기 집 뒷문으로 들어간다더냐. 그것만은 나의 원칙에 따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일리야스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이 등을 돌려버렸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모라시니는 그의 자존심이 상한 것을 알았다. 하긴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병에 걸리자 유폐되다시피 탑에 갇히고, 정적에 의해 타죽게 되었는데다 이미 국장까지 치루어졌으니. 거짓 시체가 아니었다면 벌써 몇 번이고 죽었을 것이다.
모라시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젊은 왕이고, 젊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 있지만 또 젊기 때문에 발목을 잡는 일들도 있다. 그러나 모라시니는 깊이 걱정하지는 않았다. 일리야스는 현명하고 냉철하다. 이만하면 충분히 훌륭하게 수순을 밟아 나아가고 있다.
일리야스는 털에 얼굴을 댄 채로 중얼거렸다.
“잠들기 전에는 여름도 되기 전이었는데 벌써 가을이 다가온다. 머릿속이 백태가 낀 듯 부옇고 가슴이 홧홧하니 갑갑증을 참을 수가 없다. 어서 이 열기를 떨쳐버리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야 한다.”
“당신은 이미 돌아와 계십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일리야스는 길게 자라난 풀숲을 밟았다. 작은 곤충들이 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이곳은 아무도 오지 않는 황궁의 깊은 곳이다. 아름다운 조각품과 분수대, 잘 손질된 정원수와 꽃밭이 있는 곳과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그러니 곤충들로써도 오랜만에 겪는 침입자들로 인해 큰일이 난 것이다.
“마치 긴 꿈을 같다, 모라시니.”
“그럴 것입니다.”
어느새 콧수염의 기사는 저만치 사라지고 모라시니 노인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전하, 우리는 여기서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했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그래, 기억이 난다.”
그들은 좀 더 걸었다.
구불구불한 샛길과 사람이 밟은 흔적이 없는 수풀 속에서 모라시니는 다시 물었다.
“전하, 우리는 여기서 눈에 담지 못할 짓을 했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그래, 기억이 난다.”
그들은 좀 더 걸었다.
멀리 시커멓게 탄 속살을 드러낸 검은 탑이 보였다. 그것에서는 아직도 타는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전하, 우리는 여기서 해서는 안 될 짓도 했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그래, 그것도 난다.”
모라시니의 조심스러운 행동에 일리야스는 여리게 미소를 지었다. 교교한 달빛 속에 홀로 웃고 있는 미남자의 모습에 모라시니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당신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는 이제 다 틀렸다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밝았던 일리야스의 웃음이 차갑고 비틀린 조소가 되더니 입 끝에서 사라져버렸다. 바람이 그의 머리를 흐트르자 일리야스는 천천히 걸어 물기에 젖은 잎사귀를 밟았다. 허둥지둥 달아나던 작은 거미 한 마리가 그의 발밑에서 으스러진다.
“멍청하고 무능한 자였지.”
그는 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찌나 어수룩하고 못났는지 돌이켜보면 실로 살심을 일으키는 남자였다.”
“일리야스 전하.”
“인생이란 재미있지 않느냐? 모든 것을 다 가졌던 남자가 한순간에 어린 청년의 비위를 맞추려고 쩔쩔 매는 바보가 되었으니 말이다. 몸을 사르는 고통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결국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던 거다. 마치 내 형님처럼 말이다. 그래서 저를 깨워준 자를 보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거지. 엄마 새를 처음 본 새끼 새처럼 말야.”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일리야스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시다면 전하.”
모라시니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제 전하께는 그 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인지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내게 묻지 마라.”
일리야스는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싸늘하게 눈짓을 했다. 모라시니는 황급히 허리를 구부렸다. 그 모습에 일리야스의 눈빛이 약간 순해지더니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박사박 풀 밟히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불에 탄 검은 탑이 이제는 지척에서도 보였다. 화재를 진압한 다음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듯 여전히 흉하고 더럽다.
군데군데 돌이 떨어져나가 내부가 휑하니 드러난 흉측한 탑. 여기서 왕이 죽었다. 병에 걸린 왕을 신관들이 죽여 놓았다. 이곳은 일리야스의 무덤이고 치부이다.
일리야스는 그 탑을 잠자코 올려다보며 가만히 말했다.
“모라시니, 나는 한 번 죽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다. 나는 전보다 훨씬 나다워야 하고 전보다 훨씬 강해여야 한다. 사사로운 것에 대한 감정은 다시 태어나면서 이미 죽었다. 그러니.”
그는 여기서 잠깐 말을 끊었다.
“그러니 너는 나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전하.”
모라시니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얇은 어깨에 올려져 있던 무거운 짐이 그를 떠나 일리야스의 어깨로 옮아갔다. 
일리야스는 모라시니야 울던가 말든가 제 할 말만 했다.
“그 같잖던 사내를 기억하느냐? 그렇다면 너는 그를 잊는것이 좋다. 나는 한 번도 그런 남자였던 적이 없다.”
“맞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당신은 늘 지금과 같은 모습이셨습니다.”
일리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말해놓았으니 모라시니가 가신들의 입을 단속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못난 자였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감정의 사소한 변화에도 벌벌 떨며 상대의 미소 하나에 울고 웃고, 상대의 말 한 마디에 행복해하던 사내는 처음부터 없었다.
여신도 한숨을 토해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남자지만, 달빛에 비친 얼굴은 칼보다 차갑다.
일리야스는 다시 달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교후에게 나와 거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해주겠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정원이라면 그것은 죽은 정원이다. 꽃이 아름답지만 드라이플라워와 같이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꺾을 가치가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절대적인 미에 몰래 가슴을 부여잡고 굳게 닫힌 정원으로 들어가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 속에 든 것이 꽃인지 독초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욕심내어 그러잡는다.
종래에는 마음이 깨어져 파편도 남지 않게 되는데도, 그래도 발을 동동 굴리며 탐을 낸다.
차갑고 또 아름다운 미왕을 원망하며 말이다.




머리가 어지럽고 오한이 나서 벌벌 떨며 이불에 몸을 말았다. 성질도 부릴만하니 부리지 지금처럼 온 몸이 까라지니 누워서 앓기밖에 못하겠다.
눈을 뜨나 감으나 시력이 혼탁하여 정신이 몽롱해졌다. 머리는 핑핑 돌고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서 자꾸만 물을 찾게 되었다. 귀에서는 이명이 나고 몸에 기운이 쫙 빠지는데다 숨을 들이마시는 것도 힘이 든다.
드문드문 정신을 차릴 때마다 아무도 없거나 여인이 옆에 앉아 있었던 것만이 기억이 났다. 그녀들은 과일을 갈거나, 스프를 떠먹여주거나 하며 한조의 옆에 잠시 머물러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정신을 차렸다.
‘일리야스.’
한조는 오한으로 벌벌 떨며 유일하게 자신을 걱정해줄 단 한 사람을 생각했다.
‘일리야스···.’
꿈에서 그를 본 것도 같은데 왠지 모습이 흐릿했다. 못생긴 송곳니와 칙칙한 낯짝이 그리워서 눈물이 났다.
한조가 제대로 일어서기까지는 사흘이 걸렸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한조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그것은 몹시 ‘고통스럽다’와, ‘이것으로 끝이 아닐 것이다’였다.
예감은 적중했다. 한조가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그들이 들이닥쳤다.

재회는 갑작스럽고 또 빨랐다. 목욕을 하고 한창 식사를 하고 있으려는데 큰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더니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한조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렁치렁한 우플랑드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그는 잘생긴 사신처럼 보였다.
어차피 닥칠 일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어오긴 했지만 너무 빠르다. 한조의 얼굴은 희게 질렸다. 이제 겨우 걸어 다닐 만한데 또 그만큼 피를 뽑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걱정 마라.”
한조의 생각을 읽은 듯 일리야스가 말했다.
“그때만큼 요구하지는 않을 테니.”
여인들이 앞뒤로 달라 들어 한조의 몸을 붙잡으며 속삭였다.
“잠시만 참으면 된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를 절절하게 느낀 몸은 뻣뻣하게 굳어 협조를 거부했다. 한조는 저도 모르게 새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일리야스!”
“말이 짧다.”
일리야스는 칼을 빼어들더니 가볍게 옆으로 그러쥐고 한조의 목덜미를 가누었다. 눈이 마주치자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긴다. 꿈같이 아름다운 미남자의 얼굴을 보니 그가 왜 자신을 미왕이라 칭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처럼 아름다운 미남자의 눈동자는 북극의 한설처럼 차갑기만 하다. 처음의 달콤함은 사라져버리고 냉정한 눈동자에 마음까지 굳어버린다.
아름답지만 채찍에 감겨 있고, 빛이 있지만 어둠도 깊다. 그는 작은 짐승의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을 수 있는 사내였고 봄에 난 싹을 짓밟아버리는 사내였으며 물가의 개구리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내였다.
어떻게 찔러야 할지 가늠하던 칼날이 스르르 아래로 미끄러져 손목을 잡았다. 뿌리치려 했으나 강하게 구속되었다. 돌덩이처럼 뻣뻣하게 굳은 한조는 손목에 칼이 꽂히는 순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널브러졌다. 도를 넘은 긴장이 한 순간에 풀리고 피가 뚝뚝 흘렀다. 
순식간에 기진맥진해진 한조는 덜덜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는 사내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옅게 푸른빛이 든 듯한 그 눈 속에는 공포에 질린 자신의 얼굴이 있었다.
이윽고 일리야스의 얼굴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선혈이 떨어지는 한조의 손목을 핥았다. 요사스러운 미모의 얼굴이 사라지고 깊이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촉촉한 한숨이 손목을 타고 올라오며 흐르는 피를 싹싹 핥을 동안 한조는 고개를 외면하고 손끝만 흠칫거렸다. 
“아아.”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일리야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몽롱하게 젖어 있다. 광대뼈의 아래, 턱의 부드러운 아래쪽에, 이마와 눈가에 붙어있던 어두침침한 기운이 스르르 사라지고 새살이 돋듯이 밝고 투명해졌다.
“하아.”
만족스런 한숨이 사내의 입술사이로 흘러나왔다. 훌륭한 식사를 마친 듯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한조는 질린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마치 아름다운 사내에게 손목을 잡힌 것이 아니라, 불한당에게 사로잡힌 처녀처럼 한조의 얼굴이 끔찍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다.”
한조의 표정을 확인한 일리야스는 무심하게 한조의 뺨을 갈겼다. 갑자기 뺨을 얻어맞은 한조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인고 싶어 노려보려는데 이미 그는 저만치 멀어지고 없다. 더 이상 한조에게는 아무런 볼일도 남아있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남겨진 한조는 얼얼한 뺨을 부여잡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멋대로 상처를 내고 피를 빨더니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며 때리고는 도망가 버렸다. 낮도깨비를 본 기분이 든다.
“방금 왔다 간 사람이···일리야스님이 맞나요?”
한조는 하도 어이가 없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맞다.”
여인은 한조의 손목에 피가 잘 멎는 약초를 붙이며 대꾸했다. 
“저 분이 바로 완전한 모습으로 돌아오신 일리야스 전하시다.”
“그분이 완전해지셨다면.”
한조는 아직도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 쥐었다. 얻어맞은 뺨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
“내가 알던 일리야스님은 어떻게 된 거에요?”
“아마도 전하의 속에서 죽어버렸겠지.”
그렇게 말한 여인은 밖으로 재빨라 나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한조는 물끄러미 손목을 바라보았다. 괴물 같던 얼굴로 천진하게 웃던 일리야스의 얼굴이 그 위로 지나간다. 그가 막연하게 말했던 경고들은 바로 지금을 의미하는 것이었나 보다.
“병신 새끼.”
저도 모르게 툭 욕이 튀어나갔다.
“나만은 다치게 하지 않겠다더니···지가 죽어버려?”
여인은 저도 모르게 정답을 말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일리야스가 ‘돌아온’ 것이지만 한조에게 그것은 ‘죽은’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눈물이 흘러나오고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한조가 알던 일리야스는 죽어버렸다. 새롭고 아름다운 일리야스 속에서, 그 시체 같은 면상을 가진 일리야스는 죽어버린 것이었다.
지켜주겠다고 약속하고 정답게 입맞춰주고 자신을 사랑하라 어눌하게 강요하던 일리야스는 죽었다. 그것이 너무 슬퍼서 한조는 훌쩍훌쩍 눈물만 흘렸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친구의 죽음도 한조는 마음껏 슬퍼할 수가 없었다. 괴롭고 슬픈 나머지 하루종일 침대에서 울고만 싶건만 새로운 일리야스는 한조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때문에 한조는 매일같이 새 일리야스와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여야만 했다.
“내놓아라.”
그렇게 요구하는 일리야스의 얼굴이 어찌나 팽팽하고 매끈거리는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토가 쏠렸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뭘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인가. 한조는 태어나서 저렇게 못된 인간은 처음 보았다.
아침이 되면 한조는 여인들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한다. 그러면 곧 식사가 대령되고 맛있는 고기와 갓 구운 빵을 소량 섭취한다. 그리고 나면 역시 여인들의 도움을 받아 부드럽고 통풍이 잘 되는 좋은 옷을 입는다.
대충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일리야스가 온다. 사람을 봤으면 응당 잘 잤느냐, 좋은 아침이다, 밥은 먹었느냐 인사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는 늘 똑같은 말로 사람의 기분을 짓밟기 일쑤였는데 그것인즉,
“내놓아라.”
저 한마디였다.
며칠 일리야스를 겪다보니 한조도 이제 어지간히 그에 대해 파악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한조에게 그는 정말 가정교육 제대로 못 받은 미친놈일 뿐이었다.
안하무인, 독불장군, 방약무인에 유아독존. 이 모든 고사성어가 모두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내놓으라지 않느냐.”
차디찬 얼굴에 한쪽 눈썹을 길게 치켜뜨며 일리야스가 언짢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미인의 손이 이쪽을 향하지만 다른 쪽 손에는 잘 갈아놓은 칼이 들려 있으니 어찌 흔쾌한 마음으로 응하겠는가.
“안내놓으면 목에 구멍을 내주겠다.”
협박하는 솜씨까지 일품이다.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저렇게 말하니 절로 등골이 오싹해진다. 모르긴 몰라도 사람 여럿 잡은 전적이 있을 것이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하지만 그거 뭐래건 간에 한조의 반응은 딱 한가지였다. 그것은 일리야스에 맞먹을 정도로 쌀쌀맞은 거절의 말로.
“싫습니다.”
였다.
우연히 여인들이 하는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일리야스를 두고 벌꿀 같은 왕자님이라느니, 세상에 다시없을 미모라느니, 꽃보다 화려하고 해보다 눈부신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있었다.
한조역시 남자인지라 아름다운 사람이 좋았다. 하지만 그 벌꿀 같은 왕자님이자 꽃보다 화려한 사람의 속에는 죽어버린 일리야스가 있다. 벌꿀은 고사하고 벌똥처럼 생긴 놈이지만 그 얼굴만 떠올리면 가슴이 슬픔으로 먹먹해져와 도저히 일리야스의 미모가 눈에 차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피를 빨아먹고 변신한 요괴처럼 느껴져 마음이 들뜰 이유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그 미모가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알겠지만 한조는 그에게서 전혀 인간적인 면모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인간미 없는 아름다운 얼굴을 구경하려거든 마네킹을 보면 더 좋다는 것이 한조의 생각이었다.
‘저건 그냥 얼음이지.’
한조는 속으로 생각했다.
‘예쁘게 생긴 얼음.’
최소한 옛날의 일리야스는 인간적이었다. 비록 생긴 것은 인간과는 백만 광년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그에게서는 한조를 아끼는 마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일리야스를 죽이고 태어난 새 일리야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꽃 보다 아름다웠지만 향기 없는 꽃이었고 벌꿀처럼 달콤해 보이지만 정작 맛은 없었다. 아니, 맛은커녕 한 번 맛보면 혀가 얼얼해질 얼음일 뿐이었다.
‘심장이 없는 남자다.’
한조는 자신의 손에 가차 없이 칼을 꽂는 일리야스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름다우면 뭐하나. 심장이 없는데.’
한조가 차갑게 거절의 말을 하면 그 뒤는 정해진 대로였다.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는 한조를 여인들이 앞뒤로 껴안고 움쩍달싹 못하도록 내리누른다. 그러면 일리야스가 칼로 한조의 손목이나 팔목에 상처를 낸다. 피가 솟구치고, 그가 그것을 먹는다. 그러면 끝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손에 칼을 대는 행위는 아무리 자주 당한다 해도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다. 겉으로는 냉정한 태도로 싫다고 대거리를 하나 속으로는 두려워서 오금이 저렸다.
칼이 피부의 여린 살갗위에 겨누어지고, 깊숙이 묻어있는 푸른 혈관을 싹둑 잘라내어 피를 콸콸 뿜어내게 할 때마다 온 몸에 소름이 쫙 돋고 식은땀을 한 바가지씩 흘린다. 
날로 생살을 헤집으니 너무도 아프다. 하지만 아픈 것보다 칼날을 겨누는 바로 그 순간이 죽도록 두려웠다. 한조가 제대로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그것뿐이었지만, 그 하나만으로 한 달 치 스트레스를 순식간에 받는지라 의식이 끝나면 기절할 만큼 힘이 들었다.
“이것 놔!”
뿌리치면 뺨을 때리고, 발로 차면 복부를 짓밟는다. 아무리 애원해도 일리야스와 여인들은 아무 느낌이 없는 모양이었다. 한조는 빌어도 보고 협박도 해보고 욕도 해보았지만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조는 자신의 비명소리가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승이 아무리 애원하며 울어도 사람의 귀에는 그저 개 짖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쟁기질에 고통 받는 소가 음메 울고, 멱 따인 돼지가 꿀꿀 외치고, 목 잘리는 닭이 날개를 푸덕대고, 이한조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통스런 몸짓을 한다. 그것들과 자신이 다른바가 뭐가 있는가. 저 냉혈한들에게는 모두 똑같이 보일 것이다.
“하지 마.”
피에 젖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운다. 하지만 잔인한 일리야스는 웅크린 두 팔을 빼앗아 입술을 대고 쭙쭙 빨아올렸다.
“하지 말라고.”
일리야스는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표정으로 한조를 내려다보더니 잠자코 자신이 할 일을 했다.
그의 식사가 끝나면 여인들은 한조의 상처에 부지런히 약을 발라주었다. 그것들은 꽤 효과가 있어 한조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상처가 아문다 해도 새 상처가 생기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매일같이 칼질을 당하니 성한 부위가 남아나지 않았다.
고기.
그들은 한조를 고기로 보고 있었다. 조각조각 잘라서 피를 내도 괜찮고 멋대로 죽여도 괜찮은 가축과 마찬가지로 한조를 보고 있었다.
하찮은 자존심이고, 감금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지만 자존심도 없는 것은 아니다. 얌전히 앉아서 ‘제 몸의 피가 전부 소진될 때까지 날 먹어줍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사육되는 동물 따위가 아니었다. 목욕을 시켜주는 여인의 시중을 받고 맛있는 음식을 대령 받지만 한조는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알고 있었다.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디찬 분노가 치밀고 그것은 칼에 찔릴 때마다 더더욱 크고 강한 응어리가 되어 가라앉았다.
사람이 독기를 품으면 못 할 짓이 없어진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주었던 사람을 잃고, 한조는 가슴속에 독을 품었다. 당연히 한조의 반항은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고 시식은 횟수를 더할수록 서로에게 힘든 싸움이 되었다.
찔리고 또 찔린 손목에는 더 이상 칼로 찌를 곳이 남아있지 않았다.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한조의 손목과 팔은 피투성이였다. 붕대를 감지 않은 곳이 없고 시커멓게 딱지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날의 반항은 유달리 심했다. 두 여인이 억세게 조이며 한조를 압박했지만 한조는 거품까지 물어가며 반항했다.
칼날이 노리는 곳은 한조의 허벅지부근이었다. 살집이 많고 크게 상처를 입는다 해도 목숨과 관련이 없는 곳. 일리야스도 여인들도 한조를 제압하느라 몹시 애를 먹었다. 칼을 들고 있는 이상 잘못 치기라도 했다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사람 마음이란 또 희한해서, 아예 포기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끝날 것이, 격렬하게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더더욱 다가올 그 순간이 무섭고 두려워진다.
마침내 바지가 벗겨지고 일리야스의 칼날이 허벅지의 보드라운 살을 썰기 시작했을 때였다. 한조는 저도 모르게 뻥 발을 뻗었고 그것은 일리야스의 콧등에 정면으로 맞았다. 순간 일리야스도 여인들도 어안이 벙벙하여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한조는 그 틈을 타 냅다 달려 나갔다. 혈향이 끼치고 부드러운 새털 이불은 피범벅이 되었다.
피가 흐르긴 흘렀다. 그러나 그것이 일리야스의 피라서 문제였다.
일리야스의 검은 눈동자가 새까맣게 굳어졌다. 원래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살기가 더해지니 박력이 넘쳤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한조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이불로 온 몸을 둘둘 감싸고 있던 한조는 앞으로 벌렁 나자빠졌다. 여인들이 쏜살같이 달려와 한조의 상체를 잡았다.
“아파!”
한조는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한조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로 문을 열더니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한조로서는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감격의 첫 외출이었나 전혀 즐겁지 않았다. 아니, 즐겁기는 고사하고 두려워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무슨 짓이야! 놔, 이 미친놈아!”
일리야스는 한조를 끌고 지하로 지하로 내려갔다. 어두침침한 계단을 머리채를 잡힌 채로 질질 끌려들어간다. 고개를 아래로 숙인채로 계단을 내려가려니 숨이 막히고 허리가 부서질 듯 아팠다.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일리야스가 그대로 걸어갔기 때문에 한조는 머리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맛보았다.
좁고 긴 계단을 우당탕탕 몸으로 부딪히며 내려가니 온 몸에 멍이 들었다. 잘못 부딪쳤는지 다리가 징징 울렸다. 급한 숨소리가 사방을 쩌렁쩌렁 울리고 일리야스의 발소리는 너무도 명쾌하다. 
망설임 없이 한조를 아래로 잡아끄는 우악스런 손가락. 그 손이 주던 감각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감촉도 알고 있었다. 한조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저런 놈에게 굴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허세를 부리는 것도 거기까지. 막상 지하의 밑바닥에 도착하자 얼굴의 모든 피가 발끝으로 도망가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에 피가 모자라서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훅 끼치는 지독한 혈향.
그리고 사방을 쩌렁쩌렁 울리는 끔찍한 신음소리.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한조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계단을 내려온 것인지 지옥으로 내려온 것인지 헷갈리는 표정이었다.
눈구멍만 뚫어놓은 두건을 뒤집어쓴 사내들이 채찍과 칼을 들고 사방을 어슬렁거렸다. 그들이 누군가에게로 다가갈 때마다 귀를 집어 째는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한조는 거대한 청동의 황소를 보았다. 그것은 고개를 바싹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형상으로 정 가운데에 버티고 서 있었는데 그것의 속에서는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황소의 아래에서 지지는 큰 불 때문이었다. 산 채로 사람을 끓이는 고문 기구였다.
절절 끓는 황소의 옆에는 거대한 도르래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뼈밖에 안 남은 남자가 매달려 있었다. 남자의 팔은 등 뒤로 묶여 있었고, 그 팔에는 또 납으로 된 무거운 추가 달려 있었다. 남자가 고통에 못 이겨 끙끙댈 때마다 쇠붙이에 달려 있는 작은 고리에서는 맑은 소리가 나서 사방을 잘랑잘랑 울렸다.
“매달아놓기.”
옆에서 일리야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저놈의 몸은 이제 곧 두 조각으로 찢어질 것이다. 봐라. 벌썩 팔의 뼈가 빠지고 있다.”
그 말에 한조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다고 해서 더 나은 것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석회가 섞인 물을 코와 귓구멍에서 뿜어내는 한 무리의 사람들 뒤로 염소 두 마리가 서서 나란히 한 여자의 발바닥을 핥고 있었다. 염소가 혀를 사용할 때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뒤로 꺾어댔다.
“포트로(potro).”
일리야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쉼 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를 가리켰다.
“저 벌거벗은 남자를 조르는 끈은 점점 더 강하게 죄어올 것이다. 그의 뼈가 드러날 때까지.”  
한조는 다시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일리야스가 한조의 모가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토카(toca). 저 여자의 목구멍에 밀어 넣어진 린넨이 보이느냐? 그것이 충분히 젖어 있는 것도 보이느냐? 저 여자는 곧 익사 직전의 순간까지 가게 될 것이다.”
린넨을 밀어 넣은 여자가 울컥울컥 물을 게워내려 했지만 고문관은 더 많은 물을 부었다.
“그리고 저것을 봐라, 한조.”
일리야스는 한조의 고개를 잡고 한 구석을 향하게 했다.
“재미있는 것을 보게 될 테니.”
한 남자가 벌거벗은 채로 틀에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의 배에는 속이 깊은 접시가 뒤집힌 채로 놓여 있었는데 그 속에서는 간혹 찍찍, 하는 소리가 났다.
고문관이 다가와 접시에 불을 놓자 이윽고 접시의 온 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쥐들은 뜨거운 접시를 피해 갈팡질팡 하다가 곧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말랑말랑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잠자코 있던 남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발악을 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사방에 피가 튀고 쥐들은 남자의 창자까지 내려가 있다. 그는 산채로 배가 파 먹히는 고통을 맛보아야만 했다.
사방에 비명이 가득하고 전신에 피와 고통이 있다. 한조는 넋이 나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역청에 담근 실로 네 코에 구멍을 뚫어줄까?”
아름다운 얼굴이 눈 안 가득 들어왔다. 그것은 한조의 얼굴을 다정하게 만져주었다.
“갈비뼈가 내려앉을 때까지 압사시켜 줄까?”
한조는 덜덜 떨며 일리야스를 올려다보았다. 녹을 듯한 미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걱정마라. 죽을 때까지는 하지 않는다. 약속하지. 그 전에 멈추어 주마.”
한조의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일리야스가 뺨에 쪽, 키스를 하며 눈물을 핥아 주었다. 
“울지 마.”
다정한 위로의 말이건만 점점 더 많은 눈물이 났다.
“울지 마, 한조야.”
“끅, 끄윽.”
한조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말았다. 지금까지 받은 스트레스와 공포가 일순 폭발한 것이었다. 
일리야스도 한조와 함께 주저앉아 한조의 눈물방울을 전부 핥아 주었다. 선홍빛 혀가 속눈썹을 싹 훑고 지나가고 그것은 눈알에도 살짝 닿았을 정도로 거리낌이 없었다.
히스테릭하게 울어 젖히던 한조도 이제 그만 눈물을 멈추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터진 둑처럼 쏟아지는 울음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투명한 눈물방울이 펑펑 쏟아져 일리야스의 혀끝에서 사라졌다. 분하고 원통하면서도 끝내 일리야스를 밀어내지 못한 것은, 눈앞의 남자가 죽을 만큼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제 한조는 자신의 처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저 고문 받는 이들. 그들과 자신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울다가 울다가 일리야스 쪽으로 넘어진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는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는 죽도록 울기만 했고, 깨어보니 자신의 침대 위에 고이 뉘어져 있었던 것이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보면 누군가의 품에 안겨 그 길고 긴 계단을 도로 올라가던 장면이 떠오르는 듯도 했다. 
두 손을 쫙 펼치고 새로 상처 난 곳이 없나 살펴보았지만 새 상처는 없었다. 그날 하루 일리야스는 한조를 먹지 않고 넘어가 주었던 것이다. 하도 울어대니 귀찮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불쌍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날 하루는 무사히 넘어갔다는 것이 중요한 한조였다.
안도의 한숨을 깊이 내쉬며 한조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가슴속이 설렁한 것이 바람이 든 듯 하다.
“위험했어.”
한조는 무릎으로 고개를 미끄러트렸다. 극심한 자괴감과 혼란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정말로 위험했어······.”
그날 이후 한조에게 새로운 병이 하나 생겼다. 매일 칼에 찔리는 일 때문에 히스테리 증세는 이미 갖고 있었지만 한 순간에 극진한 힘을 소진하기 때문에 최소한 밤에는 잘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다. 눈을 감으면 쥐에게 내장을 갉아 먹힌 남자의 비명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너무도 끔찍한 영상에 한조는 심한 쇼크를 받았던 것이다. 
평화주의자인 그는 어릴 때 친구들하고도 잘 싸우지 않았다. 누군가에 의해 다치는 것도 싫고, 누구를 다치게 하는 것도 싫었다. 길에서 불량배를 만나면 돈 다 주고 얌전히 집까지 걸어가는 쪽을 택했고, 친구들이 학교의 명예다 어쩐다 하며 다 싸우러 갈 때도 뒤에서 경찰에 신고를 했다.
유일하게 주먹을 휘둘렀던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짝사랑했던 옆 학교 은주가 길거리에서 희롱을 당하고 있을 때 쫓아가서 싸웠던 때뿐이었다. 물론 불량아들은 한조를 가뿐하게 짓밟고 지나갔지만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스스로 주먹을 들었던 기억은 그 때 뿐이다. 피라면 남의 피고 내 피고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내 피는 죽도록 자주 보고 있지.’
한조는 다시 침대에 누우며 피식 웃었다.
‘평생 볼 피를 지금 다 보네.’
미소는 자조적으로 일그러지며 한쪽 입술 귀퉁이를 타고 흉하게 흘러내렸다.



21~23편
일리야스는 그로부터 삼일이 지난 뒤에 나타났다. 그간 식사도 잘하고 잠도 잘 잤는지 얼굴에 빛이 돌고 쌩쌩한 모습이었다. 허리라인이 잘록하게 들어간 블리오와 금색 허리띠, 어깨에는 담비털로 트리밍을 한 치렁한 망토를 두르는 채였는데 눈썰미가 없는 한조도 그가 무척 세련되고 잘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 비해 한조는 잠도 못 자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푸석푸석한 상태였다. 눈 밑은 푹 꺼지고 입술은 갈라진데다 이곳의 이상한 의료상식으로 인해 한조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여인은 이틀간 목욕을 금지했다. 덕분에 온 몸이 땀에 푹 젖어 몰골이 사나웠다. 안 그래도 말라가는데 특유의 청결함마저 잃어버리자 볼품이 없었다. 일리야스가 보고 심기가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도 당연했다.
“밥을 잘 먹지 않는다지?”
한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일리야스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먹기 싫어서 안 먹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의욕이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뱃속이 산채로 파 먹히던 남자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핏물이 살짝 비치는 고깃덩이 위로, 노른자가 터진 달걀 요리 위로, 칼집이 난 빵 덩이 위로 그 얼굴이 시시때때로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다음은 너야.’
한조는 도저히 그 얼굴과 마주하고 팔자 좋게 음식을 뜯어먹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한조가 고개를 외면한 채로 물었다.
“거기 있던 고문 받던 사람들···무슨 죄를 지어서 거기로 간 건가요?”
“세금을 내지 않았다.”
일리야스는 딱 잘라 말했다.
“겨우···그런 이유로?”
“누진세, 비례세, 양도세, 그리고 분기마다 봉납해야하는 각종 조세. 외국인의 통행세를 떼어먹은 관리.”
여러 가지 세금의 종류에 대해 줄줄이 읊은 일리야스는 깔끔하게 덧붙였다.
“우리가 생존하는 방법이니 외국인인 네게 이해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그렇군요.”
한조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럼, 모두 죽게 되나요? 그 배를 파 먹힌 남자처럼?”
“그 남자는 좀 다른 경우였다. 그는 교후의 첩자로 이 성에서 활동하다 덜미를 잡혔지.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재판도 없이 죽이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구나.”
한조는 조금 안심이 되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파이, 첩자.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살아 나갈 수 있다는 말이구나.
“······만.”
하지만 일리야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조금 다르지. 그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뭐? 왜요?”
“나를 보았기 때문이지.”
“당신을 본 게 뭐가 어때서요?”
“이런 불쌍하고 어리석은 아가야.”
일리야스는 피식 웃었다. 그는 매끈하게 정돈된 손가락으로 한조의 턱을 받쳐 들며 대답했다.
“나는 공식적으로 사망한 상태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나는 절대로 살아있어서는 안된단 말이다. 그런데 너를 그곳으로 데려가느라 나는 거기 있는 사람 모두에게 내 얼굴을 노출하고 말았다. 그들이 풀려난 후, 나의 라이벌에게 조르르 달려가서 은화 몇 닢에 나를 팔아넘기지 않는단 보장이 있느냐.”
한조는 어이가 없었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니고, 자기가 제 발로 내려가 놓고, 그 죄를 남한테 씌우다니.
“이 미친! 모두 당신 탓이잖아!”
“아니, 네 탓이다.”
일리야스는 한조의 턱을 툭툭 치며 슬슬 이 대화가 지루해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두 너 때문이란 말이다. 네가 어리석기 때문에. 죽일 수 없는 너 대신 그들이 네 죗값을 치르게 된 거다.”
그리고 그는 이내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한조의 얼굴을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리야스가 우아한 손동작으로 망토를 벗자, 뒤에서 여인들이 다가와 한조의 팔을 각각 잡았다. 일리야스는 과도를 손에 쥐고 가볍게 공중을 내리그었다. 어떻게 그어야 적당히 피를 뺄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럼 하나만 더 물을게요.”
한조가 고개를 들었는데 눈동자가 증오로 불타는 듯 했다.
“내가 거기로 간 이유는?”
“불복종의 죄.”
일리야스가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한조는 일리야스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숨결은 따뜻했다. 팔을 잡아오는 손에서도 전과 달리 온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심장은 얼음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한조는 가슴이 아파 고개를 외면했다.
식사를 마친 일리야스는 떠놓은 물에 손과 얼굴을 닦아 깨끗하게 만든 다음 밖으로 나갔다. 여인들 중에 한 명이 그를 따랐다.
“이것을.”
그녀는 일리야스가 벗어놓은 겉옷을 들고 있었다. 부드러운 검은담비의 털을 두른 고급 망토였다.
“아, 그래. 이걸 잊을 뻔 했군.”
일리야스는 망토를 어깨에 걸며 웃었다.
“아끼시는 물건인가 보군요, 전하. 요즘 자주 두르고 계십니다.”
“그래.”
일리야스는 털에 얼굴을 비비며 대꾸했다.
“이 망토를 두르면 기분이 좋다.”
“그렇습니까?”
여인은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털에 뺨을 비비던 일리야스가 힐끔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왜 가지 않지? 네 일은 끝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그럼 전 이만······.”
여인의 뒷모습을 일리야스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까운 년이로다. 무례하게도 나를 간파 했다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지 않는가. 역시 대관식의 날에는 저것을······.”

“대관식의 날이 다가오는구나.”
교후 사무엘은 자기 키의 세배가 넘는 로브를 걸치며 웃었다. 백금발이 물결치며 검은 로브 위에서 호사스럽게 빛났다. 검은색이라고 하나 금실로 수를 넣고 붉은 보석을 달아 만든 것으로 끔찍할 정도로 비싼 것이다. 단조롭게 질질 끌리기만 하는 디자인인지라 자수와 보석을 달아 위엄을 과시하는 용도였다.
왼손에는 홀을 들고 오른손에는 보주를 들었다. 그것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어린애 주먹만 한 진주와 500개가 넘는 루비, 사파이어와 에메랄드가 빼곡히 박혀 있었다. 거대한 로브를 질질 끌면서 이 홀과 보주를 들고 입장해야 하는 것이다.
“교후님, 여기 계셨군요.”
그때 신전의 재무담당관이 나타나 사무엘을 찾았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있던 사무엘은 설핏 눈살을 찌푸렸으나 원래의 아름다운 미소를 되찾았다.  
“왜 그러지요, 신관님?”
재무담당관은 사무엘에게 빼곡히 휘갈긴 서류더미를 내밀었다.“
“대관식에 쓸 예산안입니다. 장미꽃 오십 수래, 백합화 오십 수레, 오린 색종이 스무 수레와 신관들에게 입힐 옷을 단체 주문한 것만 사백 벌, 닭과 백조, 오리, 돼지, 소. 끌어올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끌어보았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수입 산을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특히 향신료 같은 경우에는······.”
“그만.”
사무엘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아까 한 말을 다시 해보세요.”
“······수입 산을···쓴다는 부분이요?”
“아니요. 장미가 오십 수레, 백합화가 오십 수레 부분 말입니다.”
사무엘은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그것들을 백 수레씩 주문했습니다.”
“아, 그것은.”
재무담당관은 당황하여 서류를 흘렸다.
“교후님도 아시다시피, 교후님 대관식이 있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바로 국장이 있었지 않습니까. 거기서 다시 대관식을 치르려 하니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관님. 저는 백 수레가 필요합니다.”
사무엘은 양보하지 않았다. 그 역시 빼곡하게 적혀 있는 저 숫자들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신성한 그란사르스. 신의 축복을 받은 그란사르스. 하지만 그란사르스의 내부는 썩어 들어간다. 
악시아 신황은 정신병에 걸렸고, 그 뒤를 이을 후사는 모두 불운하게 사망하였거나 성혈의 저주로 죽었으며 유일한 후계자 일리야스 왕은 불에 타 죽었다. 황가의 카리스마가 흔들리고 그 틈을 타 귀족들이 득세하니 사방에 분란이 일고 백성은 도탄에서 허덕인다. 국고는 비었는데 중요 행사가 겹치니 점점 더 많은 세금을 걷게 되고, 더더욱 사정이 안 좋아져, 이제는 신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강력한 통치자가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사무엘이 천년 역사를 엎고 섭정승에 올라 앞으로 계속 그 자리를 굳혀나가려면 강한 통치력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날리는 색종이, 오만송이 꽃, 웅장한 음악과 외국의 손님들. 그들의 축하와 박수, 환희. 처음으로 신의 사자가 황제가 되는 날이고, 신권과 황권이 합해지는 날. 스스로 황위를 찬탈하여 황제의 관을 머리에 얹는다. 신전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지고, 백색궁과 흑색궁의 지배자가 같아진다. 사무엘은 친황제파와 백성들, 외국인들에게 그 통치력과 권위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약속합니다. 이후로는 쓸데없는 예산을 줄이고 빈곤자들의 누진세를 감축하겠습니다. 하지만 대관식은, 하늘의 신성하신 그 분이 황제가 아니라 우리 편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돈의 힘을 빌어서라도.
그렇게 말한 사무엘은 로브를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사부작사부작 복도로 나갔다. 예배당을 건너가 장원을 마주하고 있는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간 사무엘은 마침내 목적하던 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삼엄한 경비병들이 교후를 알아보면서도 일일이 그를 불러 세워 신원을 확인한 끝에야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곳에는 열 명의 성전기사들이 칼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있는 것은······.
“이것은 곧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사장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황제의 관을 당신의 머리에 쓸 때 우리 신전들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천천히 황제의 관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것은 이 나라가 건국되었던 그때부터 오로지 검은 머리 위에서만 빛을 발해왔다.
황금의 띠를 머리모양에 맞게 엮어 올린 위로 그란사르스의 문장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를 가장 성스러운 자들이 무릎을 구부리고 기도하고 있다. 성결을 상징하는 진주가 빼곡히 테를 따라 둘러졌고 그 가운데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다이아몬드인 ‘심장’이 쳐다보기도 호사스러울 만큼 거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은은한 핏빛이 도는 다이아몬드는 왕관 전체 크기의 3분의 1정도나 되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오랜 세월동안 황권의 상징으로 이어져 왔다. 그란사르스의 황실을 증명하는 이 다이아몬드는, 실제 그란사르스 황제의 심장이 세월에 따라 변화한 것이라는 속설마저 도는 물건이었다. 초대 황제의 심장이 대관식의 날에 신황제를 재판하여 만일 그에게 황제의 자질이 없으면 그 머리를 쪼개버린다는 전설이 붙어 있었다.
물론 과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성혈의 저주가 기승을 부리면서부터는 살아남는 황손에게 황위를 물려주느라 급급했기 때문에 미신을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무지한 자들이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해가 되는 것도 아니므로 황실에서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천년의 역사 속에 검은 머리의 주인밖에 섬기지 않은 도도한 심장. 이제는 그 심장을 빛나는 플래티나 블론드의 물결위로 올려놓고 대관식을 치를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라 사무엘은 숨이 막혔다.
“마지막 날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약은 찾지 못했지만 이것만큼은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
기사들의 대답에 사무엘은 흡족하여 다시 밖으로 돌아나갔다.
대관식은 이제 이주일도 남지 않았다.


* * *


지하의 고문실을 본 이후 한조는 조금 더 순순하게 일리야스를 대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밤마다 그를 괴롭히는 끔찍한 영상들과, 그 고문실의 사람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조종하던 일리야스의 모습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몸이 움츠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한조는 일리야스가 오면 얌전히 두 손을 받쳐 든 채로 묵묵히 찔리기를 기다렸고, 찔린 후에는 그가 얼른 먹고 나가기만 기다렸다. 일리야스는 한조의 협조로 훨씬 빠르고 수월하게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는 강압적으로나마 존재하던 대화는 완전히 끊어져, 끔찍한 적막만이 흐르게 되었다.
일단 사방에 피가 튀고 비명이 울리던 상황에 비해, 겉보기에는 훨씬 깔끔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 좋다고 속으로도 한없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 한조의 반항이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거칠고 눈에 드러나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것은 잠잠한 바다 깊숙한 곳에서 부는 회오리바람과도 같았다.
한조의 검은 눈은 죽은 생선처럼 침침해졌으나 그 색은 더욱 깊어졌고, 가슴속에는 차디찬 응어리가 생성되었다. 진주조개의 상처처럼 흠 난 그것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무엇으로 변화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죽자.’
아무도 없는 구석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한조는 결의를 다졌다. 새까만 눈동자에 분노가 굼실댄다.
‘차라리 죽어버리자.’
고기가 되어. 정육점 갈고리에 걸린 죽은 고기가 되어 살아갈 바엔 차라리 죽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마음을 독하게 먹으니 즈려 문 입술 사이로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바싹 말라 아프지만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견뎠다.
죽으리라. 살이 통통하게 올라 저것들이 좋아하게 만들지는 않을 테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뼈만 바싹 남고, 피도 말라 비틀어져 네가 취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만들리라.
사람의 몸은 마음이 관장한다던가. 원래 그리 독한 구석이 없던 한조였는데 죽자 마음먹으니 정말로 오래된 꽃처럼 시들기 시작했다.
“왜 이리 말랐느냐.”
처음에는 이상을 눈치 채지 못했던 일리야스지만 매일 잡는 손이 뼈와 거죽 같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게걸스레 입술을 붙이고 피를 쪽쪽 들이키던 그는 곧 짜증을 내며 손을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은 표정으로 한조를 쏘아보았다.
“좀 먹어라. 이빨에 뼈다귀가 닿으니 기분이 나쁘다.”
‘누구 좋으라고.’
한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누구 좋으라고.’
“먹고 싶은 음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일리야스님.”
속이야 어떻든 겉은 공손히. 한조는 무릎을 꿇고 황송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딘가 모르게 건들대는 몸짓이었다. 비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일리야스의 표정이 더더욱 사나워졌지만 한조는 무섭지 않았다. 너희들한텐 내가 필요하다. 그것을 확실하게 알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보던 모라시니가 혀를 찼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이런 사소한 일에까지 신경을 써야 겠냐는 표정이었다. 
여인들은 황송해하며 허리를 굽혔다. 방 안 모든 사람들이 한조를 보며 짜증을 냈다. 하지만 한조의 마음은 그들과 달리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요란했지만 그것도 견딜 수 있었다. 작은 쾌감이 솟구쳤다. 처음으로 그들이 한조로 인해 곤란해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더 망가지는 복수지만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제기랄.”
일리야스는 초조한 표정으로 방을 나가버렸다. 멀찍이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종류별로 음식을 만들어라. 고기, 파이, 과자, 케이크. 종류를 가리지 말고 처넣어라. 그 중에선 먹고 싶은 게 있겠지.”
거기까지 말한 일리야스는 잠시 후 못마땅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는 과일을 좋아한다. 포도와 자두도 갖다 넣어라.”
그 말에 한조는 오래된 상처가 묵직하게 쑤셔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아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다 기억하는 주제에··· 한조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독기 가득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가 하얗게 될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내게 다정한척 하지 마라. 기억하는 척도 하지 마라. 나의 일리야스는 네 속에서 죽었잖아. 네가 죽여 버렸잖아. 그러니까 날 생각해주는 척 하지 마라. 난 네가 너무도 밉다.
‘안됐지만 전하.’
한조는 사납게 웃었다.
‘아무리 많은 음식을 갖고 와도 난 먹지 않아.’
그 이후로도 한조는 계속 음식을 거부했다. 어떤 산해진미를 들여와도 한조는 먹지 않았다. 
일리야스는 한조가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들이민 음식 접시를 한조는 아무 말도 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온 몸이 기운 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눈빛만은 살아서 절절 끓는다. 음식하고 원수 진 사람 같았다. 왜 먹지 않냐고 물어보면 하는 말이 가관이다.
“배가 부릅니다.”
둘 사이의 긴장감이 끊어질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한조의 말에 일리야스는 코웃음을 쳤다. 지금 네가 내게 농을 거는 거냐? 그러나 한조는 웃지도 않고 가만히 증오만 불태웠다. 이윽고 일리야스의 빈정거리던 입매는 무겁게 내려앉고 눈빛이 점차 사나워졌다. 그러면 한조가 다시 대꾸하는 것이다. 예, 일리야스님. 제가 일리야스님을 웃기려는 겁니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조의 머리위로 쟁반이 날아갔다. 스프와 빵과 꿀 덩어리가 머리위로 부어졌다. 하지만 한조는 눈도 깜빡 않고 일리야스를 노려보기만 한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다는 표정으로 일리야스가 차갑게 일별했다.
“멋대로 해라. 언제까지 견디나 두고 보자.”
“네, 일리야스님.”
그리고 한조는 일주일을 견뎠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기진맥진한 목구멍에서 새어나왔다. 두 팔과 다리는 힘없이 널브러져있고 고개는 가누지도 못한다. 눈은 뜨고 있지만 뭘 보는지 마는지··· 초점이 흐리고 시선이 흔들렸다.
상처투성이의 팔목에는 붕대를 친친 감아놓았는데 그 꼴이 지독하다. 마른 우물처럼 드러난 쇄골이 오르락내리락. 흉부도 거칠게 위 아래로 움직이며 폐에 공기를 불어넣지만 아무리 공기를 넣어준다 해도 그가 필요한 것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한조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물. 단 한모금의 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히···히이······.”
한조는 켈룩켈룩 기침을 하며 숨을 내뱉었다. 이제는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꼬르륵 소리도 더 이상 나지 않았고 목구멍도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들었는지 물을 넣어달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아니면, 그들이 계속 신호를 보내는데 한조가 캐치를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조는 지금 어떤 종류의 생각도 할 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나흘은 자의로 굶었지만 나머지 삼일은 자의가 아니었다. 진수성찬을 하여 들여보내던 식단이 오일 째 되던 날 딱 끊어졌다. 그들은 아무도 이 방에 들어와 보지 않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문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선 한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한조가 언제라도 ‘물을 달라’ 요구를 한다면 바로 달려와 한조의 입술에 물을 축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조는 입도 뻥긋 하지 않았다. 사실 오일 째가 되자 더 이상은 못하겠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는데 저쪽에서 이렇게 나오니 더더욱 오기가 생겼다.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시간도 지나가고 이제 한조는 정말로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다. 의식이 깜깜해지고 코에서 더운 김이 나왔다. 이곳에 온 뒤로 매일 매일이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이었지만 지금은 죽음과 마주하다 못해 폭 안긴 상태였다. 
죽음은 한조의 콧속으로 작고 가느다란 갈고리를 걸어 넣어 한조가 숨을 쉴 때마다 그 끝에서 영혼을 살살 끄집어냈다. 얼마 안 가 이처럼 부서질 듯 연약해진 영혼은 죽음의 고리에 걸려 그 끝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한조는 입술 끝을 약간 들어 올려 웃는 표정을 지으려 했다. 최후를 마주하자 없던 여유가 생겼다. 이 얼마나 개 같은 죽음이란 말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와서 처음 보는 남자에게 피가 빨리다 죽다니···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다 새어나왔다.
‘하지만.’
한조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죽으면 일리야스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새로운 일리야스가 탄생하면서 옛날의 바보 같던 일리야스는 죽었다. 그 일리야스의 인격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저 일리야스의 맘속에 잠들어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깨끗하게 죽어버린 걸까.
죽었다면 그는 어디에 있는 건지······.
한조의 눈에서 소량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죽음을 앞두고 감정적이 된 모양이었다. 쌕쌕 숨을 내쉬며 한조는 다시 눈꺼풀을 끔뻑였다. 그래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입술로 오도록 만들었다. 살짝 짭조름한 맛이 나더니 눈물은 사라져버렸다. 한조는 다시 눈을 끔뻑여 보았으나 더 이상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사람이 죽을 때 보는 것이 주마등 이랬던가. 다시 시야가 어지러워지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엄마의 얼굴. 아빠의 얼굴. 일가친척들의 얼굴 뒤로 가영이, 나영이, 수미, 혜진이, 진아, 은미, 영혜 등등이 빠르게 지나갔다. 한조는 입 끝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서른한 번째 예진이까지 모두 세었다.
하지만 그 뒤로 일리야스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 것은 왜인지······.
‘저리가. 네 순서 아까 지나갔어. 내가 사랑했던 여자애들 얼굴 좀 보게 저리 좀 비켜봐.’
한조의 부탁에도 일리야스는 비키지 않았다. 기억속의 그는 한조의 무릎을 베고 편하게 누워있었다. 어느새 작게 코도 골고 있는지라 한조는 차마 비키지 못하고 몇 시간이나 그렇게 무릎을 제공해야만 했다. 다리가 아프고 온 몸이 쑤시는데도 차마 일리야스를 치우지 못했던 것은 왜일까. 그의 얼굴이 무서워서?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중에는 일리야스의 얼굴도 제법 괜찮게 보였다. 
피부가 지나치게 창백하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지적인 맛이 있었다. 눈이 지나치게 푹 꺼지고 그늘이 졌지만 병약한 귀공자의 품위가 있었다. 등을 어색하게 구부리고 다녔지만 노인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거만하게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것보다는 보기 좋았다. 글자를 하나도 몰랐지만 무슨 상관인가. 나도 모르는데.
‘아, 다시 눈물이······.’
한조는 눈을 끔뻑였다. 이 몸에서 수분이 나올 곳은 더 이상 없는 줄 알았는데 다시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방울이 더 크고 더 많이 흘렀다. 처음에는 입 끝으로 받아먹으려던 한조는 그냥 포기해버렸다. 먹어서 무엇 하겠는가. 죽음이 조금 더 빨라질 뿐인데. 
그 뒤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대체 어떻게 들어왔는지 파리 한 마리가 웽웽 소리를 내며 뺨에 앉아 있었다, 코에 앉았다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쫓아낼 힘도 없었다. 아니, 어차피 이제 쫓아낼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실력 없는 경주마처럼 가파르게 떨리는 숨이 끊어지면 파리는 한조의 입구멍이나 콧구멍을 통해 안으로 기어들어와 그 속에 알을 낳을 것이다. 곧 혀 위로 벌레가 끓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시 파리가 되고 또 알을 낳고···벌레가 되고······.
한조의 머릿속에는 알 낳는 벌레와 부화하는 곤충의 모습이 끝없이 재생되었다. 중간에 또 기절을 했던 것도 같은데 정신이 들자 또 그 영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목구멍을 기어 나오는 벌레···혓바닥 가득한 알 같은 것들을 말이다.
그때 문득 따끈한 입술을 건드렸다. 한창 벌레 따위를 생각하던 한조는 진짜로 벌레가 입으로 들어오나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따스하고 달콤한 것이 입 사이로 흘려들어왔고 한조는 그것을 받아마셨다.
그 감각. 사막처럼 말라버린 혀와 입술을 적시는 그 감각.
한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더 벌리고 그것을 받아 마시려 했다. 하지만 너무 힘이 없는 나머지 제대로 삼키기가 힘들었고 그것은 줄줄 아래로 흘러버렸다. 누군가 쳇, 짜증을 내더니 한조의 목덜미를 잡아 공중으로 끌어올렸다.
“읍!”
코끝에서 오락가락하던 죽음의 갈고리가 살갗을 확 긁었다. 한조는 반쯤 끌려 나갔던 영혼이 들어오는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눈을 둥그렇게 뜨자 되게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그것도 코앞에서.
“아웁!”
한조는 힘없는 손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한조의 반응을 시시하게 제압하며 계속해서 혀를 섞었다. 사나운 혓바닥이 진입해 들어와 한조의 혀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물을 부었다. 얼마나 억세게 구는지 며칠 만에 물 구경을 한 입안이 비명을 질렀다. 모래를 한 움큼 베어 물고 있는 것 같은데 물을 쏟아 부으니 아파서 눈물이 흐를 정도였다. 
버둥거려 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한조를 거칠게 벽에다 밀어붙이더니 공중에서 찍어 누르며 한조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허벅지를 처넣어 옴짝달싹도 못하게 했다. 
물과 함께 들어오는 혀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입만 열게 해준다면 내가 스스로 먹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일리야스는 막무가내였다. 아무리해도 그를 떨쳐낼 수가 없었다. 결국 한조는 반항을 포기하고 벽과 일리야스 사이에 꼭 눌린 채로 힘없이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몇 번이나 그 짓을 반복했을까. 어느새 갖고 온 물이 전부 바닥났는지 더 이상 일리야스는 물을 날아오지 않았다. 한조는 기진맥진하여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고급스런 비단옷을 걸친 귀공자의 모습이 보인다.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구더기와 파리의 영상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일리야스는 기묘한 표정으로 한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조는 이제 그만 내려달라는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러자 일리야스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지더니 갑자기 입술을 겹쳤다. 이제 물도 없는데 이이가 왜 이럴까··· 한조는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왜 입술을 빠는 걸까. 물도 없는 주제에.
일리야스의 혀는 난폭했지만 계속 거칠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한조의 멱살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한조의 자세를 조정하더니 고개를 가로 꺾은채로 깊숙이 침투해왔다. 반항은커녕 살아있는 게 용한 상태인 한조는 멍하니 당하고만 있었다. 반항이 없자 얼씨구나 좋다고 일리야스의 혀가 여기도 핥고 저기도 핥고 난리가 났다. 쭉쭉 빠는 소리 요란해지고 거친 숨결이 오갔다.
그러는 동안 한조는 굉장히 자세가 불편해졌다. 뒤는 딱딱한 벽이오, 앞은 벽보다 거대한 일리야스다. 거기다 일리야스의 허벅지가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로 바싹 들어와 있어 다리도 불편하고 모가지는 마음대로 꺾어져 아팠다.
게다가 힘이 너무 좋다. 아무리 굶어서 살이 빠졌다고 해도 청년 하나를 멱살만 잡아다 들어올려놓고는 어렵지 않게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한조는 그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갑자기 한조가 바닥으로 내쳐졌다. 아니 내쳐진 정도가 아니라 던져졌다는 표현이 옳았다. 침대 아래로 집어던져진 한조는 4개의 계단을 데구르 굴러서 바닥에 픽, 나자빠졌다. 약간의 충격에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조는 켁켁 기침을 하며 일리야스를 올려다보았다. 저 새끼가 미쳤나···하는 눈빛이었다.
일리야스는 묵묵히 한조를 내려다보더니 침착하게 계단을 내려와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는 두 여인이 음식을 들고 다소곳이 대기하고 있었다.
“저놈을 먹여라.”
언제 들어도 재수 없고 오만한 목소리로 일리야스가 명령했다.
“그리고 놈이 사술을 쓸 줄 아는 모양이다. 너희도 조심해라.”
“네, 전하.”
여인들은 공손히 예를 표한 후 안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쓰레기처럼 내팽개쳐진 한조는 어이가 없었다. 사술이라니, 무슨 사술? 내가 언제 굿하디?
여인들이 다가와 한조를 일으켜 세워주고 몸을 닦아주고 옷을 갈아입혀주었지만 한조의 표정은 계속 벙찐 채였다. 

강제로 물과 죽을 먹긴 했지만 그렇다고 한조의 싸움이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씹어 먹는 음식물을 소화할 수 있을 무렵이 되자 여인들은 한조에게 살이 듬뿍 찌는 음식들을 권했다. 하지만 한조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오만한 표정으로 여인들을 코끝으로 부렸다.
“이것도 안 먹어.”
“저것도 안 먹어.”
“맛없어.”
그것이 한조가 하루 종일 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이제 강경책에서 회유책으로 전법을 바꾼 모양이었다. 차갑던 얼굴에 빙글빙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한조가 만들어달라는 음식을 전부 만들어주었다.
돼지가 먹고 싶다고 하면 산돼지부터 멧돼지까지 전부 대령해 오고, 닭이 먹고 싶다고 하면 쪄낸 요리부터 볶은 요리까지 전부 대령해 왔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 와봤자 한조의 대답은 딱 위의 저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안 먹어.”
그리고 고개를 쌀쌀맞게 돌리면 여인들은 다시 다소곳하게 그럼 뭐가 먹고 싶느냐고 물어왔다. 그러면 또 한조는 주문을 했고 새로운 요리가 대령되면 기분에 따라 약간 맛을 보거나 또 안 먹겠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사실 속으로는 통쾌했다. 거 봐라. 내가 없어지면 제일 괴로운 것은 너희들이잖아. 나한테 이렇게 막대해봤자, 죽으면 너희들이 손해인 거잖아.
한조는 복수심이 들들 끓었다. 통쾌하고 희열을 느꼈다. 폭군처럼 날마다 밥을 엎고 갖가지 트집을 다 잡았다. 이것은 설익었다 이것은 기름이 많다 또 이것은 기름이 적다. 트집을 잡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인들은 군 말없이 음식을 해다 바쳤다.
한조의 피는 걸쭉했다. 몸은 말라 소년처럼 되었으며 얼굴은 볼 살이 쏙 들어갔다. 그렇다고 일리야스가 한조를 봐주는 적은 없었다. 그는 매일같이 자신이 취할 것을 받으러 왔다. 그가 돌아가고 나면 한조는 기세등등하여 날뛰었다. 잡아 죽일 것처럼 굴더니, 진짜로 죽어가자 저것들이 달려오지 않았는가. 그들이 우위에 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우위에 서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몇 안 되는 우리의 일꾼입니다.”
모라시니는 못마땅한 얼굴로 일리야스를 찾아갔다.
“저 버릇없는 것의 식사를 차렸다 버렸다 하는 것만 시키기엔 아깝습니다.”
“죽을 뻔 했잖는가.”
일리야스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것이 죽으면 나만 손해다.”
“그렇게 생각하시니 그것이 그렇게 느끼고 오만방자해지는 게지요. 은연중에 전하의 마음이 전달되어······.”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것이냐!”
일리야스는 버럭 짜증을 냈다.
“나는 바쁘다. 그놈이 펄펄하게 살아서 나한테 피만 주면 돼. 그러기 위해선 하루에도 열두 번 상을 차리던, 여자둘이 하루 종일 그놈 비위를 맞춰주건 전혀 상관없어. 알량한 자존심 들어주어라. 내가 복수를 마치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좋아. 단, 놈이 살아있어야 해.”
그렇게 말한 일리야스는 등을 돌리고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주술사들이 요구한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하나씩 되짚어보던 일리야스는 눈썹을 그러모으며 손끝으로 탁자를 탁탁 쳤다. 신경질이 많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전하.”
모라시니는 물러가지 않고 다시 말을 붙였다.
“제가 그놈을 손봐주어도 되겠습니까?”
일리야스는 눈만 돌려 힐끔 모라시니를 쳐다보더니 아무 흥미가 없는지 다시 서류로 시선을 안착했다.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는 일리야스가 허락한 것을 알았다. 모라시니는 공손하게 절하여 예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전하의 식사시간에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알았다.”
일리야스는 종이에 뭔가를 휘갈기며 빠르게 대답했다.
그날 저녁이 되어 일리야스가 한조가 갇혀있는 방으로 가니 먼저 온 모라시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에는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고 수십 개의 접시가 쌓여 있었다. 모두 오늘 한조가 물린 음식들이었다. 어떤 것에는 약간 손을 대었지만 대부분의 것에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 여기서 한조가 남긴 것은 모두 동물의 사료로 섞여나가거나 아니면 마구간지기들이 먹게 된다. 그런 천한 것들에게 주기에는 아까울 만큼 멋진 요리들이었다.
“전하. 말 안 듣는 가축에게는 자고로 매질을 하라 했습니다.”
일리야스는 무심하게 한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이미 한 차례 맞았는지 등이 헤져있었다.
“그래서 매질을 하니 어떻더냐?”
일리야스가 물었다. 모라시니는 고개를 저었다.
“뼈대가 소녀처럼 가늘고 몸집이 형편없어 때리는 족족 부러질까 겁이 납니다. 잘못하여 죽기라도 하면 우리는 또 그 장구한 세월을 어찌 기다리이까. 그래서 저것의 화만 부추기게 되었나이다.”
“그럼 이제 어쩔 테냐?”
일리야스는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완전히 관망하는 듯한 태도에 한조는 이를 세우고 일리야스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리야스는 탁자에 놓여있던 사과를 와삭 베어 물었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강제로 급식을 시켜볼까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요.”
두 여인이 한조의 겨드랑이를 잡자 모라시니의 기사들이 나타나 한조의 입을 벌렸다. 한조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싶어 얼굴이 새파래졌다.
“벌려라.”
모라시니는 탁자위의 빵 한 움큼을 찢은 후에 그것에 우유를 부어 걸쭉하게 만들었다. 한조는 눈을 옆으로 뜨고 그가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하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붙잡는 손이 너무도 강경해 움쩍도 할 수가 없었다. 짓눌러진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소리만 끙끙 흘러나왔다.
“먹어라.”
모라시니는 한조의 입술에다 빵과 우유를 부었다. 한조는 어푸어푸 소리를 내며 그것을 뱉어내려 노력했다. 한조가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모라시니는 또 빵과 우유를 가져와 부었다. 한조는 다시 혀로 밀어내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모라시니가 큰 빵 하나를 가져와서 그대로 목구멍에 박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한조는 비명을 질렀다. 빵이 너무 커서 삼킬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라시니는 막무가내로 목구멍을 찔렀다. 벌컥벌컥 소리를 내며 먼젓번에 부은 빵과 우유가 식도로 넘어갔다. 얼마나 먹었나 눈으로 가늠하던 모라시니는 이제 됐다 싶은지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 
잡는 손이 느슨해져 한조는 고개를 떨구고 숨을 몰아쉬었다.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옆에서 와삭, 하고 싱그러운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일리야스가 보였다. 그는 사과 한 알을 맛있게 베어무는 중이었다.
‘징그러운 놈.’
한조는 일리야스를 노려보았다.
‘모두 너 때문이야.’
“눈빛이 불손하다.”
어느새 모라시니가 돌아와 한조의 앞에 섰다. 저절로 움찔 몸이 굳어졌다. 다시 남자들의 한조의 턱을 잡아 좌우로 벌리고 모라시니가 뜨거운 덩어리를 목에다 처넣기 시작했다. 금방 구워낸 돼지 넓적다리다. 그것을 숭숭 썰어다 한조의 목에 넣고 있었다.
“아윽! 아웁!”
한조는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온 몸으로 요동치며 그 거대한 것을 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치 자신이 뱀이 된 기분이었다. 가장 넓은 부위가 식도로 넘어가는 순간에는 실신할 지경이 되었다. 그러고도 모라시니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우유를 한차례 쏟아 부운 후에 또 고기를 들고 왔다. 
샹들리에에 비친 고깃덩어리에서는 번들거리는 육즙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람 팔뚝만한 길이와 넓이다. 한조는 새파랗게 질려서 혀를 말고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앞뒤로 철통같은 수비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어디로 도망갈 곳도 없었다.
“먹어라.”
모라시니는 한조의 입에 고기를 박으며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삼켜라.”
그러나 한조는 이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굶주리다 이제 겨우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막무가내로 먹여 죽이려 든다. 먹는다는 것이 이토록 고통스럽고 끔찍한 일인지 한조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모라시니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자신의 말에도 한조가 반응 없이 굳어있기만 하자 다시 고기를 처넣는 짓을 시작했다. 한조의 목구멍이 미친 듯이 움직이고 팔다리가 벌벌 떨었다. 하지만 모라시니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먹어라. 그리고 찌워라. 그리고 우리를 위해 네 피를 내놔라. 너는 그러기 위해 우리가 부른 사람이란 말이다.
“아흐읏!”
한조의 팔과 다리가 비비 꼬이며 고통을 호소했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코에서는 우유가 흘러내렸다. 그래도 모라시니는 멈추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마치 아무리 처넣어도 꿀꺽꿀꺽 삼켜줄 마법통이라도 한조의 속에 존재한다는 듯이, 죽어라 음식을 처넣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드리워지고 억눌린 신음과 울음소리가 사방을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누구 하나 눈 돌리는 사람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씹는 소리는 안 들리는데 삼키는 소리만 요란했다. 한조는 차라리 자신이 먹고 싶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혀가 묶여있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아이를 낳는 것처럼 오랜 진통이 이어졌다. 이윽고 사지가 빳빳하게 굳은 한조가 그것을 전부 삼켰다. 무리하게 벌어진 입술이 터져서 피가 흐르고 상처 입은 식도에서도 피가 올라왔다. 뱃속은 요동을 치고 혀가 뽑혀나갈 듯 아팠다.
아픔도 아픔이나 비참하고 서러웠다. 단단한 철창 안에서 먹고 찌기 위해 사육되는 돼지가 된 기분이었다. 위장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이것들은 다 뭐냐고 비명을 질렀다. 한조는 모라시니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 고개를 돌리고 웩, 토해버렸다.
자신만만했던 모라시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일리야스의 얼굴도 굳어졌다. 여인과 기사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든 이들 가운데서 한조가 웩웩 먹었던 것들을 게워내고 있었다.

24~26편
“······이 무슨.”
모라시니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늘 엄숙하고 냉정하던 그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저 괘씸한 것이!”
빵과 우유, 원형을 거의 보존하다시피 한 고깃덩이들이 죄다 밖으로 기어 나왔다. 토하는데도 한참이 걸렸던지라 한조는 괴로워하며 방바닥을 굴렀다. 죽도록 쑤셔 넣자마자 바로 게워냈더니 이제 힘도 없고 죽을 맛이었다.
모라시니가 분노하여 막 한조에게 다가서려 했을 때였다. 한조를 돌보는 여인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다리 하나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슨 다리 말이냐?”
되묻는 모라시니의 서슬이 시퍼렇다.
“다리 하나쯤 끊어먹어도 괜찮지 않냐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에 바닥을 구르던 한조가 기진맥진한 모가지를 바싹 치켜들었다. 얼굴에 불안감이 가득했다. 오랜 경험으로, 저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헛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모라시니의 눈동자가 찬찬히 잦아졌다. 대신 사악하고 음흉한 기운이 번들거렸다.
“다리 하나쯤은··· 없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거로군.”
한조는 움직이지 않는 손을 뒤로 하고 다리를 질질 끌었다. 온 몸이 긴장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기사들도 주춤주춤 앞으로 다가오고 모라시니와 여인들은 한조의 다리를 가늠하며 어느 쪽을 끊을까 하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일리야스가 사과를 씹는 소리가 들렸고 한조는 겁이 나서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여봐라.”
모라시니가 결심을 굳힌 듯 손짓을 했다.
“가서 이발쟁이를 불러오너라.”
한 여인이 공손하게 절하고 밖으로 나가자 이것이 협박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한조는 직감했다. 그의 눈동자가 필사적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이 방에 있는 그 누구도 한조를 관심하는 자는 없었다. 이내 한조의 눈동자가 사과를 깨물고 있는 일리야스에 멎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방에서, 유일하게 그가 알았던 사람이고 그나마 마음을 나누었던 사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한조는 일리야스를 향해 손을 내밀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도움을 구했다.
“살려줘.”
일리야스는 와삭,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그의 입술사이로 과즙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맛있고, 붉은 사과.
“살려줘, 일리야스.”
누군가 도끼를 가져오고 그것을 불에 달구었다. 쇠가 시뻘겋게 익고 여인이 다가와 한조의 다리를 둥둥 걷어 올렸다. 운동 부족과 영양실조로 인해 말라버린 다리 한 짝이 드러났다. 이제 그것을 쳐서 저들이 고아먹을 것이다. 한조는 한쪽 다리를 영영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이 방에서···평생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일리야스.”
한조는 초조하게 외쳤다. 일리야스는 상체를 깊숙이 숙여 자세히 그 장면을 들여다보았다.
“일리야스!”
“네가 쉽게 부를 이름이 아니랬다, 아가야.”
모라시니가 한조의 얼굴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짙은 콧수염의 기사가 날이 벌겋게 익은 도끼를 겨누었다. 하나, 둘, 셋. 무릎 위쪽을 겨누었다가 아래쪽을 겨누었다가 하던 그것이 이윽고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그것은 무릎 윗부분을 정확하게 겨누었다.
“일리야스! 아악!”
한조는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곧 다가올 끔찍한 고통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고 긴장한 허벅지 근육만이 혼자 뒤틀릴 뿐이었다.
한조는 살며시 손바닥을 내렸다. 그리고 벌벌 떨며 자신의 다리를 쳐다보았다. 도끼의 날이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멈추어 있었다. 그 손잡이를 따라 올라가보니 두 남자의 손이 엉켜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기사의 손과 일리야스의 손이었다.
일리야스는 한조가 멍하니 있는 사이 기사를 뒤로 밀어내고 그의 도끼도 함께 밀어냈다. 그리고 사색이 되어 덜덜 떨고 있는 한조를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운채로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참으로 오묘하여 한조는 일촉즉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발끈한 마음이 든다.
일리야스는 한조가 아무 반응도 없자 입술을 뒤틀더니 짧게 웃었다. 그리고 조롱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름을 잘도 부르더니 왜, 감사하다는 말도 못하겠느냐?”
한조는 반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 손끝이 아직도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한 것은 이쪽이니 분명 고맙다고 해야겠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애초에 그가 여기에 갇힌 것도, 다리가 잘릴 뻔한 것도, 원흉을 따져보면 전부 일리야스 때문이 아닌가.
한조가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니 일리야스는 흥이 식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모라시니도 기사들도 허리를 굽히고 그를 뒤따라 나섰다. 막 문을 닫고 나가기 전에 일리야스는 한조에게 먹던 사과를 던졌다. 그것은 한조의 얼굴에 정통으로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얼얼한 아픔에 한조는 잠시 멍해졌다. 
“먹어라.”
일리야스가 차갑게 말했다.
“속이 다 비었을 거 아니냐. ···아깝게.”
그 말에 한조의 표정이 불에 달군 도끼처럼 시뻘게졌다. 절로 치가 뿌드득 갈리고 눈에서 불이 튀었다.
“당신은.”
한조는 깨문 자국이 있는 사과를 꽉 움켜쥐었다. 
“당신은 나를 보고 아무 생각도··· 안 듭니까?”
“무슨 생각 말이지?”
“내···가.”
한조는 다음 말을 하기 위해 온 힘을 쥐어짜야만 했다.
“불쌍하지도···않습니까?”
그 말에 일리야스는 잘 생긴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리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음식에 자비를 베푸나?”
너무도 간결한 대답에 한조는 입이 막혔다.
“······뭐라······?”
“네 한끼 식사에 자비를 베푸냐고 물었다.”
일리야스는 또다시 한조의 반응이 사라지자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흥미가 싹 가진 표정이었다.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란히 걸어가는 소리도 들렸다.
토사물과 함께 남겨진 한조는 자신이 뱉어놓은 것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억눌린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어흐······. 길게 늘어지던 그 울음소리는 곧 비통한 신음과 절규로 바뀌었다. 경련이 일어난 다리를 바닥에 질질 끌며 한조는 미친 듯이 울었다. 무엇이 서러운지도 이제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꺽꺽 울다가 사과를 내던졌다. 힘껏 던진 것인데 그것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바닥을 데구르 굴러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일어나라.”
여인이 다가와 한조를 잡아 올렸다. 토사물 속에서 헤엄치던 한조의 몰골이 엉망이었다.
“씻자.”
여인들이 옷을 벗기자 한조는 울면서 고개를 저었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일리야스.’
한조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일리야스!’
여인 중에 하나가 한조의 뺨을 살짝 훔쳐주었다. 그러자 그의 눈물이 철철 흘러 여인의 손과 발도 적셨다.

“너무 말랐지 않느냐.”
일리야스가 호통을 쳤다. 침착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짜증이 난 모습이다.
“저것이 저렇게 마르도록 너희들은 무얼 한 게냐.”
“죄송합니다. 전하.”
모라시니가 허리를 깊이 숙여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일리야스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게다가 그 안에서의 추태는 뭐냐, 모라시니. 다리를 자른다고? 다리를 잘라? 아직 내 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씩 하나씩 토막 내서 야금야금 잘라먹겠다는 거냐? 저것을 어떻게 복용해야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런 모험을 하자는 거냐고.”
“그것이 먹기를 거부하는지라···길을 들이고자 그랬습니다.”
모라시니는 쩔쩔 맸다. 언제나 침착하던 일리야스가 화를 내니 그도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용서 하소서, 나의 왕이여.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정녕 나를 위한다면 약을 오래 보존할 수 있는 길을 찾아라.”
일리야스는 훽 돌아서며 말했다.
“그것의 몰골을 보았느냐.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더구나. 이 상태로는 얼마 못 가 정말로 죽고 말 것이다. 피를 뽑는 것이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는 모양이니 너는 다른 방도를 생각해내도록 하라.”
모라시니는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혀 명령에 따르겠다는 표시를 했다. 일리야스는 짤막하게 덧붙였다.
“단, 아까처럼은 안 된다. 그를 조금씩 토막 내서 내게 먹이겠다는 말은 말아라.”
“물론입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모라시니지만, 뾰족한 방도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뒤로 물러났다.
‘다른 부위라.’
일리야스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었다. 홧김에 던지다시피 한 질문이지만 속 깊은 곳에서 늘 생각해왔던 말인 모양이다. 그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갸름하게 빠진 얼굴을 감싸 쥐고는 톡톡 두드렸다.
‘다른 부위······.’
방 안의 사람들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모라시니가 한조의 혈액을 증류하는 생각을 하고 콧수염의 기사가 한조를 끓는 물에 넣고 삶는 생각을 할 때, 일리야스는 조금 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일전에 한조의 눈물을 먹었던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고문실에서 히스테릭하게 울음을 터트린 한조의 눈물을 핥아먹은 적이 있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귀한 약이다. 정말로 고문할 생각은 없었다. 겁만 줘서 고분고분 순응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른 여자들처럼, 혹은 남자들처럼. 자신을 보면 얼굴을 붉히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피든 살이든 원하는대로 썰어드리겠노라 말하길 바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야무지게 생긴 얼굴로 독하게 굴기에 무서운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겁을 먹고 엉엉 울었다. 한심하여 그만 할까 하다 우는 얼굴이 조금 귀엽게 느껴져 눈물을 핥아먹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었지······?
턱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일리야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짝 웃었다. 그것이 한때의 몸의 변덕인지 몰라도 시험해볼 가치는 있었다.




두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오지를 여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산 속 깊이 들어갔던 두 친구는 식인종에게 잡혔다. 식인종은 그들을 큰 솥에 넣고 펄펄 끓이기 시작했다.
한 친구는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그런데 다른 친구는 킥킥 웃고 있었다. 울고 있던 친구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지금 웃음이 나오니? 죽게 생겼는데?’
그러자 웃고 있던 친구가 큰 비밀이라도 말해주는 것처럼 속삭였다. ‘나 방금 국에다 쉬했다?’

식인종은 도시로 나왔다. 그는 목욕탕에 가서 화를 내며 말했다. ‘누가 내 밥에 물 말았어!’
식인종이 아파트를 보게 되었다. 그는 기뻐하며 외쳤다. ‘도시락 세트다!’
식인종이 교도소로 갔다. 이번에는 아들도 함께였다. 아들이 물었다. ‘아빠, 저건 뭐야?’ ‘응. 저건 불량 식품이란다.’

한조는 불에 타서 죽었다. 그러자 식인종의 나라에 떨어져 있었다. 한조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식인종들은 한조를 납치하고 감금시켰다.
식인종 중에 제일 우악스럽게 생긴 놈이 있었는데 그놈만 착하고 다른 놈들은 다 못됐다. 
착한 식인종이 한조에게 말했다.
‘널 지켜줄게’
그리고 착한 식인종은 한조를 칼로 푹푹 찔렀다.

한조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자줏빛의 천개가 보였다. 커튼과 쌍으로 이루어진 천개는 고상한 얼굴의 남자와 여자가 하늘과 땅 위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수놓아져 있었다. 한조로서는 알 수 없지만 이 나라 시조나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인 모양이었다.
“착한 식인종.”
한조는 눈을 깜빡거렸다. 축 처진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생각하는 것뿐이었는데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착한 식인종뿐이었다.
“착한 식인종이 보고 싶어.”
그때 거짓말처럼 문이 벌컥 열리더니 착한 식인종이 들어왔다. 한조는 깜짝 놀라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착한 식인종!”
“뭐냐?”
한조의 반응에 일리야스는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깨끗한 피부, 화사한 이목구비, 보랏빛 머리카락과 당당한 자태까지. 세상에 둘도 없을 미남자를 확인한 한조는 두 팔을 앞으로 벌리다 말고 고개를 갸웃하며 백치 같은 소리를 냈다.
“착한 식인종이 아니네?”
“잠꼬대는 그만해라.”
일리야스는 가차 없이 말하며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고개를 까딱해 사람들을 부렸다.
“뭐, 뭐야?”
여인과 기사들이 다가와 한조를 옭아맸다. 그들은 한조의 윗도리를 벗겨내더니 아래로 끌어당겼다. 손목에 두터운 밧줄이 걸리고서야 한조는 제정신을 차렸다.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자 움쩍달싹도 할 수가 없어졌다.
“뭐야! 무슨 짓이야!”
아까의 백치 같은 표정에 긴장의 날이 팔팔하게 살아나고 그는 뒤로 돌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밧줄로 당기는 힘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한조는 거미줄에 붙잡힌 불쌍한 나비처럼 허공에 팔을 벌린 자세로 결박되었다. 뒤에서 일리야스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이것을.’
‘때려서.’
‘···지 않고.’
‘피를·····.’
“뭐야!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한조는 몸부림을 쳤다. 대체 등 뒤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끊어지기 직전의 신경이다. 조금만 현을 잘못 눌러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찢어질 것이다. 한조는 자유로운 다리와 몸통을 사용하여 날뛰었으나 두 팔이 팽팽하게 결박되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일리야스!”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등 뒤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순간 온 몸이 뻣뻣하게 굳고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한조는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새까맣고 길며 빠르게 움직이는 어떤 것이 등 뒤로 날아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웃!”
한조는 입술을 즈려 물며 비명을 참았다. 그것의 정체는 채찍이었다.
짜악-
쫙-
채찍이 맨 몸에 휘감기는 소리가 신나게 리듬을 탔다. 한조는 아픔에 어쩔 줄을 몰라 등을 구부리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또다시 채찍이 날아오면 타는 듯한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둥그렇게 휘게 되었다. 허공에서 이리저리 피해보지만 날아오는 채찍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두 팔엔 감각이 사라지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내가 왜······.’
한조는 뚝, 눈물을 떨구었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해.’
그때 여인이 다가와 황금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유리잔에 한조의 눈물을 받았다. 투명한 유리는 8각으로 깎아 만든 것으로 밀초의 부드러운 붉은 빛을 받아 잔 자체가 황금색으로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그 속에 한조의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그러다 후두둑 떨어지니 마치 황금 물을 받는 듯 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전하.”
여인은 그 잔을 소중하게 갈무리하여 은쟁반에 받쳐다 무릎을 꿇고 일리야스의 앞에다 바쳤다. 
“이것을.”
일리야스는 다시 장갑을 끼고 우아하게 잔을 낚아챘다. 좌중이 침묵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일리야스가 한조의 눈물을 마셨다. 사방에 들리는 것은 한조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모두 차렷 자세로 일리야스가 그것을 다 마시기만을 기다렸다.
“하아.”
마침내 긴 침묵의 시간이 깨어지고 일리야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더니 천천히 눈을 뜨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어떻습니까.”
모라시니가 앞으로 나섰다.
“어떻습니까, 전하.”
“좋구나.”
일리야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아주 흡족해 보였다.
“좋다, 모라시니.”
“오오!”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모두 기뻐하며 두 손을 맞잡았다. 이제 저 지겨운 약의 피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가볍게 눈물만 떨구어주면 끝나는 일이었다.
“조금 더 말해주소서. 듣고 싶습니다. 효과는 어떤 것이 더 좋습니까?”
“눈물이 더 효과가 좋다.”
일리야스는 호쾌하게 답해주었다.
“예전에 약의 눈물을 먹은 적이 있다. 피를 먹을 때는 늘 먹고 나면 허기지고 다음날이 되면 허기가 져서 기운이 딸렸는데 눈물을 먹었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내가 회복되나 보다 생각하고 넘겼는데 이제 보니 그것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눈물이라는 생각을!”
모라시니가 탁, 무릎을 쳤다.
여인들이 한조를 묶었던 줄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채찍에 두드려 맞은 한조가 바닥에 엎드렸다. 등이 활활 타는 듯 하여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일리야스가 가까이 다가와 그의 등에 수건을 던져주었다. 흰 린넨 수건이 한조의 피로 은은하게 물들었다.
“빨리 확인해보느라 그랬다. 마음에 두지 말아라.”
일리야스의 말에 한조는 눈이 돌아갔다. 듣자 듣자하니 저것들이 사람을 뭘로 보는 건가. 뭘 확인했다고? 겨우 눈물을 위해서?
고작···눈물을 흘리게 하겠다고 사람을 이렇게 대해?
한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반쯤 울고 반쯤 웃는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먹어라 먹어라 타령을 하더니 이제는 울어라 울어라 타령을 하겠군.
‘오냐 그렇다면.’
한조는 조금씩 흘러내리는 눈물을 두 손으로 야무지게 닦아냈다. 붉게 멍든 손목에 눈물이 닿으니 아팠지만 지금은 그 아픔마저 깊이 간직할 때였다.
‘나는 절대 울지 않겠어.’
좋다고 웃고 떠드는 무리를 불타는 두 눈으로 노려보는 한조였다.

그 예상은 옳았다. 일리야스와 여인들은 이제 울어라 울어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왜 울지 않는 게냐.”
일리야스는 초조한 표정으로 독촉했다. 하지만 한조는 입술을 꼭 깨물고는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울어라.”
회초리가 날카롭게 바람을 갈랐다.
“울어라.”
그것이 맨살에 맞아 살이 터졌다.
“울라고 했다.”
피가 회초리를 적시고 회초리의 결이 생생해졌다. 다시 그것이 바람을 가르고 한조의 살이 터져나간다.
“울어라.”
“울어라.”
“왜 울지 않지?”
“울어라.”
“울라니까!”
한조는 주먹을 바싹 움켜쥐고 버텼다. 생살 터지는 느낌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오냐 너는 맞는 것이 좋은 모양이구나.”
일리야스는 팔을 둥둥 걷어 올렸다. 그의 목소리에도 이제 악의가 번들거렸다.
“그럼 내가 친히 너를 때려주마!”
회초리가 또다시 허공을 가르고 또다시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진다. 한조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주먹으로 벽을 쿵 쳤다.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이 고통을 날려 보내려 했다. 
하지만 눈물만은 흘리지 않았다.
“울어라! 울란 말이다! 에잇!”
촥촥 피가 사방으로 튀고 결국 한조는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회초리가 부러져나갔고 일리야스는 고함을 질렀다.
“새것을 가져오라! 약이 더 맞고 싶은 모양이다!”
명령을 받은 여인이 다소곳하게 새 회초리를 가져왔다. 일리야스는 팔을 번쩍 들어 내리치려다 한조가 기절한 것을 발견했다. 그는 두 눈을 허옇게 뜬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
일리야스는 그제야 회초리를 내려놓고 자신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인이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왔지만 귀찮은 표정으로 물려버렸다.
한조에게 맞는 것이 좋으냐 조롱을 했지만 일리야스라고 때리는 것이 좋을 리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차가운 남자라는 말은 숱하게 들어왔지만 때리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일리야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짙은 피로가 서려 있었다. 때리는 것 역시 체력 소모가 심한 일이었다. 그는 병에서 회복 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기억을 찾고 제대로 된 일리야스로 서게 된 것은 더더욱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기절한 한조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이마에 한손을 대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도 한조를 때리고 고문하고 싶지는 않았다. 모라시니나 여인들에게 맡겨놓고 그들이 날라다주는 눈물 몇 방울을 취하고 끝내는 것이 훨씬 간단하고 깔끔한 일이었다. 그는 바쁜 사람이었고 대관식을 앞두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이 있었다. 모라시니는 자신이 직접 약을 다룰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음식을 처넣던 모라시니의 모습과, 도끼에 겨누어지자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저것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그러기가 싫었다.
‘이상한 일이다.’
일리야스는 피가 튀어 못쓰게 된 호랑이 가죽을 천천히 손으로 쓸었다. 여기서 약과 다정하게 뒹굴었던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약은 울기 시작했고 일리야스는 약을 달래주느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약은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고 일리야스는 절대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감정은 그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약은 여기 앉아서 일리야스를 보고 밉다고도 했다. 그 말에 일리야스는 또 대경실색하여 그러면 안 된다고 외쳤다. 마음이 다급해지고 땀이 쩔쩔 났다. 그래서 그만 입을 훔쳤더니 약이 더 이상 가겠다는 말을 않고 조용해졌다.
‘그러고 나서 한참을 호랑이 털만 골랐지.’
그때의 기분이 약간이나마 살아나는 듯 해 일리야스는 짓는 듯 마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름다워서 웃으면 주변이 화사해진다. 하지만 그 화사함은 이내 변덕스런 무지개처럼 사라져버렸고 일리야스는 다시 인상을 썼다. 잠시나마 밝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까라지고 그의 기분은 다시 나빠졌다.
지난 일을 추억하자 남의 기억을 훔쳐보는 것처럼 찜찜했다. 오래 전에 꾼 꿈처럼 빛 바란 추억이고 감정의 티끌조차 남지 않은 불분명한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속에 뭉쳐있으니 쓸데없는 감상에 젖는 거다. 그 못나고 멍충했던 것이 멋대로 했던 약속들도 그것들이 남긴 흐리멍덩한 추억들은 모두 분쇄하여 그림자도 남김없이 내쫓을 것이다.
일리야스는 완전히 부활하였다. 그는 성혈의 저주도 비켜간 최초의 황제가 될 것이다. 그 못났던 것의 희미한 잔상조차 찾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했던 모든 말과 행동, 그리고 약속은 전부 허무맹랑한 거짓인 것이다.
하물며 추억이야······.
일리야스는 한조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하지만 기절한 한조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씩씩 거리는 소리를 내며 죽은 것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입가에 침이 흘러서 일리야스는 그것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래, 그것들은 내 속에서 죽었어.’
그는 손길을 멈추지 않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다시 떠올릴 이유 따위 없어.’
목을 살짝 덮는 기장의 검은 머리카락은 가늘고 부드러워서 일리야스의 손가락에 착착 감겼다. 어떤 귀부인의 머리카락도 이처럼 부드럽지는 못했다. 영양실조로 결이 상해서 그렇지 일리야스는 이 머리카락이 옛날에는 훨씬 더 아름다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람도 없는 곳에서 혼자 찰랑찰랑 움직이고, 반짝반짝 빛나다 못해 어떨 때는 후광을 뒤집어 쓴 것처럼 보이곤 했었다. 때때로 너무 눈이 부셔서 약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 들 정도로 말이다.
“젠장, 내가 뭐하는 거람.”
추억따위 하찮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바로 조금 전이건만 일리야스는 또 옛 추억을 끄집어내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치 구질구질한 서랍장을 뒤지는 노친네 같았다.
“일리야스님.”
그때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약초가 들려 있었다. 한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연스레 풀어졌던 일리야스의 얼굴이 다시 서리가 내리도록 차가워졌다.

그의 매는 너무 아파서 솔직히 매번 참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매 앞에 장사 없다고 솔직히 몇 번은 운적도 있었다. 아주 소량의 눈물이었지만 운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면 그는 이것 봐, 결국 내가 이겼지? 하는 듯한 얼굴로 유리잔에다 눈물을 받아서는 단숨에 들이켰다. 천하의 가증스러운 모습이었다. 한조는 벨이 뒤틀려서 외면해버렸다.
“뭐냐?”
교만한 표정으로 눈물을 마시던 일리야스가 한조를 보고 인상을 썼다. 한조는 흘깃 일리야스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맞은 곳이 욱신거려 고개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짐승처럼 몸을 말았다. 힘들게 숨만 몰아쉬려는데 일리야스가 언성을 높인다.
“왜 나를 그렇게 보는 거냐!”
“뭐가요?”
한조는 어이가 없어서 톡 쏘았다. 원하는 대로 매도 맞아주고 눈물도 흘려주었다. 그런데 왜 또 시비인가. 평소처럼 얻을 것을 얻었으면 나가버리면 될 것을 오늘은 괜한 짜증이다.
한조의 반응이 마음이 들지 않는지 일리야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다치지도 피가 나지도 않은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한조의 손목을 붙잡아 일으켰다. 한조는 옆으로 피하려 했지만 형편없이 두드려 맞은 몸과 팔에 난 심각한 자상 때문에 빨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리야스가 속삭였다.
“왜 날 그렇게 보냐고 물었다.”
“놔, 놔요!”
고개를 바싹 붙여오자 그 온기와 숨결에 놀란 가슴이 벌벌 떨렸다. 한조는 식겁하여 벽에 딱 몸을 붙이고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외면했다. 뜨거운 숨결이 코앞에서 느껴지자 순식간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붙잡힌 손목에서부터 핏기가 싹 가시더니 순식간에 온 몸이 하얗게 되었다. 떨리고 오금이 저려 반항도 하지 못했다. 한조는 눈을 질끈 감고 고함을 질렀다.
“왜 이래요! 나한테서 떨어져!”
“날 봐라.”
일리야스는 한조의 턱 끝을 잡아당겨 자신을 향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한조는 계속 고개를 외면한 채였다. 보란다고 봤다가는 간담이 한 움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멀리서 매질을 할 때가 낫지 몸이 붙는 것만은 사양이었다.
몸이 닿으면 온기가 전해지고 온기가 전해지자 몸이 반응을 한다. 나를 이렇게 만든 놈이 여기 있다고 몸이 알아채버렸다. 공포로 맥이 불규칙적으로 뒤고, 심장도 끝없이 두근거렸다. 온 몸이 미쳐 날뛰니 그 떨림을 일리야스가 알아채고 의아한 표정일 짓는다.
‘볼 줄 알아.’
한조는 이를 악물었다.
‘가짜 일리야스 따위. 내가 볼 줄 알아.’
“날 보랬잖느냐.”
“싫습니다.”
한조는 고집을 부렸다. 일리야스의 표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왜 보기 싫다는 거냐.”
“보기 싫은걸 보기 싫다고 하는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보기 싫다고?”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일리야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그럼 보기 좋을 줄 알았나.’
한조는 어이가 없었다. 매일같이 만나서 하는 거라곤 때리고 찔러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뿐인데 내가 그를 보고 싶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정말로 예상치 못한 답을 들었다는 듯이 한동안 묵묵하게 있더니 한조의 손을 풀어주었다.
손이 자유로워진 한조는 재빨리 몸을 굴려 -그러나 일리야스가 보기에는 너무도 굼뜬 동작으로- 달아났다. 그리고는 구석으로 가서 팔과 다리를 움츠려 상처받은 부위를 보호했다. 두 눈을 위로 치뜨고 이쪽을 노려보는데 마음이 몹시 언짢다. 일리야스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날 왜 그렇게 보는 거야!”
“보래서 봤더니 이번엔 또 뭐가 문젭니까!”
한조도 질세라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의 눈이 공중에서 맞부딪쳐 불꽃을 튀겼다. 일리야스의 잘생긴 눈썹이 위로 쓱 치켜 올라가더니 사납게 인상을 쓴다. 한조는 벽과 의자 사이의 좁은 공간에 몸을 꼭 맞게 하고는 살기어린 눈으로 일리야스를 쏘아보았다. 비록 손끝은 아직도 달달 떨리고 있지만 살기하나만큼은 빠지지 않았다.
“좋은 눈이다.”
한참만에야 다시 일리야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한조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그의 그림자로 한조가 온통 가려지게 했다.
“하지만 그 좋은 눈으로 나를 볼 때는 좀 더 고분고분해야 할 게다.”
“죄송하군요.”
한조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목소리가 뒤틀리고 아니꼬운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런데 어떻게 봐야 고분고분하게 보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디 제게 시범을 보여주세요, 일리야스님.”
“예전처럼 하면 된다.”
일리야스가 대답했다.
“예전처럼······.”
한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일리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전처럼.”
그들이 이 호랑이 가죽위를 뒹굴며 장난을 쳤을 때처럼.
한조는 그가 말하는 예전이 언제를 뜻하는지 알아차렸다. 그와 동시에 한조의 얼굴에 분노가 차올랐다. 절로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가고 이가 으드득 갈렸다. 그러나 일리야스는 한조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너는 예전처럼 나를 대하지 않는다. 예전에 너는 잘 웃었다. 지금처럼 노려보거나 사납게 눈을 치켜뜨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아이가 아니었다. 내게 고분고분했고 말도 잘 들었고 나한테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참 재미없는 아이가 되었구나.”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나를 예전처럼 잘 대하라. 그렇지 않으면 험하게 다뤄줄테다.”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하는 눈빛으로 일리야스가 한조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한조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고 기가 차서 가슴이 턱, 막혀버린 것이었다. 
저 새끼··· 저 씹어 먹어도 분이 안 풀릴 새끼······. 한조는 눈만 번뜩거렸다.
“저보고 예전 같지 않다고 지금 비난 하시지만.”
한참만에야 떨리는 목소리로 한조가 반격을 했지만 그것은 어찌나 낮고 불안정한 목소리인지 일리야스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뭐?”
“저를···비난 하시지만.”
한조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일리야스님도 예전과 다르시잖아요.”
그는 떨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두 손을 맞잡았다. 안 그러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에게 한 방 먹여버릴 것만 같았다.
“당신이···변한 거잖아요.”
“내가 그 멍충하고 못생긴 것이 아니라서 싫다는 게냐?”
일리야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한조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기가 막힌 심정은 찬찬히 가라앉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본심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넌 나의 일리야스가 아니잖아. 그런데 뭘 바라는 거야.
“나를 홀대하고, 매질했잖아요. 나의 일리야스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내가 당신한테 잘해야 해요?”
마지막으로 갈수록 질문이 아니라 힐난이 되어갔다.
“나는 미왕 일리야스다. 위대한 그란사르스 황제의 마지막 혈통을 잇는 몸이다. 그러니 너 역시.”
그리고 일리야스는 한조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나에게 복종해야 함이 당연하다. 너는 나를 위해 이곳으로 온 약이니까.”
그놈의 약, 약, 약 타령. 한조의 눈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일리야스를 쳐다보니 너무도 차분하고 오만한 표정이라 열낼 기운도 사라져버렸다. 상식이 통하지 않아. 그는··· 한조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 일리야스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정말로 약이라 해도 그가 낫게 해주고 싶은 사람은 이미 죽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먹고 나아서 죽어버렸다. 그는 저자와 다르게 모두가 싫어할만한 외모의 사내였다. 못생기고, 못생기다 못해 무서운 외모에 그 타고난 위치만 아니라면 모두가 고개를 외면해버릴 만큼 무능하고 못난 자.
어느새 미움보다 슬픈 심정이 들어 한조는 저도 모르게 약간 눈물을 흘렸다. 저토록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을 놓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자신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일리야스는 숨을 죽이고 한조가 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팔은 붕대로 친친 감아놓고 몸은 말라서 형편없는데 눈에는 음습한 광기가 돈다. 그 두 눈에서 이내 눈물이 흘러내리자 끔찍한 슬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그가 왜 우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토록 울어라 울어라 매질하며 울려도 울지 않던 그가 느닷없이 서럽게 우니 당황스럽다. 저도 모르게 가슴 한켠이 싸아 해지며 저도 모르게 주춤,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일리야스가 다가오기 전에 한조가 먼저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뺨을 약지로 쓸어 올려 눈물을 묻혔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일리야스를 바라보는데 일리야스는 그 눈빛과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 다가오려던 모습 그대로 우뚝 서버렸다. 
한조는 절뚝이며 다가와 일리야스의 얼굴을 잡았다. 한조쪽에서 자신을 만지자 일리야스의 가슴이 잠시 정지하였다. 대체 무슨 짓인가 싶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려는데 그가 다른 손으로 이번에는 일리야스의 입술을 만졌다. 상처가 있고 몹시 마른 손가락이 일리야스의 풍부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스쳤다.
처음 느껴진 것은 피맛.
그리고 오래된 바다처럼 짭쪼름한 눈물의 내음······.
“줄게.”
한조가 말했다.
“줄 테니···내게 관심 가지지 마세요.”
“······무슨···소리냐.”
일리야스는 여전히 뻣뻣하게 굳은 채였다.
“당신한테 복종하고, 고분고분하게 굴 테니. 오지 마세요. 눈물을 드릴 테니 오지 마세요. 모라시니님이나 여인들에게 잔을 주세요. 그 잔에 나의 눈물을 떨구어 드리겠습니다. 그 눈물을 마시고 부디 만수무강하세요. 그리고 내게는.”
한조의 검은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게는 오지 마세요.”
입술에 닿은 손가락이 달달 떨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주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한조는 눈을 감고 눈물을 두어 방울 더 흘렸다. 일리야스는 마치 주박에라도 걸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로 코앞에서 약이 울고 있었다. 그토록 울라고 할 때는 울지 않더니 혼자서 소리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눈물을 닦아서 잔에다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도 피로해보였고 매를 맞을 때보다 더 아파보였다. 검은 속눈썹이 촛불의 불빛 속에 촉촉하게 빛났고 살짝 열린 입술에서는 억눌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약은 슬퍼보였다. 너무도······.
“왜···우느냐.”
일리야스는 꿀꺽 침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그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는데 자신의 목적을 오해할까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신 침만 꿀떡꿀떡 삼켰다.
“울지 마라. 왜 우느냐.”
“언제는 울라고 해놓고서.”
한조가 눈을 뜨더니 피식 웃었다. 울면서 웃는 모습이 처연하게 느껴졌다.
“가지세요.”
그는 탁자에 놓여있는 잔을 가져와 그 속에 눈물을 흘려 넣었다. 눈을 깜빡거리자 눈물이 또르르 굴러 떨어져 잔에 고였다. 순식간에 깊이가 생길 정도로 눈물이 고였다. 
한조는 그것을 일리야스에게 내밀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 가만히 있자 단호한 태도로 받을 것을 종용했다. 
“가지세요.”
한조가 말했다.
“모두 당신 것이니.”
“······.”
일리야스가 떨떠름한 태도로 잔을 받자, 한조는 등을 돌려 침대로 걸어갔다. 오늘은 박달나무로 허벅지를 때렸다. 이제 부어올라 걷기 힘들 텐데도 똑바로 걷고 있었다. 그러나 단을 올라갈 때는 역시 힘이 드는지 조금씩 걸음걸이가 휘청인다.
눈물이고 나발이고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가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제야 일리야스는 정신을 차렸다. 내게 관심가지지 마세요······. 방금 한조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눈물을 줄 테니, 내게 오지 마. 내게 손대지 마. 관심도 가지지 마··· 위태위태한 걸음걸이로 혼자 힘겹게 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느릿느릿 한조가 침대에 눕는 기척이 느껴졌다. 눕고 나서도 한참을 뒤척거리며 아픔을 참는 기색이었다.
밖에 우두커니 서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일리야스는 억지로 등을 돌렸다. 때린 것은 자신이면서 왜 그렇게 심하게 때렸을까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나쁜 것은 한조였다. 그가 울지 않으니까 적당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늘 한계에 도달할 정도로 맞고 나서야 약간이나마 눈물을 흘려주니 이쪽에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줏빛 커튼 안에서 한조가 앓는 소리가 들렸다. 뒤척이다 어디를 잘못 건드렸는지 아파서 끙끙거렸다. 일리야스는 안절부절 밖에서 서성거리다 화를 내며 문을 열어젖혔다.
“약이 많이 아프다. 치료해주어라.”
언제나와 같이 차갑고 오만한 목소리. 일리야스의 명령에 여인들은 고개 숙여 복종했다.
그녀들이 안으로 들어가고도 일리야스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손에 들린 잔을 꽉 움켜쥐었다가 홧김에 전부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언제나와 같이 약의 눈물은 썼다. 그래서 일리야스는 인상을 썼다. 짜고 쓰고 형편없는 맛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더욱 쓰게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27~29편 
[ 5 ]




불이 하늘을 태우며 사람이 나타났다. 그녀는 사람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검은빛에 물든 여신이라. 남자가 그녀의 옷을 찢으니 여신은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이윽고 그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머리와 눈에 여신의 색이 깃들었다.

‘거래를 하자.’
새벽의 미명을 밟고 미왕이 나타났다. 구불 치는 검은 머리카락에는 은은한 보랏빛이 돌았고 빛도 들지 않는 검은 눈동자는 끝도 없이 깊었다. 붉은 입술은 풍부하고 육감적이었는데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흰 치아가 여인의 속살처럼 드러났다 다물렸다 하며 유혹하는 듯 했다.
사무엘 역시 아름답다는 말을 질리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이 남자의 앞에서는 자신의 얼굴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그에게서는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어떠한 마력이 느껴졌다. 신의 혈통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요사스러운 마녀의 혈통을 물려받은 듯하다. 
검은 눈동자의 매력 앞에 사무엘은 기꺼이 순종하여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미왕의 소문은 익히 들어왔으나 그를 실제로 본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소문이 부풀려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소문이 실물보다 못한 경우였다.
‘나와 거래를 하자, 사무엘.’
미왕 일리야스는 황태자인 정결왕으로부터 미움을 샀다. 정결왕은 미왕을 궁 안 깊숙한 곳에 유폐하다시피 해놓고 미왕은 형님의 말을 존중하여 바깥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흑색궁과 백색궁이 바짝 맞닿아 있고 사무엘은 대신관 후보로 거론되는 젊은 주신관이었던지라 궁전 출입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수십 번 백색궁을 드나들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미왕이 불쑥 자신을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무엘은 어안이 벙벙하여 미왕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왜 나를 찾아왔습니까.’
‘나는 너와 거래를 하고 싶다.’
‘어떤 거래를 원하십니까.’
‘네게 교후의 관을 씌워주마.’
그 말에 사무엘은 가슴이 탁 막혔다.
‘저는 교후가 되기에는 너무 어립니다.’
‘죽기에는 더욱 이르지.’
‘어째서 제가 죽는다 하십니까.’
‘네 뒤로 아무 배후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왜 저를 죽입니까. 신이 미천하여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그건 내가 너를 택했기 때문이란다.’
미왕이 눈살을 부드럽게 하며 웃었다.
사무엘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신중했다.
‘사무엘, 너와 나는 닮은꼴이다. 내가 모험을 하면 너도 인생을 건 모험을 해라.’
미왕이 가까이 다가왔다.
‘나를 황제로 만들어다오. 그러면 내가 너를 교후로 만들어주마.’
‘······협력하지 않겠다면?’
검이 스르릉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기어 나왔다. 검날이 목에 닿는 느낌과 그 너머로 보이는 미왕의 눈빛. 둘 중 무엇이 더 소름끼쳤는지는 지금도 잘 알 수가 없다. 협박을 하는 미왕은 무척 예뻤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는 얼굴로 미왕이 웃었다.
‘그럼 너는 오늘 내 손에 죽으리.’

악시아 황제는 열 두 명의 비에게서 난 아홉 명의 아들과 열 한 명의 딸이 있었다. 언제 누가 발병할지 모르니만큼 아내와 자식이 많은 것이 흠이 되지 않았다.
황제의 스무 자식 중에 군계일학으로 돋보이는 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이 일리야스였다.
낳기는 스물을 낳았으나 발병으로 인해 일리야스가 열네 살 성인식을 치렀을 즈음에는 여덟 명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아들이 다섯이나 남았으니 이만하면 성공이라 하겠다.
성혈의 저주로부터 살아남은 형제들은 욕망으로 눈을 번들거렸다. 저놈을 죽이면 내가 황제가 된다. 그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황태자는 정신병에 걸려 스스로 자결하였다.
둘째 아들인 정결왕이 황태자가 되자 드디어 형제간의 반복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호에 걸맞게 선하고 깨끗하며 품위 있는 왕이었다.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를 아끼며 충언을 기꺼워하는 자애로운 자였다.
그란사나는 어수선했다. 악시아 황제는 발병의 공포로 인해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서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다. 그의 광기어린 행정으로 인해 백성과 신하들은 모두 지쳐가고 있었고 유일한 희망은 정결왕이 하루라도 빨리 보위에 오르는 것뿐이었다.
선하고 지혜로우며, 위엄이 넘치고 신성하다.
하지만 그토록 완벽한 정결왕의 방에서 어째서 밤마다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왜일까······. 
‘그는 나를 묶어놓았다.’
미왕은 팔을 걷어 울혈의 자국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밤새도록 내게 빌었다. 내 신을 벗겨 발가락에 입 맞추고 내 손에 족쇄를 걸었다.’
사무엘은 미왕의 몸에 난 자국들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나를 감금하고 싶어 한다. 내가 반항이라도 할라치면 그는 나를 지하 감옥에 버려두고 한동안 찾지 않는다, 사무엘. 이 내가. 위대한 신의 혈통을 타고 난 내가 지하 감옥에서 쥐를 잡아먹어야 할 때도 있는 거다.’
‘어째서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사무엘이 물었다.
‘스스로의 치부를 밝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네게 중압감을 주기 위해서지.’
미왕은 창밖을 바라보며 성의 없이 웃었다. 그 미소가 깨질 것처럼 삭막해보였다.
‘나는 내 비밀을 아는 자를 살려두지 않는단다.’
그리고 미왕은 입을 다물었지만 사무엘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일이 진행되는 동안 정결왕이 얼마나 그의 어린 남동생에게 집착하는지 사무엘도 알게 되었다. 
황태자이자 정결왕으로 불리는 그 남자는 완전히 미쳐있었다.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미왕은 거의 종일 그의 침실에 갇혀있는 신세였다.
미왕의 권세를 등에 업고 사무엘은 최연소 대신관이 되었다. 교후가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하게 될 무렵부터 미왕은 사무엘의 뒤를 확실하게 봐주었다. 다른 형제들 역시 대신관들 중에 마음에 드는 자들을 하나씩 골라 손을 잡기 시작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패가 바로 사무엘이었다. 정결왕은 다른 형제들의 신관들은 철저하게 탄압하면서도 사무엘은 건들지 않았다.
‘사랑스런 일리야스.’
정결왕은 막내 동생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어리석구나.’
미왕은 정결왕의 품속에서 꽃처럼 웃었다. 정결왕은 동생의 성기를 주물렀다. 놀고 싶다면 놀게 해주면 되겠지. 그는 사랑하는 동생의 철없는 행패를 귀엽게 봐주기로 했다.
‘거래를 하자, 사무엘.’
미왕이 안개를 뚫고 사무엘의 방문을 열었을 때, 그의 운명은 바뀌었다.
‘거래를······.’
지금도 그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 * * 


거세된 소년들은 제일 앞에서 사람의 소리가 아닌 것처럼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미성은 거울도 깨트릴 것처럼 높고 영롱했다. 제단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는 수련신녀들이 춤을 추었는데 그녀들은 모두 흰 옷과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가을이 다가오는지라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활짝 핀 꽃들이 사방에 만개했다. 황금과 은으로 치장한 신녀들이 저 끝까지 늘어서 있었다. 모두가 아름답고 또 화려하다. 보석으로 된 띠를 머리에 둘러 빛을 받으면 이마가 성스럽게 반짝반짝 빛이 났다.
수십 명의 화가들은 이날의 영광을 재빨리 화폭에 옮겨 담았는데 똑같은 것을 보고도 그려내는 것은 전부 달랐다. 황제파의 화가는 하객들의 표정을 한없이 지루하고 또 교만하게 그렸으며, 교후파의 화가는 고위신관들의 눈이 모두 위를 향하게 하여 숭고한 표정을 짓도록 하였다.
참석한 사람마다 각양각색, 참여하는 의미 또한 다르지만 모두가 한 가지만큼은 공통적으로 의견을 같이하였다.
그것은 교후 사무엘의 성결함이다.
길고 풍성한 플래티나 블론드는 몇 가닥을 잡아 가닥가닥 땋아 늘어놓았고, 그 땋은 가닥마다 알이 작은 다이아몬드를 메달아 마치 머리위로 후광이 비치는 듯한 효과를 내게 했다.
호사스러운 제의를 입고, 그 위로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 로브를 걸쳤다. 빛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미세하게 박아 넣은 금실이 좌르르 윤이 나기도 하고, 또 어떻게 움직이면 이번에는 붉은 보석이 번쩍번쩍 빛을 발한다.
한 사람을 위해 이토록 많은 보석과 이토록 많은 치장이 왜 필요한지는 알 수 없으나 효과만은 확실했다. 모두가 교후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일리야스는 바깥으로 나서는 것을 자제하고 안으로 도는 타입이었다. 황태자가 된 후에도 그것은 여전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왕에 대한 소문만 들어왔다. 미왕이 어느 정도의 아름다움을 지녔는지는 몰라도 이날의 교후에는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에메랄드처럼 투명한 눈동자와 달빛처럼 은은한 백금발. 희고 부드러운 피부는 어느 여인보다 깨끗하고 아이처럼 천진한 얼굴은 어떻게 보면 성스럽고 어떻게 보면 요염하다.
“차라리 교후가 아니라 내 첩으로 삼고 싶군.”
하객들 중에는 이렇게 투덜거리는 자도 있었다.
“이로써 천년을 지켜온 전통도 깨어지게 되는군요.”
누군가 그의 말을 받았다.
“사실 신의 피를 이었다하지만 황제에게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병이 있다는 것은 쉬쉬하는 비밀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진작 이렇게 됐어야 했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은 정색을 했다.
“우리 그란사나교가 이렇게 발전한 것도 모두 우리 황제의 혈통 때문이야. 우리가 강대국의 힘을 갖게 된 것도 모두 그 때문이라고. 모르는 소리 말게.”
“그럴지도 모르죠.”
상대가 정색을 하니 말을 받아주던 사람은 찔끔하여 얼른 수긍하는 척을 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나저나 이 대관식에 신황도 참석한다고 그러지 않았던가?”
“맞아요. 악시아 신황이 오랜만에 공식석상에 얼굴을 내민다고 하더군요.”
“자기 아들 장례식에도 안 나온 작자가 여기는 나온다니 우습군.”
“그게 말이죠. 참으로 희한한 말을 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맞대고 속닥거렸다.
“악시아 신황이 여기 나온 이유는 말이죠······.”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날 뻔 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라고? 그것이 정말인가?”
“아, 그렇습니다. 교후파한테서 흘러나온 소문이니 확실하죠.”
“이 나라가 어찌 되려는지······.”
그는 머리를 짚으며 한탄을 했다. 색소가 짙은 머리색을 가진 것을 보니 그에게도 황가의 피가 약간이나마 흐르는 모양이었다.
“그럼 악시아 신황은 어디에 있는가?”
“저기 위를 보세요.”
화려한 제단의 바로 위. 초대 신성황제의 허벅지 부근에는 붉은 비단으로 꼼꼼히 싸고 발을 내려 안이 보이지 않게 처리한 곳이 있었다. 평범한 대관식에서라면 그곳에 신황이 앉아 새로운 황제에게 축하의 기도를 올렸겠지만 지금은 안에 누가 들어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정말로 저 안에 악시아 신황이 있는 겐가?”
“모르죠. 신관들이 그렇게 말하니 그렇게 알 뿐.”
“하지만 저렇게 꽁꽁 감추어놓아서야···알 수가 있나.”
“하긴 지금으로써는 저 속에 돼지를 갖다놓고 안에 신황이 계시다 해도 믿어야 할 판국이죠. 성청의 힘이 너무 크니까요.”
두 사람은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그들보다 한참 앞에 자리를 잡은 자들은 입고 있는 옷부터가 눈에 띄었다. 
궁전사정에 훤한 귀족들은 일반 하객이나 외국의 귀빈들에 비해 보는 시각이 조금 달랐다. 그들은 저 꽁꽁 싸매놓은 발 옆에 선 것이 누구인지 모두 알아보았다.
짙은 콧수염을 기르고 전신 무장을 한 남자. 대대로 황제의 직속기사를 지내온 키리오 본 모라시니 백작.
그가 옆에 섰다는 것은 저 안에 든 것이 신황임에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키리오 백작은 어느 편을 들 거죠? 황제의 직속 무사인 만큼 이제부터는 교후를 모시게 되는 걸까요?”
“말도 안 되지 않을까요? 그들이 어떤 집단인데···교후와 황제는 계속 대립해 오고 있잖아요.”
“하지만 그는 황제를 위해서 존재하는걸요.”
“교후는 황제가 아니지만···적통한 황실의 후계자가 더 이상 없는 마당에······.”
그들은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 떠들어봐야 소용없어요. 모든 것은 대관식이 끝난 다음에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요.”
“그렇군요.”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이제 대관식이 시작될 모양입니다.”
제단의 끝에서부터 교후가 천천히 이동하면 대관식이 시작된다. 노랫소리는 더욱 크고 힘차지며 신관들이 기도가 시작된다. 원래는 교후가 해야 하는 기도지만 교후 스스로가 대관식의 수혜자니 해줄 사람이 없었다.
악대의 웅장한 연주 속에 교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오기 시작했다.




대관식이 치러지고 있는 뒤쪽에서는 머리가 희끗하고 피부는 붉은빛이 돌며 얼굴형이 길쭉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행색이 볼품없고 존재감도 없는지라 사람들은 그를 본체만체 했다. 어디 외국의 사절단인 모양인데 하고 있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저 멀리 가난한 남방국가 어디에서 온 모양이었다. 그곳은 국가라는 형태도 아직 제대로 잡히지 않은 야만적인 나라들이 몰려있었다. 시녀들도 시종들도 그를 못 본 척 했고 귀부인들은 노인의 옆을 지나가면서 대놓고 인상을 썼다. 
하지만 노인은 이러한 무례를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아니 그는 그러한 대접이 좋은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어둑한 쪽으로 슬금슬금 몸을 움직였다.
이윽고 인적이 없는 곳에 도착한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깊고 풍부한 음성으로 중얼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지금은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잊혀진 언어였다. 하지만 그 높고 낮은 중얼거림이 계속되자 그의 심장 언저리에서 뜨끈한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노인은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기운이 다 빨린 듯 피로해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입만은 쉬지 않고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혀가 모음과 자음을 뱉어낼 때마다 노인은 죽음이 경각에 이른 것처럼 괴로워했다. 그의 고통스런 몸부림을 어디 눈 좋은 시종이 발견하고 멀리서 달려왔다. 성스러운 대관식의 날에 궁에서 죽어나가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봐요.”
시종은 노인의 몸을 흔들었다.
“이봐요. 괜찮습니까?”
“날 놓아라.”
노인이 헐떡이며 말했다.
“너 때문에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갈 판이다.”
“지금 의사에게 데려다 줄 테니······.”
하지만 시종은 듣지 않았고 그는 노인을 엎고 일어나려 했다.
그의 불행은 바로 그 순간 일어났다. 등 뒤로 다가온 수상쩍은 그림자가 시종의 목을 내리쳐 그의 숨통을 순식간에 끊어놓은 것이었다.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을 뿐인 시종은 그대로 죽어서 축 늘어졌다. 노인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수상한 인물은 노인의 팔을 잡고 질질 끌어다 누구의 눈에도 닿지 않는 곳에 숨겼다.
“죽일 필요까지는···없었잖소.”
노인이 말했다.
“그렇지 않다.”
남자가 말했다.
“살려두면 그는 도움을 요청하러 뛰어나갔을 거고 빠르던 늦던 어차피 나는 그를 죽였어야 한다. 화근은 애초에 제거하는 것이 옳다.”
그는 살며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후드의 그림자에 가려졌던 얼굴이 반쯤 밖으로 삐져나왔다. 노인은 그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남자는 약간 웃었다. 그는 노인의 어깨를 장난치듯 툭툭 건들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축하의 노래가 끝나고 긴 복음의 낭독이 있은 후, 모두가 궁금해마지 않던 붉은 천이 스르르 벗겨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천이 벗겨지는 데만도 한참의 시간이 걸린 후에 발이 위로 말려 올라가고 드디어 악시아 신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 일리야스의 장례식 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악시아가 교후의 대관식에 나타난 것이다. 몇 년 만에 나타난 그는 예전보다 조금 더 살이 빠졌고 머리가 길었으며 어딘가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멍하니 앞만 보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하객들 중에는 악시아 신황이 젊었던 때를 기억하는 자들도 있었다. 

광기에 휘둘려 전쟁을 선포하고 피를 즐겨 노예의 피를 뽑아다 그 속에서 헤엄을 쳤던 젊은 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곱게 늙어버린 촌부의 모습이었다. 귀족들은 경악하여 굳어버렸고 성청의 신관들은 무표정을 고수했다. 그들에게 신황의 저런 모습은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같이 좋은 날에 이처럼 모여주어 기쁘오.”
악시아 신황이 입을 열자 노인의 칼칼한 음성 대신 낭랑하고 매끈한 목소리가 울렸다. 기분 나쁘도록 고운 목소리였다. 분칠한 밀랍을 목구멍에 밀어 넣고 조금씩 삼키는 기분이 든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소름이 돋아서 저도 모르게 팔을 문질렀다.
“여기에 한 가지 소식을 더 전하려하오. 나의 첩 중 하나가 임신을 하여 이제 배가 부르기 시작하였소. 그 아이로 나는 황실의 혈통을 잇게 할 것이오. 하지만 아이가 대통을 잇기 전까지는 섭정을 해야 하겠는데 그 아이의 어미가 비천하여 배운 것이 없는데다 나는 늙어 자격이 없소. 그러므로 나의 충신 교후 사무엘.”
모두의 시선이 사무엘에게로 쏠렸다.
“그대를 오늘부로 나의 양자로 삼으니,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이 나라를 다스리라.”
그 순간 사방에서 얼빠진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미리 소식을 접하지 못한 귀족들이었다. 누군가는 큰 소리를 내기도 했고 누군가는 화가 나서 발을 굴리기도 했다. 흥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곧 그런 점잖지 못한 소리들은 사라지고 차디찬 침묵만이 흘렀다.
“감사합니다, 폐하.”
사무엘은 허리를 피며 말했다. 고귀한 인품만이 드러나던 얼굴에 거칠 것 없는 당당함이 흘러넘친다.
그는 성결한 외모와 천진한 아름다움으로 추앙받던 교후. 두 손을 벌려 가슴을 열어놓고 세상의 모든 죄를 감싸주던 그가 이제 그 손에 왕홀을 쥐고 권력을 쥐고 아래를 굽어보며 자신의 위명을 떨치려 하고 있었다.
“그럼 식을 계속하겠나이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교후의 대관식이 진행되었다. 명분에 이어 정통성마저 획득한 사무엘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의 몸에 기름을 바르고 신관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황태자가 걸어 나와 교후의 앞에 서서 기름을 바르고 축복을 받은 후 교후로부터 관을 수여받았을 테지만 교후가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하니 축복받을 사람도, 축하해줄 사람도 없었다.
열두 대신관이 대관식의 마지막 순서로 관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을 사무엘에게 건네주었다. 신성의 황제가 세속의 황제에게··· 하지만 사무엘 스스로가 신성의 황제였기 때문에 그에게 관을 수여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사무엘은 스스로 관을 들고 자신의 머리에 얹을 것이다.
가장 젊은 대신관에서 가장 젊은 교후가 되더니 이제 최초로 신권과 황권을 통일하는 교후이자 황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신성 황제여.’
사무엘은 심장의 차가운 빛을 어루만졌다.
‘당신의 피에 흐르는 오독의 성혈이여. 천 년간 검은 머리 위에서만 빛나던 황제의 관을 나는 스스로 얹으리.’
“오오!”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친황제파들도 친교후파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수도의 모든 종이 일제히 울리자 세상이 사무엘의 부름에 화답하는 듯 했다. 꽃과 색종이가 사방에 흩날리고 거대한 다이아몬드 심장은 사무엘의 금발머리 위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빛났다. 아니 실제로 그것은 살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핏빛 다이아몬드 심장은 초대 신성황제 그란사르스의 심장이 변화된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그것은 황제 그 자체를 의미하며 나라의 국권을 상징한다.
환희와 함성. 웃고 떠들던 사람들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여전히 종소리는 장중하고 악대의 음악은 아름답고 꽃은 휘날리지만 그 중앙에 선 교후의 모습이 이상하다.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국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줘야 할 시간인데 그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한 채로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교후?”
대신관중 하나가 사무엘의 앞으로 다가왔다.
“교후 왜 그러십······.”
사무엘을 부축하려던 그는 손을 뻗다말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무엘의 볼을 타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무엘은 멍하니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그리고 손가락을 피니 그곳에 붉은 피가 가득했다.
“교후!”
누군가 사무엘을 손가락질했다. 그의 손가락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교후! 교후의 머리가!”
순식간에 사방에 비명이 난무하고 사람들은 체통도 잊은 채로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이 불길한 곳에서 멀어지고자 했다.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심장에는 한 가지 전설이 더 있었는데 그것은 신황의 재판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왕이 그것을 머리에 썼다가는 심장의 그의 머리를 쪼개어버린다는 전설이 있었던 것이다.
“전설이 사실이었어!”
여자들이 고함을 질렀다.
“그는 맞지 않아! 맞지 않아!”
“황제가 심판을 내렸다!”
사무엘의 눈동자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반쯤 튀어나왔다. 작고 아름다운 그의 두개골이 스펀지를 쥐어짜듯 가운데가 움푹하게 되었다.
“살려줘.”
사무엘은 파리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제 눈에서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살려줘요···대부님.”
가장 나이든 대신관이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사무엘의 손을 내쳤다. 그의 얼굴이 참혹하다.
“사무엘!”
악시아 신황이 비명을 질렀다.
“나의 사무엘이!”
그는 체통도 잊고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렸다. 너무도 슬픈 나머지 나중에는 눈에서 피가 흘렀다. 2층에서 뛰어내리려 하는 악시아를 키리오가 잡았다. 그리고 그를 끌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방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악대도 더 이상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다. 종은 계속 올렸지만 더 이상 신성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았다. 교후의 머리가 쪼개져 그가 바닥에 쓰러지자 그것은 축복의 종소리가 아니라 심판의 종소리로 변질되었다. 
“그는 재판을 받았다.”
한 남자가 어둑한 곳에서 걸어 들어와 사무엘의 위로 몸을 구부렸다. 그가 황제의 관을 벗기자 사람들이 놀라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참람하게도 황제의 자리를 넘본 죄는 크다. 그러나 그는 죗값을 치렀다. 내가 그를 용서한다.”
“당신은 누구요.”
공포에 질린 귀족들이 물었다.
“누구기에 그 관에 손대는 거요?”
남자는 대답 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의 머리위에 관을 얹었다. 그 다음에 일어날 끔찍한 재앙을 상상하며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장은 핏빛 몸체를 영광스럽게 빛냈고 황금의 관은 머리통이 쪼개지도록 조여들지도 않았다.
이에 남자가 망토를 벗어던지자 그 속에 감추어져있던 긴 머리채가 드러났다. 구불치는 검보랏빛 머리카락이 흩날리자 사람들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죽은 줄만 알았던 황제의 총자, 일리야스 악시아 본 모라시니 그란사르스였기 때문이었다.
“전하!”
대신관이 비명을 질렀다.
“미왕!”
귀부인들도 비명을 질렀다. 모두가 그를 손가락질했다. 사무엘의 시신 위에 서서 심장과 함께 빛나는 자는 불에 타 죽었다던 일리야스였다.
“전하! 아니 폐하!”
친황제파의 귀족들이 눈물을 흘리며 다가와 그의 옷깃에 엎드려 절을 했다. 이제 황제가 된 일리야스는 그들의 눈물과 손짓을 가만히 두고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후가 죽었으니 새 교후가 필요하겠구나.”
“말씀만 하소서.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황제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한번 죽었다. 하지만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나에게 소명을 주시고 나를 치료하시고 내게 그의 증표를 보내셨다.”
“어떤 증표입니까. 우리에게도 보여주소서.”
“그는 신의 약속이자 증표. 나의 새 교후니, 너희는 모두 그를 받아들여 새 약속의 지표를 열어라.”
그렇게 황제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더니 손을 벌려 큰 소리로 외쳤다.
“나와라, 신의 교후여!”
그러자 허공에서 작은 불씨가 생기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불꽃으로 화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경악하여 바라보는데 그것은 이내 하나의 몸통과 사지를 가진 형상으로 되었다. 대회랑에 모인 기사와 군인, 시종장과 시녀들, 신관과 하녀, 외국의 손님들과 귀부인들이 숨죽인 채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오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소년도 청년도 아닌 남자가 허공에서 나타나더니 이내 황제가 그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몸에 여신의 색이 물들어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새까만 머리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두 검은 머리채가 엉키고 남자는 어리둥절하여 눈을 깜빡거렸다. 황제의 것처럼 새까만 동공이 눈을 떴다 감았다 했다.
“소개한다.”
황제가 말했다.
“신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새 교후다.”
사람들은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것은 아까와 같이 비명과 혼란이 뒤섞인 것이 아니었다.
함성. 깨어질 듯한 함성이 백색궁을 뒤흔들었다. 신이 그들에게 전설을 재현하였다. 기적이 새로 역사를 쓴다. 신성을 되찾은 그란사나여. 빛나는 금발에 더럽혀질 뻔 했던 고귀한 혈통이여. 이제 그대 앞에 무한한 영광만 있으라.
기적과 환호의 중심. 그곳에는 어리둥절한 검은 눈을 깜빡이며 한조가 서 있었다. 




‘당신같이 고귀한 자와 우리가 무슨 거래를 하겠소.’
주술사는 슬픈 목소리로 아뢰었다.
‘땅을 지키고 싶으냐.’
미왕은 허리를 굽혔다. 그의 허리가 굽어지자 보랏빛 머리채가 좌르르 흘러내려 발같이 드리워졌다.
‘너희들의 정신을 지키고 싶으냐.’
주술사는 말이 없었다.
‘내가 힘을 주겠다.’ 
미왕의 목소리에는 독이 있어서 듣는 이의 귀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것은 사막의 뱀처럼 치명적이고 여인의 부채 끝처럼 유혹적이었다. 독이 있지만 아름답다. 남자라면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으리.
‘우리가 그 대가를 치를 수 있겠소이까?’
‘그것은 두고 보면 네가 알리라······.’
그리고 주술사는 알게 되었다.




“열 두 대신관의 교지를 들고 오라.”
일리야스가 첫 번째 대명을 내렸다. 백의 기사단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성청 깊숙한 곳에서 버티고 있는 열 두 대신관에게 들이닥쳤다. 대신관들은 교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 했지만 기사들의 완력을 당할 수 없었다.
두 눈에 시퍼런 분노를 담고 열 두 대신관들이 백색궁으로 왔다. 그들을 마주한 일리야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이런 이런. 교지를 들고 오라 했는데 그 주인들까지 데려오다니··· 나의 기사는 실력이 없구나.”
“황제폐하. 왜 우리의 교지를 빼앗으려 하십니까.”
최고 대신관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폐하의 충실한 종입니다. 저들을 시켜 우리에게서 교지를 뺏어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달라고 하소서.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달라 하라고?”
일리야스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와 대신관의 눈이 공중에서 만났다. 일리야스의 눈은 짙은 검은색. 끓는점도 녹는점도 없는 미적지근한 온기가 그 속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금빛 빛나는 관을 쓴 그의 모습은 시구의 영웅처럼 근사하나 젊음의 패기도 최고 권력자의 지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느껴지는 것은······.
“달라하라 했는가.”
최고 대신관이 말을 이었다.
“우리를 시험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의 종복이자 충신입니다.”
“그렇다면 대신관들아.”
일리야스가 말했다.
“너희가 스스로 준다 하였으니, 너희들의 손으로 그것을 내놓아라.”
그 말에 대신관들의 얼굴에 화가 치밀었으나 최고 대신관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우리 손으로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한 명씩 교지를 일리야스의 앞에다 내려놓았다.
열 두 명이 돌아가며 교지를 내려놓고 불안한 얼굴로 일리야스의 명을 기다렸다. 스스로 교지를 내어놓았으니 그들은 이제 대신관도 뭣도 아니게 되었다. 일리야스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모라시니 공작. 그들이 교지를 스스로 내놓았소.”
“그렇습니다. 폐하.”
뒤에서 모라시니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더 이상 신관이 아니군.”
“그렇습니다. 폐하. 이 자들은 모반을 꾀한 대가로 스스로 교지를 내놓은 것입니다.”
그 말에 얌전히 허리를 굽히고 있던 대신관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앞으로 다가오려 했으나 기사들의 막아섰다.
“폐하! 폐하! 무슨 소리십니까.”
“너희들이 모반을 꾀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일리야스는 시종일관 고개를 엇각으로 한 채로 말했다.
“너희는 내가 병마에 시달릴 때 검은 탑에 불을 질러 나를 죽이려 했다. 그리고 사무엘 교후를 내세워 나를 실각시켰다. 그것이 모반이 아니라 무엇이냐.”
“교후로 섭정을 하려 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모두 나라를 위하는 충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최고 대신관이 반론했다.
“탑에 불을 지른 것은 사실무근입니다. 우리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증인이 있다. 신관으로 보이는 자들이 다수 몰려나와 탑에 불을 질렀음이 확인되었다. 너희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성청의 자주적인 의지라 보면 되겠구나.”
“성청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들은!”
“내 말을 믿지 않는군.”
일리야스가 웃었다. 모라시니가 귀를 가까이 가져다대고 속닥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가? 내가 거짓증거라도 만들었다는 건가?”
“그것이 아닙니다!”
“듣기 싫다!”
일리야스가 탕, 팔걸이를 쳤다. 그러자 기사들이 대신관들의 팔을 잡아 움쩍달싹 못하게 하였다.
“너희들은 반역자들이다! 반역자들에게는 재판도 필요하지 않다. 여봐라. 그들의 손을 결박하고 지하 감옥에 처넣어라. 돼지나 먹는 것들을 먹이고 고문하라. 그러면 저들이 저희의 죄를 실토하리라.”
“폐하!”
대신관들이 거세게 반항했다. 그러나 훈련받은 기사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모라시니가 손짓하자 그들이 일제히 대신관들의 관을 떨어트렸다. 그러자 대신관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손발이 축 늘어졌다. 관하나 떨어졌을 뿐인데 그들의 팔이나 다리가 떨어져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열 두 명의 작은 왕. 들어올 때는 왕이었지만 나갈 때는 역적의 딱지가 붙었다.
“이자들을 모두 잡아와라.”
일리야스의 두 번째 대명은 교후 사무엘을 도와 대관식을 진행한 귀족들을 전부 잡아들이라는 것이었다. 그 리스트는 끝도 없이 길었다. 최고 대신관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재판이 귀족들에게만 허락될 리가 없었다. 그들의 죄명은 황태자 시해의 죄. 형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사형이었다.
나라가 홀딱 뒤집어지는 대대적인 소동이 벌어졌다. 황실의 병마와 악시아 신황의 정신병으로 인해 속에서부터 썩어나던 것들이 제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용트림을 했다. 일리야스는 케케묵은 것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검은 신성의 위엄을 채웠다. 일리야스의 손끝에서 생명이 분탕질을 쳤다. 그때마다 사형집행인의 도끼가 하늘도 가를만큼 높이 치솟았다. 목 잘린 시체가 줄줄이 이어지고 교수대의 밧줄이 출렁출렁 춤을 추었다.
“목 잘린 것들을 다리아래 걸어놓아라. 그러면 그들이 나의 권위를 보고 나의 두려움을 알리라.”
지엄하신 명령에 사형집행인들은 귀족의 대가리를 주전자에 넣고 소금과 커민과 함께 익혔다. 그러면 그 고귀한 대가리들은 최소한 일주일은 썩지 않고 보존될 것이다. 그것을 다리아래 주렁주렁 메달아 놓으니 저 멀리서도 그것들의 일그러진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너무하다 들고 일어설 수도 없는 것이 민심이 황제의 편이었다. 장례식도 치룬 황태자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스스로 관을 쓰고 세속의 황제가 되었다. 이쪽저쪽 눈치를 보던 박쥐같던 중간파도 철저한 황제파로 돌아섰다. 목이 간당간당하니 누구라도 황제의 발끝에 엎드려 절을 하게 된다.
피의 다이아몬드 심장도 인정한 황제다. 황제가 불을 일으키자 전설의 여신의 환생인 듯, 신비로운 남자가 불 속에서 튀어나왔다. 모든 것이 전설 그대로였다. 흥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깜빡 속아 넘어갔다. 교활한 황태자. 치사한 술수로 황제가 된 황태자. 사람들은 그를 저주하며 죽었다.
“나의 교후야.”
일리야스가 한조에게 일렀다.
“네가 정식으로 너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들이 죽는 것을 보러 가자꾸나.”
“내가 왜 그곳에 가야 합니까?”
한조가 물었다. 그는 지하 고문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고문 받던 사람들, 죽어가던 사람들. 지글지글 끓는 황소와 배가 파 먹혀 죽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들은 남방의 야만한 족속들이다.”
일리야스가 답했다.
“앞으로 그 땅을 내가 초토화 시킬 것이다. 성청과 대신관들이 대관식 전까지 진행하던 일이지. 너는 새 교후로서 그들을 지켜볼 의무가 있다.”
한조는 입술을 깨물고 잠자코 일리야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안타깝게도 한조는 남방에 사는 사람들이 야만인인지 아닌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교후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알지 못했다. 교후의 의무 좋아하시네. 지위가 높아진들 무슨 소용인가. 그는 여전히 일리야스의 방 바로 옆에 감금되어 있는데 말이다.
한조가 머무는 장소는 계속 바뀌고 있지만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돌로 된 추운 탑에서 깨끗하고 너른 방으로 바뀌더니 이번에 옮겨진 방은 비단으로 네 귀를 두르고 금과 은과 보석으로 장식을 한 호사스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한조는 잠시도 그 방에 있고 싶지 않았다. 어디에 머무르건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차라리 쓰레기장에서 자더라도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
눈과 귀를 막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며 일리야스는 한조를 감금해놓았다. 그리고서 네 지위가 높다 말한다.
“황제 다음가는 자리입니다.”
깍듯이 예의를 지키며 여인이 말했다. 그녀의 다소곳한 손길과 정중한 몸짓에 한조는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은 그란사나교의 수장이십니다. 곧 당신에게 맞는 예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여인의 말대로였다. 곧 한조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그것은 누가 어떻게 진행했는지도 모를 만큼 빠르고 급격했다. 아침부터 깨워져서 온갖 치렁치렁하고 나풀나풀하며 길고 죽죽 늘어지는 흰색의 옷을 입히더니 흑색궁전의 문을 열어놓고 그 앞에 문무백관을 세워놓았다. 
수십 명의 신녀들과 신관들이 창백한 얼굴로 한조를 맞이했고 가장 깊숙한 안쪽에는 일리야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역시 온갖 치렁치렁하고 나풀나풀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색만 달랐다. 그의 것은 검은색이었다. 
“그대에게 내가 영광을 내린다.”
일리야스는 고조가 없는 억양으로 말했다. 신녀들이 한조를 푹신한 쿠션 위로 무릎 꿇렸다. 
“나의 권한으로 그대는 영광스럽게 되라.”
이 대관식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는 한조만 빼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란사나의 황제는 세속의 왕. 그란사나교의 교후는 신성의 왕. 원래대로라면 교후가 황제의 머리에 관을 얹어 주었어야 하는 것을 황제는 거꾸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새 교후가 누구인가. 불속에서 튀어나온 여신을 닮은 자다. 그의 눈과 머리는 황제보다 더 검었고 피부에는 독특한 색의 윤택이 흘렀다. 이 세상 것이 아닌 자······. 그것이 새 교후인 것이다.
그런 이를 무릎 꿇어 그 머리에 관을 씌운다는 것은 일리야스가 종교를 자신의 발아래 두겠다고 선포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도 못하는 사이 한조는 머리에 묵직한 것을 얹었고 신녀들에 의해 일으켜 세워졌다. 관은 한조의 머리에 맞지 않아 이마까지 흘러내렸고 한조는 한 손으로 그것을 지탱하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 
어리둥절하여 좌우를 둘러보려는데 사방의 귀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는다. 차마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한조는 당황하여 목석같이 굳어버렸다. 저 쪽에서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다음가는 자리······. 하지만 그들이 한조에게 보이는 것은 황제를 대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들은 한조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네가 정식으로 교후가 되었으니.”
일리야스는 한조의 턱을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이제 남방의 야만인들을 처형하러 가자꾸나.”
“싫어요.”
한조는 일리야스의 손을 내팽개치려 했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웃으면서 놓아주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자가 본다면 두 왕들의 사이가 좋다 하겠다.
“하지만 너는 그곳에 가야만 한다.”
일리야스는 한조의 허리를 끌어안아 뒤에 줄줄이 선 귀족들의 눈을 피했다.
“네 대관식을 위해 이날을 미루어왔다. 이제 네가 교후가 되었으니 가서 그들이 어떻게 죽는지 보아라. 그것이 너의 의무다.”
“거짓말! 날 괴롭히기 위한 거면서!”
“착각마라, 교후.”
일리야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입술만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어서 한조만이 그의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너를 놀리기 위해 이러는 줄 아느냐. 교후로서의 네 입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한 일리야스는 한조를 잡아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곳은 성을 벗어나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 있었다. 몇 만 명은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큰 광장에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한조와 일리야스는 높은 곳에 마련된 특등석에 앉았다. 이윽고 교수대위로 사형집행인이 올라오고 눈을 가리고 옷차림이 독특한 사람들이 끌려 올라왔다. 한조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사형. 그는 지금 사형을 참관하러 온 것이다.
“가게 해주세요.”
한조가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발···가게 해주세요. 전 이런 거 못 봅니다.”
“나로써도 굳이 너를 앉혀놓고 싶지는 않다.”
일리야스가 말했다.
“하지만 너는 교후고, 우리 그란사나교의 수장이다. 저들은 우리 신의 적, 음지의 더러운 것들과 사통한 죄로 기소되었다. 너는 그란사나 교인으로서 저 불손한 이방인들의 최후를 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한조는 다 필요 없었다. 그란사나교고 교후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었다. 한조는 21세기에 살았고 사람 죽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 외할머니 장례식에 갔던 것이 그가 기억하는 죽음의 최대치였다.
살인도 고문도, 모두 한조에게는 끔찍하게만 다가올 뿐이었다. 저기 광장에 사람 잡는 것을 구경하러 나온 자들과는 달랐다. 한조는 눈을 가리려 했지만 일리야스가 밑에서 손을 붙잡아왔다.
“고개를 돌리지 마라.”
일리야스가 속삭였다.
“눈물도 흘리지 마라. 너는 교후다.”
일리야스에게서 울지 말란 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지 싶었다.
집행인이 큰 소리로 사형수들의 죄목을 읊었다. 신성모독, 신성모독, 신성모독······. 
사방은 조용했고 사형수들 역시 조용했다. 곧 죽을 자들치고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이윽고 밧줄이 그들의 목에 걸렸을 때였다. 갑자기 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황제여! 그대를 믿었는데!”
다음순간 교수대 바닥이 푹 꺼지며 그들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한동안 억눌린 몸부림과 비명이 흘러나오더니 곧 잠잠해졌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시 말이 나오겠지.”
일리야스는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필요한 조치였음을 나중에는 모두가 알리라.”
그는 한조를 돌아보았다. 한조는 앉은 채로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시체가 내려지자 다시 그만큼의 인원이 위로 올라가 밧줄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또 바닥이 꺼지고, 또 시체가 줄렁줄렁 몸부림을 치고.
“울지마라. 한조야.”
일리야스는 냉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나 한조를 잡고 있는 손에는 힘이 꽉 들어갔다. 
“오늘만 참으면 네게 다시는 이런 것을 보이지 않겠다.”
한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30~32편
밤이 되어 방으로 돌아온 일리야스를 모라시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다.
“저는 폐하를 믿습니다. 하지만 이교도들에게 너무한 처사가 아니냐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교후 사무엘은 남방 교역에 힘을 쏟긴 했지만 평화적으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왜 갑자기 교역에 관심을 보이는 것인지요.”
“교역?”
일리야스는 피식웃었다.
“누가 교역에 관심이 있다 하던가.”
“그러면 왜 그러셨습니까.”
“북방인들이 쓴 남방 견문록을 읽어보았는가?”
“아니요. 북방인들이 쓰는 문자는 우리가 쓰는 것과 차이가 있어 부끄럽게도 아직 해독법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별로 유명한 책은 아니다. 그저 어디를 가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받았다는 것들이 기록된 책이지. 그런데 그 중에서 흥미를 끄는 대목을 발견했다. 그래 여기쯤이던가··· 남방으로 가면 편편한 땅바닥에서도 납이 돌처럼 튀어나와 있어······ 황태자 시절에 이 부분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었지.”
일리야스는 책을 눈으로 더듬었다.
“조사결과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만한 납이 있으면 우리는 도시에 더 많은 수로를 건설할 수 있고 배수관도 신설할 수 있게 된다.”
모라시니는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두 눈은 젊은이의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납은 여러모로 쓸모 있는 광물이었다. 어떻게 보면 금광만큼이나 중요했다. 그것은 녹여서 백랍을 만들 수도 있었고, 백랍은 땜질과 화장품, 염색 공예에도 사용된다. 물건과 패션사업에 필요한 광물인데 원자재만 있다면 장인을 양성하여 유행을 주도할 수 있다. 게다가 남방의 주술사들은 금과 은을 예사로 걸고 다녔다. 
그란사나에서도 작은 신전은 금으로 된 식기나 은으로 된 성물은 구하기가 힘든데 남방 주술사들이 사용하는 주술도구들은 죄다 금붙이였다. 그 땅은 석영이 많고 산에 호수나 강 따위가 흘러 채굴하기에 좋은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일리야스는 그란사나식의 도수관을 설치하여 배수로 물을 뺀 후 흙을 걸러내면 지금보다 금 생산량을 40% 이상 늘릴 자신이 있었다.
사무엘은 신의 사업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것이 그의 태생적 한계라고 일리야스는 생각했다. 교역은 정신적인 지주를 무너뜨린 다음에 해도 충분하다. 그들은 신성제국 그란사나보다 미개하나 생활  수준만큼은 풍요로웠다. 따뜻한 남쪽의 땅에서 곡식은 영글고 강물은 범람하며 미신과 주술이 판을 친다. 그런 자들에게 신의 은혜나 사랑을 가르쳐봐야 무엇하겠는가. 원래 종교의 씨앗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꽃피우기 좋은 것이 아닌가.
“나는 아버지처럼 자신의 사욕을 위해 전쟁을 벌이는 황제는 되지 않는다, 모라시니. 사무엘 교후처럼 종교의 전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아. 보석으로 뒤덮인 나라는 필요 없다. 보석이 물을 보내주지는 않으니까 말이지. 광석을 파내라. 그리고 그것으로 물건을 만들게 해라. 그리고 다시 수출하는 거다. 광물을 공짜로 파낼 수만 있다면 말이지.”
“하지만 당신은 약속을 어겼소.”
그때 촛불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그림자가 일어나 일리야스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비칠비칠 흔들리고 있었다. 앞으로 내민 두 손이 촛불의 음영에 닿아 가운데가 검고 푹 파져 보였다. 
“그들은 모두 당신을 저주하며 죽었소. 지금도 들리는 듯 하구려. 나의 동포들이···당신을 저주하고 있소, 황제여.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요!”
늙은 주술사는 고통스럽게 외치더니 일리야스의 몸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예의 나른한듯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답이 없었다. 일리야스를 앞뒤로 흔들던 주술사는 서서히 아래로 미끄러져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남방의 주술사야.”
일리야스가 부드럽게 일렀다.
“환상의 주술사야.”
주술사는 일리야스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첫눈에 마음을 앗아간 미왕이 그곳에 있었다. 뱀처럼 아름답구나··· 주술사는 눈물을 흘렸다. 한 번 더 보게 된다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독이로구나. 그 독으로 네가 나를 물었구나.
동포를 죽인 원수를 앞에 두었건만, 슬픔이 간을 녹이건만, 주술사는 여전히 그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독에 눈이 멀어 일리야스를 위한 광대가 따로 없었다. 그가 손을 뒤로 돌리더니 주술사가 감추어둔 단검을 끄집어냈다. 주술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일리야스의 발밑에 조아렸다.
“왜 우느냐.”
일리야스가 물었다.
“뭐가 서러워서 울지?”
“내 사랑이 저주스러워 우오.”
주술사가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의 사랑도 저주받았소.”
“내 사랑?”
일리야스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동포들이 죽을 때 당신의 사랑을 저주하며 죽었소. 나는 이제 그 저주를 옆에서 지켜볼 참이라오. 당신의 얼음으로 된 심장이 부서지기를 바라며 당신 곁에 머무르겠소. 황제여. 우리 남방의 환상술사는 거짓을 보여줄 뿐이지만 마음을 다해 바라면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오.”
“흥.”
가만히 듣고 있던 일리야스는 곧 흥이 식었다는 듯이 주술사의 얼굴을 옆으로 던졌다. 그리고 입고 있던 옷을 훌렁 머리서부터 벗어던졌다. 약간 마른 듯 하지만 후리후리하게 라인이 빠진 상체가 드러나고 쭉 뻗은 하체도 드러났다. 주술사도 모라시니도 말없이 일리야스의 벗은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일리야스는 편안한 로브형 잠옷을 걸쳤다. 옷 안으로 기어들어간 긴 머리채를 한꺼번에 잡고 쭉 훑더니 허공에서 흐트른다.
“재미없구나.”
분노와 후회로 가득하던 주술사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확인한 일리야스는 여상한 어투로 말했다.
“네 이야기는 지루하다.”
주술사는 고개를 외면해버렸다.
“그만 물러들 가라. 나는 음식을 취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모라시니는 주술사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주술사는 눈물만 뚝뚝 흘릴 뿐 반항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일리야스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통하는 또 다른 문을 열었다. 그것은 이중의 열쇠로 잠기어 있는 황제의 사적인 공간으로.
“일리야스님!”
안에 들어있는 것은 한조였다.
“낮에는 밖에서 울었지?”
일리야스는 한조에게로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한조는 일리야스가 갑자기 다가오니 놀라서 뒤로 빠지려 했다. 하지만 일리야스의 두 팔이 힘 있게 그를 붙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하체가 착 맞붙었다. 한조는 일리야스의 가슴팍에 두 손을 얹고 밀어내는 한편 맞붙은 하체도 떨어뜨리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다.
“나를 위해 한 번 더 울어라.”
“싫어요!”
누구를 눈물 뽑는 자판기로 아나. 한조는 슬픈 영화도 안 보여 주면서 울어라 울어라 하는 일리야스에게 짜증을 냈다.
“놔요! 일리야스님, 놔요!”
“못 놓는다.”
방금까지의 침착한 표정과 여상한 어투와 차가운 눈빛은 어디로 가고 일리야스는 어딘가 모르게 다급해보였다. 그의 속에서 한조가 발버둥을 치니 일리야스의 낯빛이 어둑해진다. 그는 성급하게 한조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여기서 눈물이 나오지··· 일리야스가 속삭였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으로 메마른 눈가를 손가락으로 마구 찌르는 바람에 한조는 아파서 인상을 썼다. 
“아파요! 놔요!”
“울어라, 울면 놓아주마.”
일리야스의 숨결이 코앞에서 느껴지는 바람에 한조는 없던 유연성을 발휘하여 허리를 길게 들이뉘였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한조가 도망가는 만큼 따라와 또다시 눈가를 연방 찔러댔다. 
품안에서 뛰어봤자 부처님손바닥의 손오공이라. 일리야스의 너른 가슴팍 안에서 한조가 이리저리 몸을 굴렸다.
“이 나쁜 것! 낮에는 그것들을 위해 잘도 울더니 나를 위해서는 못 울겠단 거냐!”
결국 인내심 없는 일리야스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한조를 꽁꽁 싸매고 있던 손을 풀어버렸다. 한조는 바닥에 내쳐졌지만 곧바로 일어나 쏜살같이 도망을 갔다. 자기가 풀어줘 놓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니 아니꼬운 모양이다. 일리야스가 곧바로 뒤쫓아 왔다.
“앗!”
순식간에 허리가 낚아채어지고 한조는 잠시 공중에 붕 떴다가 일리야스의 품안에 안착했다. 그는 어찌나 힘이 센지 한손으로도 한조를 들 수 있을 정도였다. 한조가 이곳 사람들을 많이 겪어보진 못했으나 시중을 드는 두 여인들만 해도 한조만큼 힘이 셌다. 어떨 때는 한조보다 힘이 더 세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다 늙어빠진 모라시니도 한창때의 청년인 한조와 힘이 비슷했으니 청년이자 기사인 일리야스는 한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허리를 휘감고 다른 손으로 두 팔을 제압하니 어린애보다 쉽게 일리야스의 손안에 떨어졌다.
가쁜 숨만 훅훅 내쉬며 얼굴을 마주하는데 어둔 촛불 빛에 일리야스의 얼굴이 비쳤다.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는 잠옷을 입은 일리야스는 그새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포동포동한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고 오뚝한 콧대 옆으로 짙은 음영이 깔려 있었다. 두 눈가는 으슥하니 그늘져 깊이가 있는데 눈동자는 검어서 빠져들 것만 같다. 
그런데 표정이 어째 좀······.
한조는 일리야스의 얼굴을 올려보다 말고 으음, 소리를 냈다. 참 아름다운 미남자긴 한데 표정이 좀 맛이 가 있다. 두 눈은 검고 빠져들 것처럼 아름다운데 초점이 흐릿하고, 붉은 입술은 지금 보니 살짝 벌어진 게 아니라 헤벌어져 있다. 뭘 보나 싶어 시선을 따라가보니 그는 자신을 보는 중이었다. 그것도 이상한 얼굴로.
“왜···그럽니까?”
한조는 일리야스가 이상한 짓을 할까 두려워졌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학대하고 모욕했던가. 일리야스에게 손끝만 잡혀도 가슴이 벙벙 뛰었다.
“또, 또 때리려고요?”
“내가 왜 널 때린다고 생각하나?”
왜냐니. 지금까지 작작 팼어야 말이지.
한조는 여전히 벙벙 뛰는 가슴 때문에 숨도 쉬기가 어려웠다.
“때리지 않는다.”
일리야스는 한조의 뺨을 그러쥐려다가 남는 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내려 자신의 뺨을 한조의 것에다 갖다 대었다. 한조는 불에 덴 듯 히익, 소리를 냈다.
“걱정 마라. 때리지 않을 테니.”
일리야스가 얼굴을 댄 채로 속삭였다. 한조는 하도 놀라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이런 식으로 고문을 할 생각인가 보다. 손발이 발발 떨리고 심장이 너무 뛰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차라리 때려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다가 들어갔다.
“하아.”
일리야스가 알 수 없는 한숨을 짓더니 흐르는 눈물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마치 샘물을 마시는 것처럼 눈물의 궤적을 따라 올라가 눈가의 예민한 부분을 쭙쭙 빨았다.
“하아아······.”
한숨의 농도가 짙어지고 입술이 머무는 시간도 지나치게 길다. 이제 눈물은 나오지 않는데 일리야스는 떨어질 줄을 모른다. 한조의 상체가 뒤로 점점 무너졌다. 그만큼 일리야스도 점점 다가와 한조의 눈가를 빤다.
이놈이 왜 이럴까······.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숨만 쉬는 일리야스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실눈을 뜨고 어떻게 되가나 살폈다가 일리야스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36년쯤 수명을 단축하였다.
“이, 이제 됐잖습니까.”
한조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놓아 주세요. 됐잖아요.”
“그래. 알았다.”
하는 수 없이 일리야스가 손을 풀어주었다. 묘하게 아쉬운 표정이었다.
한조는 다시 저 끝으로 도망가 버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에이 씨···작게 욕도 한 것 같았다. 일리야스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한조가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불쑥 내뱉었다.
“안 더럽다.”
“더러워요.”
침 묻었잖아. 더러워. 네 손길도 더럽고 너도 더러워. 한조는 다시 한 번 입술에 붙었던 곳을 북북 닦았다. 일리야스의 표정이 정말로 안 좋아졌다.
“옛날에는 네 스스로 손가락을 물려주지 않았나.”
“그랬었죠.”
그때는 안 더러웠으니까······. 한조는 속으로 뒷말을 삼켰다.
“왜 지금은 내게 손가락을 물려주지 않는 거지?”
한조는 어이가 없었다. 일리야스를 보니 자못 진지하다. 이건 또 무슨 헛짓거린가 싶어 한조는 그냥 대답하지 않았다.
한조가 입을 다물자 일리야스는 옅게 한숨을 쉬더니 화제를 바꾸었다.
“상처는 어떠냐. 많이 나았느냐.”
“새로 내려주신 약이 효과가 좋아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았습니다. 친절에 감사합니다.”
안 그러려고 해도 말투가 베베 꼬인다. 한조는 굵고 붉은 흉터를 남긴 채 사라져가는 팔목을 보여주었다.
신전에서 보내왔다는 약은 효과가 좋아 꾸준히 바르면 흉터도 사라지게 만든다 했다. 치유의 기도를 담아서 판매하는 신전의 특별상품이었다. 교후를 위해 준비한 것이니 또 얼마나 좋은 것으로 뽑아다 줬겠는가. 어지간한 상처쯤은 금방 나을 만큼 효과가 좋았다.
‘그러고 보니.’
한조는 문득 생각이 났다.
‘저놈 등에도 상처가 있었지.’
몸을 씻겨주다 등에 울퉁불퉁한 흉터를 만졌던 기억이 있었다. 한조는 탁자에 놓여있는 약병으로 눈길을 줬다.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은 일리야스를 보면 그가 왜 미왕으로 불렸는지 알 것 같았다. 후리후리한 몸매에 시원하게 뻗은 사지. 가냘픈 얼굴에는 요사스러운 이목구비가 꽉 들어차 있다. 피부는 희고 부드러워 황제나 기사의 몸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조는 알고 있었다. 저 흠결 없는 몸에도 흉터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예전의 시체 같은 모습이었을 때 그의 등을 만진 적이 있기 때문에 한조는 알고 있었다.
‘말할까?’
한조는 일리야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일리야스는 한조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알자 갑자기 등을 꼿꼿하게 세우더니 자신만만한 얼굴을 했다.
‘저런 몸에 흉이 있는 게 아깝긴 하지. 그런데 뭐가 이쁘다고 내가 약을 줄까.’
곰곰이 생각하던 한조는 고개를 저었다. 어서 나가라는 시늉을 하려다말고 또 문득 멈추어 선다. 무섭고 흉한 얼굴이 돌아보며 씩 웃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책장을 넘기듯 돌아갔다. 그 얼굴이 떠오르자 갑자기 속이 뭉근해져 한조는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왜 그러지?”
일리야스가 물었다. 변함없이 잘 생긴 사내다. 하지만 약을 발라주고 싶은 것은 저 얼굴이 아닌것을······.
“아닙니다.”
한조는 간신히 대답했다.
물끄러미 일리야스를 쳐다보자 또 저를 보는 줄 알고 좋다고 웃는다. 웃으니까 예쁘긴 하다만 손목에 칼을 갖다 대던 얼굴도 예쁘긴 마찬가지였다.
‘하긴, 이제 황젠데 저가 원하면 얼마든지 바르지 않겠어?’
한조는 그냥 고개를 저어 생각을 날려버렸다.




일리야스가 제위에 오른 이후 미미하게 남아있던 악시아 신황의 잔류세력은 새벽별빛처럼 희미해졌다. 황제의 명령에 귀족들은 감히 토를 달수도 없었다. 익힌 머리통들이 다리아래 서서히 풍화되어 썩어가기 시작하자 그것은 냄새를 풍겼고 귀족들은 그 머리통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새 황제가 어떠한 자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리야스는 그리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다. 악시아의 첫 번째 황태자는 병으로 죽고 두 번째 황태자는 미쳐버렸고 세 번째 황태자는 독사에 물려 죽었다. 그 후로 차례차례 황자들이 죽어 마지막 남은 것이 일리야스였는데 그는 황자 시절부터 방 안에 틀어박혀있기를 좋아하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다. 독사에 물려 죽은 비운의 정결왕이 살아생전 일리야스 황자의 눈부신 미모를 보고 걱정하여 네 미모가 사람들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니 언동을 조심하라 일렀기 때문이었다. 
세간에서는 정결왕이 일리야스 황자를 미워하여 유폐하다시피 했다는 말도 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으로 정결왕은 미왕이라 불리는 어린 남동생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리 했던 것이었다.
때문에 피의 숙청에서 살아남은 대부분의 귀족들의 대다수는 대관식 때 일리야스 황제를 처음 보았다. 그때도 아름다운 사람이라 생각하긴 했으나 사무엘 교후의 죽음과 새 교후의 등장이 하도 임팩트가 강한지라 제대로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대전 회의실에서 황제를 코앞에서 뵈니 대신들의 표정이 멍해지고 얼굴에 홍조가 돈다. 낭창낭창한 허리를 비스듬히 하고 늘씬한 다리를 꼬고 있는 것이 기다란 꼬뜨 자락 아래서도 잘 보인다. 한 손은 무릎에 놓고 한 손으로는 가볍게 턱을 괜 채로 황제가 내무대신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미소를 짓기도 했다가 별안간 얼음장처럼 싸늘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대부분이 내무대신이 그의 뜻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할 때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궁의 규모를 줄이라.”
일리야스는 제일 첫 번째로 그것을 원했다.
“악시아 신황의 처와 그 가족들이 거미줄처럼 궁에 뻗어 있다. 젊은 여자들은 이혼시켜 재혼하게 한 다음 밖으로 내보내라.”
“하지만 폐하. 그녀들은 황궁 내에서도 여러 가지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내무대신은 허리를 굽혔다.
“그녀들을 밖으로 내보내면 그들은 졸지에 실직자가 됩니다.”
“그러니까 재혼하라지 않느냐. 돈은 있으나 명예는 없는 장사치들이 교역소에 많이 있다. 그들에게 내무대신이 중매를 서도록 하라.”
“제, 제가요?”
얼떨결에 중매쟁이가 된 내무대신의 눈이 둥그레졌다. 일리야스는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다른 서류를 짚어들었다.
“다음으로 넘어가서···이제부터 매주 주말이 되면 궁을 개방하여 백성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겠소.”
“네?”
이번에는 내무대신뿐만 아니라 모든 귀족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일리야스는 착하면 척 알아먹지 못하는 자들이 답답하다는 듯 싸늘하게 읊었다.
“주말마다 황성문을 활짝 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이 황족들을 구경할 수 있게 하겠다는 말이오. 황성에 남은 황족들은 그들의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 잘 보이도록 짙은 화장이나 가발, 모자 따위를 쓰지 않고 황성을 거닐게 하고 식사시간이 되면 높은 학자와 존경받는 미술가등을 데리고 식사를 하게 하시오. 나 역시 그들과 식사를 할 테니.”
“폐하, 하지만 우리 그란사나의 황궁은 황제폐하를 위한 철통같은 경비와······.”
“누가 경비를 줄이라고 했나?”
결국 일리야스는 짜증을 냈다.
“경비를 더 강화하고 황족들에게 나의 개인 기사들을 내리겠소. 아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불미스러운 일이 안 일어나도록 하면 되잖소.”
그 말에 귀족들은 말문이 막혔다. 선황제의 여인들을 재가시켜 쫓아냄과 동시에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검은 머리 황족들은 구경거리로 만들겠노라 황제가 명령했다. 그 구경거리에는 황제 자신도 들어 있었다.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그가 다른 서류를 집자, 귀족들은 일제히 긴장했다.
“멸문지화당한 가문의 영지가 이리 많군. 그래.”
일리야스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집권 한 달째. 일리야스는 살인적인 속도로 일을 해치워나갔다. 그는 장인을 육성하기 위해 황실의 이름으로 학교를 운영하게 하고 입학생의 자격을 종남작의 작위 아래로 한정했다. 문화 예술을 장려했으며 그를 위해서는 외국에서 선생을 초빙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뚝딱뚝딱 건물이 완성되고 학교와 병원, 빈민을 위한 무료 보급소가 지원되었다. 그것은 많은 양의 음식을 지원하지 못했지만 이틀에 한끼를 먹던 사람들에게 최소한 하루에 한끼는 먹일 수 있었다. 어차피 빈민은 구제하지 못한다. 그들은 결국 굶어죽을 것이다. 하지만 음식을 나누어주면 사람들은 감사를 느낀다. 일리야스는 그렇게 말했다.
또 일리야스는 노예들을 위한 법령도 만들었다. 그는 5대에 걸쳐 일하면 그자에게 노예의 무거운 짐을 벗겨 평민이 되도록 해주겠노라 발표했다. 노예들의 탈출은 집안의 근심이었다. 그 노예들에게 5대에 걸쳐 일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하니 그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 모라시니가 이 법령을 듣고 걱정이 되어 묻자 일리야스가 답하였다.
“한 세대가 바뀌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 것 같으냐. 모라시니.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이르기까지 짧게는 30년에서 50년은 걸린다. 250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으냐?”
“250년 뒤에 폐하는 실정한 황제로 기록될지 모릅니다.”
“내가 납과 황금을 캐내려하는 남방 땅의 사람들은 기질이 온순하고 소박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란사나교가 전파되고 대국과의 교류가 일어나면 분명히 한 세기 안에 그들은 반기를 들 것이다. 그것은 내가 최대한 막아보겠으나 결국에는 터질 둑과 같다. 빨아먹을 대로 빨아먹은 후에는 뱉어낼 수밖에.”
일리야스는 여기서 잠시 생각했다.
“내 계산이 맞는다면 모라시니. 5대의 시간이 흐르면 인구는 지금보다 40%가량 증가하게 된다. 그들은 모두 자유인들이다. 노예는 쓸모 있지만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지. 그것보다 나쁜 점은 그들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사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 40%를 자유민으로 바꿔주고 싶다. 그들이 세금을 낼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것은 모라시니의 정치방향과는 맞지 않지만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황제의 생각을 모두 읽을 수가 없었다.
“내 다음대의 황제는 신실한 사람이어야만 한다. 내가 거칠게 휩쓸고 간 자리를 그가 신의 성품으로 부드럽게 안아주어야 해.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거기까지 말한 일리야스는 옷깃을 틀어쥐고 반대쪽으로 가버렸다.

일리야스 황제는 집권하기 전부터 풍파가 많은 황제였다. 많은 황제들이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풍파를 겪긴 했지만 일리야스 황제처럼 죽었다 되살아나는 경우는 없었다. 완벽하게 장례도 치른 상태에서 말이다.
공포정치로 불온의 싹을 자근자근 밟아 놨다 하나 돌로 둑을 막아놓은 격이다. 그란사나는 신심이 깊은 나라. 신성제국의 백성들은 선하나 선동되기 쉽다. 국왕이 신의 피를 담은 성수라면 성청은 그 성수를 담은 그릇이다. 그릇을 후드려패니 그 속에 담긴 성수가 말짱할리 없다.
삽시간에 궁에서 쫓겨나 팔려가듯 내쫓긴 신황의 처들이 분노를 터트렸다. 그들은 황궁내의 자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실직까지 하게 되었다. 시녀들을 호령하며 권력을 부리던 여인들이 졸지에 실업자가 되자 깊은 자괴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 반발로 성청에 가 붙었다.
안팎으로 들쑥날쑥하니 일리야스의 정신은 예민해지고 성질을 자주 내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화만 내는 것은 아니었고 일을 할 때는 확실하게 해 냈다. 물론 그 확실하게 하는 것들이 뿌리 깊은 근본주의자들의 반발을 사서 그렇지만 말이다.
악시아 신황이 망쳐놓은 것들은 표면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성청이 대관식을 치르겠다 했을 정도로 썩어 있었던 것이다. 일리야스가 뭘 하려고 들 때마다 속 시원하게 되는 일이 없었다. 지금 당장 권위가 섰다하나 그것이 단발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위기간동안 그것을 확립해놓으려면 피의 숙청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민심이 돌아섰을 때, 얼른 해치워야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일리야스는 늘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일하고 있었다. 그는 아침이 되면 창백한 낯빛으로 일어나 집무실로 향했고 새벽이 늦은 시간에 방으로 돌아와 느릿느릿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밖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만큼은 호탕하고 강력하며 때로는 강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은 황제가 저런 식으로 일하다가 큰일이 나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일리야스에게는 비밀 병기가 있었다. 황궁 깊숙한 곳에다 몰래 숨겨놓고 밤마다 야금야금 눈물을 흘려주는 우는 교후, 한조였다.
그것을 먹으면 순식간에 피로가 날아가고 머리가 맑아지며 일순간이지만 체력도 보강이 된다. 한 방울 한 방울 미약하게 떨구어주는 그 이슬을, 잔에 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급히 입술을 가져다가 강하게 들이키고 만다.
‘아아 달고 맛있구나.’
일리야스는 한조의 얼굴을 껴안고 중얼거렸다.
‘더 울어보려무나. 어째서 그치는 것이냐.’
‘더는 나오지 않아요.’
한조는 시체처럼 파랗게 얼어서는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한조의 얼굴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놔주세요. 나오지 않아요.’
그렇게 한심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한조는 도망을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남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그는 간단하게 늘 하던 대로 했다. 붙잡아놓고, 빼앗으면 된다.
그는 한조를 겅중 들어다가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한조가 질색 팔색을 하며 달아나려 하자 다리를 너르게 하여 그 사이에다 한조를 끼워 넣어버렸다. 불쌍한 한조에게는 움쩍달싹할 공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일리야스는 한조에게 붙어서 혀로 싹싹 핥았다. 살결이 여린 피부에 오소소 소름 돋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소름이 돋다니···기가 막히면서도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밤에도 그것을 먹겠구나 생각하자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급격히 가벼워졌다. 피를 취할 때 보다 훨씬 효과도 좋고 채취방법도 간단하다. 특히 요즘은 한조가 자발적으로 눈물을 주니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또 너무 자발적이란 말이지.’
일리야스는 문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을 열기 전에 갑작스레 어떤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주니 마니하며 실랑이를 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방에 들어가면 재빨리 눈물을 흘려서 대충 먹여주고 달아나려 한다.
조금 더 먹고 싶은데 이제 됐지 않느냐고 밀어내고, 조금 더 울리고 싶은데 더 이상 나오는 게 없다며 고개를 외면해버린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좋았던 기분이 일시에 추락을 한다. 일리야스는 미간에 골을 깊게 한 채로 우뚝 멈추어 섰다. 약 주제에. 언제든 원하면 그 눈에서 눈물을 글썽여야 할 약 주제에. 그란사나의 황제인 나를 피하려 들어?
마음에 찰 때까지 눈물을 빼낼 거다. 거부하면 꽉 안아서 도망가지 못하게 한 다음 울게 할 거다.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 공손히 눈물을 받아다 내 입술에 흘려 넣게 해야지. 고분고분하게 될 때까지··· 매일 밤 가슴에 안고 숨도 쉬지 못하도록. 그 형편없이 가는 몸뚱이가 으스러지도록 꽉 안아야지. 감히···감히 내게서 벗어나려고 해?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도록 검은 분노가 온 몸을 휘감았다. 잡고 있던 문고리가 거덜나는 소리가 들렸다. 일리야스의 눈동자가 일순 타오르듯 붉어졌다가 찬찬히 검은 색으로 돌아왔다. 검붉은 살기의 덩어리가 온 몸을 불태울 듯이 에워쌌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화를 참지 못해 저도 모르게 문을 부술 뻔 했다.
일리야스는 어리둥절하여 멀뚱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저어 미미하게 남아있는 살기를 흩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당장 한조를 만나야겠다는 것이었다.
가슴속 깊숙이 간직한 세 개의 열쇠로 삼중 자물쇠를 열었다. 그러자 창문도 없는 방에서 깜빡 잠이 들어 있는 한조가 보였다. 알 수 없는 분노로 표정이 사납게 굳어 있던 일리야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지더니 곧 미소까지 어렸다.
질질 끌리는 로브를 벗어던지며 일리야스가 한조에게로 다가갔다. 탁자와 붙어있는 긴 의자에 누워 자는지라 그의 얼굴은 섬세한 음영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의 약.’
일리야스는 한조의 손을 잡아 뺨에 대고 문질렀다.
‘나의 꼭두각시 교후.’
심장이 충만한 만족감으로 뻐근해졌다. 황관을 머리에 썼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교만과 성취감에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일리야스는 황좌를 손에 넣고 숙적을 일시에 짓밟았으며 마침내 교후까지 갈아치웠다. 곤히 잠들어 있는 한조의 손을 주무르며 그는 이가 다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었다.
대관식의 날 이후 성청에서는 교후를 보내 달라 수차례 요구하고 있지만 일리야스는 깨끗이 무시하고 있었다. 그는 한조를 흑색궁은커녕 이 방 바깥으로도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밤마다 혼자 들여다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좋았다. 그는 언제든 자신이 원하면 신비한 눈물을 흘려줄 약초. 비밀의 명약. 몰래 꺼내먹고 다시 넣어두리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성청으로 보내달라고? 나와 대각을 세우겠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다. 이 작은 머리통도, 결이 고운 머리카락도, 흐르는 눈물까지도 모두 나의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위해 이루어진 약물이었다.
‘그래 이것은 나만의 것이지.’
일리야스는 한조의 어깨로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그의 그림자가 길게 한조의 머리위로 드리워졌다. 촛불의 따뜻한 빛깔은 일리야스에 가려서 차단되고 긴 그림자가 음산하게 한조를 덮는다. 창문도 없는 방에 바람이 불리도 없는데 한조는 한기를 느낀 듯 부르르 떨었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이더니 어느 순간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무슨 꿈을 꾸는 걸까··· 일리야스는 상체를 깊이 숙이고 주의를 기울여 들여다보았다.
“일리야스.”
한조가 울면서 중얼거렸다. 일리야스는 가슴이 뛰었다. 그는 황제의 꿈을 꾸고 있었다.
“미안해.”
그리고 다시 눈물 한 방울······.
그때 일리야스의 눈앞이 잠시 캄캄해졌다. 아까 바깥에 서서 느꼈던 분노와 살의가 왈칵 터져 흐르더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조를 붙잡고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한조는 신음을 흘리고 있었는데 지독히도 놀랐는지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흙빛이다. 겁이 가득한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한조가 어찌나 발발 떠는지 일리야스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빼고 뒤로 약간 물러났다. 그러자 한조는 부르르 몸서리를 치더니 재빨리 말했다.
“눈물···눈물 마시러 오신 거죠?”
“아니 나는······.”
일리야스는 변명을 하려 했다.
“마셔요.”
한조는 일리야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톡톡 두드리더니 멍하니 있는 일리야스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마셔요.”
내미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일리야스는 굳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한조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손가락을 그의 입술에까지 대주었다. 그리고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했다.
“마시라고요!”
얼른 마시고 가버려··· 그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일리야스가 어정쩡하게 입을 연 순간이었다. 한조는 열린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불쑥 집어넣었다 빼더니 쏜살같이 달아나버렸다.
“됐죠? 그럼 이만 가요! 날 내버려둬요!”
어린 고슴도치처럼 털을 잔뜩 세운채로 한조가 외친다. 일리야스는 어이가 없었다. 이 무슨 대접이란 말인가. 신성제국의 황제를 빚 독촉 하는 사채업자처럼 취급하다니. 받을 거 받았으니 얼른 나가라는 건가?
일리야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이런 모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한 발로 발을 쿵 굴린 그는 천천히 의자 아래서 내려와 한조 앞에 우뚝 섰다. 그의 그림자도 함께 길어져 한조의 발치까지 늘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노려보던 일리야스는 
한조를 쳐다보다 획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 태도는 뭐란 말인가.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끓었다. 평생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한조는 마치 어둔 밤에 치한을 만난 처녀처럼 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치한이고 말이다.
일리야스는 불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고 쏘아주고 싶은데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눈물을 먹었으니 그날 볼일은 끝인데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아있자니 자존심이 상한다.
일리야스는 발을 한 번 탕, 굴러주고 몸을 돌렸다. 부모의 원수를 보았나. 눈에서 불길이 인다. 
위풍당당하게 문으로 걸어가나 속도는 더디기 그지없다. 한참이나 걸려서 문 앞에 도착하더니 뒤를 힐끗 돌아본다. 한조가 멀뚱멀뚱 저놈 왜 저래?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으려니 한쪽 눈썹을 쓱 위로 치뜨고서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하아.”
일리야스가 가버린 후에야 한조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 자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깨우다니.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뻔 했다.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침대로 올라갔다. 그는 하는 일은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일리야스를 상대하는 것은 에너지 소비가 큰일이었다. 
못 다한 잠을 자기 위해 눈을 부치며 한조는 깨자마자 일리야스를 볼 바에야 차라리 침대 속에 뱀이 들어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 * * 


“······를 하여 ······해서 ······인 겁니다.”
라고 내무대신이 말했다. 모두의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 데가 없고 시선은 일리야스 황제를 향해 집중 되어 있다. 하지만 황제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고 눈썹은 있는 대로 위로 치켜 올라가 있어 심기가 매우 불편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무대신은 속으로 덜덜 떨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해봤지만 ······보다 나아서 ······가 되었다는 겁니다.”
귀족들의 시선이 다시 황제를 향한다. 하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다. 아니 점점 더 표정이 안 좋아 지더니 이제는 안색마저 울그락 불그락 한다. 마지막으로 저 표정을 보았을 때 국무대신의 모가지가 다리에 걸렸었다. 오, 자비로운 신이여. 저를 보호하소서. 저는 다리 아래 목 매달고 죽기에는 너무 젊습니다··· 라고 팔순 잔치를 앞둔 내무대신이 속으로 기도했다.
“마, 마음에 안 드시면 다시 찾아볼까요? 폐하? 폐하?”
일리야스는 그제야 내무대신을 쳐다보았다. 눈동자에 살기가 가득했다. 내무대신은 울고 싶어졌다. 35살짜리 여자의 재가 자리를 찾는 것은 -그것도 황제에게 쫓기듯이 시집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만한 신랑감도 없는데 황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시 찾아볼까 물었습니다, 폐하.”
“지금 뭐라 했느냐?”
일리야스의 표정이 무서워졌다. 내무대신 및 기타 대신들과 그 아래 하위 직종 종사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잘못 건드렸다. 이번에는 내무대신 모가지가 날아갈 차례인가 보다.
“자, 잘못했습니다! 폐하!”
내무대신은 손발이 오그라든 얼굴로 외쳤다.
“제가 무능해서 이런 실수를···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용서해주소서!”
그러나 일리야스의 위로 솟구친 눈썹은 내려올 줄을 몰랐다.
“아니 나는 그저 그대가 뭐라 했는지 물었을 뿐인데······.”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다시 해오겠습니다!”
내무대신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너무도 처절해 보이는 몸짓이어서 일리야스는 다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는 어흠, 헛기침을 한 다음 황제의 아량을 베풀었다.
“알았다. 그럼 그리 하도록 하라.”
“감사합니다, 폐하! 그저 성은이 망극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러던가.”
일리야스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지금 그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리야스가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은 내무대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또 그가 화가 난 것도 내무대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한조의 잘못이었다. 모두 한조 탓이었다. 
황제는 한조의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방금도 그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정무를 마치고 피로가 입까지 튀어나올 정도가 되어 질질 끌리는 발로 한조의 방을 찾았다.
서서히 입지를 굳혀가는 일리야스에게 수많은 여인들이 자신의 무릎위에서 피로를 풀고 가라 유혹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눈물 한 방울로 세상의 명약을 대신할 가장 좋고 효과가 확실한 것. 하지만 그 약의 생산자는 독기로 가득한데다 못된 성미가 하늘을 찌르니 이는 황제의 또 다른 근심이로다.

33편  
‘또 왔군요.’
문을 열고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말대꾸하는 꼬락서니.
‘마셔요.’
눈을 마주치기도 전에 하는 소리.
‘어서요.’
말을 걸어보기도 전에 하는 행동.
‘다 됐죠? 그럼 가세요.’
게다가 볼일 끝났으면 나가라고 쫓아내는 안하무인에 몰상식.
‘왜 안 가요? 어서 가세요.’
감히 한 나라의 황제를 대하는 태도는 당장 쳐죽일 만큼 오만불손. 너는 목이 열두 개쯤 달렸더냐. 어이가 없을 만큼 겁 없이 쏘아대는 이 자는 그란사나의 정신적 어머니이자 황제 다음 가는 높은 자. 신의 충복이며 성청의 우두머리인 교후, 이한조였다.
‘아아, 골치야······.’
일리야스는 머리를 감쌌다. 약을 먹으면 몸은 편안해지는데 정신 쪽은 피로감이 더해지니 문제였다. 몸도 마음도 편안해지고 싶은데 도시당체 이 약물은 효과가 좋기로는 말할 것이 없으나 독기를 옹골차게도 품고 있어 혓바닥에 바늘을 백 개쯤 달고 있다.
‘나가요.’
그래도 나가지 않고 버티면 쏟아지는 싸늘한 눈빛과 차디찬 말투.
좀 더 편안하게 안아줄 수 없나?
좀 더 따스하게 맞아주어도 되잖은가.
예전에는 그렇게 맞아주었지 않았던가. 밝게 웃어도 주고 아프냐고 물어주기도 했잖은가. 그 멍청하고 못났던 남자한테는 해주던 것을 왜 지금 내게는 해주지 않아?
지금이야말로 네 무릎이 필요하거늘. 왜 나에겐 해주지 않냐는 말이다. 절로 눈에 힘이 빡 들어가고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게 되었다. 그러자 주위에서 서류더미가 우수수 떨어졌다. 일리야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차, 또 정신을 놓고 말았다. 대신들이 하는 말을 놓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잔인하고 냉정한 황제. 정무를 볼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것처럼 일하는 황제를 익숙히 보아온 대신들은 설마하니 그가 정무를 따라오지 못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오히려 대신들은 자신들의 발언이 황제의 심기를 긁었다고 생각했다. 성호를 긋고 신성한 조각상을 들고 기도를 하는등 난리가 났다. 그들은 모두 다리 아래 목을 매달아 놓기에는 너무 젊었던 것이다.
“왜들 그러지?”
일리야스가 언짢은 목소리로 물었다. 모두가 동시에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폐하.”
“그럼 계속하지.”
일리야스는 헛기침을 했다. 발표를 하던 대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날 하루 종일, 대신들은 그들의 황제가 느닷없이 짧게 욕설을 하거나,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려치거나 하는 바람에 줄창 기도문만 읊어야 했다. 교후도 갈아치운 인물이다. 말해 뭣하리. 귀족들의 신심만 나날이 깊어갈 뿐이다.




약은 효과가 좋았다. 성혈의 저주로 죽어가던 일리야스를 한 번에 일으켜 세웠으니 그 효과가 대단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리야스가 처음 눈을 떴을 때 기억을 상실하는 부작용을 겪었듯이 이 약을 복용하는 데에는 약간의 위험이 뒤따르는 모양이었다. 
예전에는 그것이 기억 상실이었다. 그것은 치유가 가능한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치유가 될지 어떨지 일리야스는 알 수가 없었다.
왜냐면 이 부작용의 이름이 중독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치겠구나.”
일리야스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모라시니는 책장으로 손을 뻗다 말고 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미치겠다고 했다.”
일리야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황제가 한숨짓는 모습에 모라시니는 어리둥절해했다. 정적은 모두 제거되었고 불온한 무리의 기승도 한풀 꺾었으며 후환이 될 만한 여자들도 모두 궁 밖으로 내쫓아놓은 이 시점에서, 왜 한숨을 쉬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엇이 괴롭습니까, 폐하.”
“그것이 교후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리야스가 입을 열었다. 너무 크게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잠시 쉬었다가 천천히 한숨처럼 내뱉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
“교후라면···약을 말하는 겁니까?”
“그럼 그 말고 교후가 따로 있느냐?”
일리야스는 답지 않게 약간의 짜증을 부렸다. 모라시니는 황송해하며 물었다.
“그는 폐하의 옆방에 안전하게 보관되어있지 않습니까. 필요할 때마다 적당량 복용하면 될 터.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이······.”
거기까지 말한 일리야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어딘지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모라시니는 더욱 의문스러웠다. 어떤 숙적을 처리할 때도 황제가 초조해 하거나 입술을 깨물거나 한 적은 없었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때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고작 꼭두각시 교후 하나 때문에 그가 저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 모라시니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요즘 고분고분 눈물도 잘 준다던데···뭐가 괴문제이십니까, 폐하.”
“바로 그것이 문제다.”
일리야스는 내뱉듯이 말했다.
“너무 고분고분하다.”
모라시니는 그것이 왜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리야스는 어떻게든 설명을 하고 싶은지 두 팔을 벌렸다가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가 하더니 결국 포기한 듯 에잇, 소리를 지르고는 저쪽으로 가버렸다.
“폐하. 폐하?”
모라시니가 뒤에서 불렀지만 일리야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생각을 했더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만나서 얼굴이라도 봐야 직성이 풀리지 싶었다.
그는 한조의 방으로 직행했다.
“일리야스···님.”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찌푸린 얼굴이 일리야스를 반겼다. 
“왜 오셨나요?”
“왜긴. 너를 취하려 왔다.”
“오늘은 좀 이르군요.”
“아아.”
한조의 질문에 대충 대꾸하며 일리야스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팔을 척, 움켜쥐자 얼굴이 순식간에 핼쑥해진다.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다. 안타깝지만 기분이 안 좋기로는 이쪽도 마찬가지다. 일리야스는 코웃음을 쳤다.
“울어라.”
일부러 비꼬듯이 말하자 묵묵하게 대꾸한다.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왜? 날 보면 바로 내쫓고 싶어서 눈물을 질질 흘리지 않았나?”
그 말에 한조는 욱하는 표정을 지었다.
“······질질 흘린 적은 없는데요.”
“아니긴. 내 채찍에 맞을 때는 질질 짰잖느냐.”
당신이 맞아봐. 안 울고 배기나. 한조는 짜증이 났다.
“놔주세요. 놔주시면 일이 더 수월할 것 같네요.”
그래, 이제야 반응을 보이시는군. 일리야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기분이 나빠질지언정 그는 한조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눈물만 먹고 나면 쫓겨나는 것은 싫었다. 눈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리야스는 남을 조종하려 들 때를 제외하고는 달변가 아니었고 한조는 일리야스가 무서웠다. 한조가 다시 시선을 내리깔아버리자 일리야스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애를 썼다.
“왜, 내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황홀해서 눈물이 안 나오나?”
그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화술을 동원했다.
“네. 눈물 말고 다른 게 나올 것 같네요. 여기서요.”
한조는 목구멍을 가리켰다.
“버르장머리 없는 것.”
“맘에 안 들면 또 패시게요?”
손을 떨고있는 것이 보이는데도 말로 지려들지는 않는다. 일리야스는 그것이 또 괘씸했다.
“기고만장하구나. 내가 널 못 때릴 성 싶으냐?”
“그럼 때리세요.”
“오냐, 소원대로 해주마.”
이를 갈며 읊조린 일리야스가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한조는 각오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외면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따귀를 철썩 때리거나 복부에 주먹이 꽂히는 느낌은 오지 않았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무표정한 얼굴의 일리야스가 보였다.
한조는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외면했다. 이제쯤 때리려나, 저제쯤 때리려나······ 하지만 일리야스는 여전히 머뭇대고 있었다.
“······안 때리나요?”
“······지금 때리려고 그랬다.”
“그럼 때리세요.”
“시끄럽구나. 집중이 되지 않잖느냐.”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일리야스가 말했다.
“에잇!”
그는 한조의 어깨를 붙잡고는 갑자기 꽉 끌어안더니 다시 확 떼어놓았다. 한조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 양반이 미쳤나. 때리라고 멍석 깔아주니 못 때리네.
“울지 못하겠나!”
“······이러실수록 더더욱 나오지 않아요.”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일리야스는 좀 미친 것 같았다. 그는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입술을 짓뭉개기도 하다가 다시 한조에게로 돌아와 또 강하게 껴안았다. 한조는 숨이 막혔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그가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간 만만한 느낌이었다.
‘미친놈이 이젠 별 헛짓거릴······.’
한조는 속으로 생각하며 눈가를 꾹꾹 주물렀다. 그는 늘 이 방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노력이 효과가 있어 약간의 눈물이 흘러나와 주었다. 그러자 일리야스가 얼굴을 딱딱하게 하고 한조에게 다가왔다. 그는 꼭 흉물스런 것을 잡듯 인상을 찡그린 채로 한조를 잡더니 천천히 눈가에 입술을 붙이고 방금 흘러나온 것으로 목을 축였다. 
신선한 눈물이 일리야스의 입술 사이로 습, 흡수되더니 그가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을 흘렸다. 이 떨림. 이 떨림이야말로 아무리 한조가 짜증나게 굴어도 여기 오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아······.”
한조는 자신의 몸을 강하게 부여잡고 부르르 떠는 일리야스가 변태 같다는 생각을 했다.
“좋구나.”
일리야스는 저도 모르게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온 몸의 세포가 충만 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한조를 만난 후에야 이런 느낌을 알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빵과 물과 소금으로 생명의 성분을 만든다면 황제의 몸에는 처음부터 한 가지 성분이 더 필요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성분의 이름은 한조였다. 수백 년간 성혈의 저주는 황제와 그의 자손들을 괴롭혀왔으나 이제야 약을 찾게 되었다.
일리야스는 온 몸의 피와 혈관과 근육과 살갗이 기쁨에 떠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기쁨은 짧은 찰나에 지나지 않고 이내 육체가 그것을 좀 더 달라며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저기 있는 거 다 알아. 왜 좀 더 보내주지 않는 거야. 심장이 쿵쿵 뛰며 흥분을 하고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움직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려 들었다.
한조는 이제 꺼지라는 듯 멀리 도망가려 했지만 일리야스의 긴 손가락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것은 일리야스의 자의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달고 맛있구나.”
일리야스는 나른한 표정을 했다.
“좀 더 울어보렴.”
“안 나와요.”
한조는 여전히 도망가려고만 들었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꿈꾸는 듯한 얼굴로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나오지 않았느냐?”
“아얏!”
일리야스가 눈을 쑤시는 바람에 한조는 비명을 질렀다. 안 때린다더니. 쑤시고 있다.
“아프냐? 그럼.”
이번엔 일리야스가 한조를 불쑥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놓았다. 한조는 눈이 보이지 않는지라 반항도 못하고 끌려왔다.
“이러면 되느냐? 이러면?”
“이얏, 아얏!”
중이 고기 맛을 보면 법당에 파리도 안 남는다더니. 오만한 표정으로 눈물을 받아가던 예전 모습은 어디가고 목살을 꼬집고 허리를 짓누르고 다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일리야스가 어서 눈물을 내놓아라 보채고 있다. 그러나 불쌍한 한조는 눈물이 나오기는커녕 눈은 안 보이고 무서워서 소리만 질렀다.
“또 뭐가 문제냐! 어떻게 해야 울겠느냐!”
“몰라요! 놔줘요! 저리 꺼져요!”
한조는 두 팔을 앞으로 뻗어 아무거나 잡고 버티려 했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지 여전히 한조를 크고 길쭉한 두 손으로 슥슥 문대고 있었다. 거대하고 거친 타월로 사정없이 온 몸이 비벼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아니면 요렇게?”
“아야! 아우웃!”
결국 그날 일리야스는 한조의 눈에서 눈물을 더 빼는데 성공했다. 나중에는 눈물을 빼는 것 보다 한조를 골리는 것이 더 즐거웠는지 그가 만족하고 떨어져 나갔을 때에는 한조는 반쯤 벗다시피 하고 있었다.
‘다음부턴.’
한조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눈물 안 나오면 그냥 내가 날 찌르자.’
이런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옛날처럼 얻어터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4~36편 
* * *


두 여인은 한조가 이곳에 처음 끌려 왔을 때부터 늘 곁에 있었다. 한조가 교후가 된 뒤에는 말을 높여 쓰긴 하지만 태도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다. ‘어차피 넌 꼭두각시야. 나의 주인은 위대하신 황제폐하 일리야스님뿐이야’ 그들의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한조로서도 이제 와서 여인에게 대접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약발이 좋다하여 갇힌 신세. 황제의 병이 언제 나을지 모르나 그 병이 나을 때까지 살아있기만 바랄 뿐이다. 때문에 여인들과 한조 사이에는 공막을 씌워놓은 것처럼 차가운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고 한조는 그녀들이 자기 일만 성실히 잘 수행해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대관식의 날로부터 두 달이 다 되어갈 무렵. 늘 한 쌍처럼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이었는데 계속 한 명만 보이자 신경이 쓰였다. 어린 시절 엄마가 ‘꼭 계집애 같이 왜 아줌마들 이야기에 자꾸 끼어드니?’ 라고 했을 정도로 한조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엄마 친구들이 놀러 와서 남편을 깔 때마다 옆에 거들고 앉아서는 그 남자 너무 했다는둥, 그 집 아저씨 미쳤다는 둥, 시부가 너무 했네, 시모가 너무했네. 구구절절이 맞장구를 쳐 줄 만큼 시시콜콜한 세상사 이야기를 즐겨하는 성격이었다.
저 얼음장 같은 여인들이라도 하나가 안 보이자 신경이 쓰이고 또 걱정도 되었다. 여기서 보는 얼굴이라곤 일리야스, 아주 가끔 모라시니. 그리고 그녀들뿐인데 아무리 각박해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보다보니 그녀들에게 약간의 인간적인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한조는 며칠을 눈치만 보다가 던지듯이 화두를 꺼냈다.
“다른 한 명은 안 보이는데. 어디 아픈가요?”
“나의 자매 말인가요?”
여인이 대답했다. 그녀는 야채와 고기 요리를 식탁에 내려놓다 말고 잠시 침묵하더니 바로 대답해 주었다.
“그녀는 죽었습니다.”
“네?”
한조는 자기가 잘못 들었나 했다. 하지만 여인은 식기와 물 잔을 내려놓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죽었습니다. 꽤 됐지요.”
“그럴···수가.”
한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괜찮나요? 나라에서 휴가 안 보내줘요? 장례식은 했고요?”
여인은 한조의 손을 뿌리쳤다. 눈동자가 빠르게 깜빡거렸다.
“물론입니다. 그녀는 화장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휴가가 없습니다.”
“그럴 수가!”
한조는 분개했다.
“자매라면서요. 친족이 죽었는데 어떻게 휴가를 안 보내줘요? 늘 내 옆에 있었잖아요. 나중에 일리야스 놈이··· 님이 오면 말해서 휴가를 줄 수 있는지 물어보겠어요.”
“필요 없습니다.”
여인은 차갑게 대꾸했다.
“하지만 자매가 죽었잖아.”
“괜찮습니다. 그녀는 일리야스 폐하를 위해 죽었으니까요.”
아 그러셔? 위로해 줄까하던 한조는 거기서 빈정이 상했다. 얼마나 대단하신 폐하기에 목숨까지 바친다니. 너네 고급 공무원이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한조를 위해 묵묵히 식탁을 세팅했고 한조는 얼굴을 삐딱하게 하고 저쪽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그릇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식탁에 놓이자 적막한 방에 소리가 사라졌다.
“드세요.”
여인이 말했다. 한조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스푼을 들었다.
막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한조가 말했다.
“혹시 당신도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는 거야?”
“물론입니다. 일리야스 폐하가 원하신다면.”
“그럼 그 전에 이름이라도 알려줘.”
한조는 스프를 후루룩 마셨다. 그러고 보니 약간 맛이 변한 것 같았다. 비슷한 느낌이지만 살짝 더 맵고 살짝 더 달다. 지금까지 요리를 했던 것은 죽은 쪽이었던 모양이다.
“당신이 죽었을 때, 내가 누구와 있었는지는 기억해야 하잖아요.”
여인의 새파란 눈동자가 한조를 내려다보았다. 한조는 상관 않고 다시 후루룩 스프를 마셨다. 그녀는 한조가 스프를 다 마시고 빵을 두 조각 삼키고 고기를 세 점쯤 뜯었을 때까지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치사하고 드러워서 안 듣는다, 그 이름. 한조는 빈정이 상해서 우걱우걱 고기를 씹었다.
그때 저 위에서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벳.”
고기를 뜯다말고 위를 올려다보니 시선을 멀리 둔 여인이 보였다. 촛불의 반사광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여인의 목소리였고, 여인은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바벳. 그것이 여인의 이름이었다.
“그렇군요.”
한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다음 다시 음식을 집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식탁 아래 내려간 한 손은 자그맣게 V자를 그리고 있었다. 나이스 한조······.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인간다운 관계를 맺은 것 같아 한조는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래서 말인데, 바벳······.”

밤이 되어 일리야스가 한조의 방에 들렀다. 그는 오늘도 많이 지쳐보였다. 오자마자 인상을 긋기에 한조도 인상을 그었다가 애써 얼굴을 부드럽게 했다. 오늘 그에게 부탁할 것이 있었다.
“많이 피곤하시죠?”
“그렇다.”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나 싶어 일리야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오늘따라 피로함이 더 한지 어깨를 주무르는 손길이 팍팍하다. 두 눈 사이를 꾹 누르며 고개를 숙이더니 그대로 가만히 있다. 한참 후 짧은 욕설과 함께 고개를 들더니 두 팔을 활짝 벌리며 한조를 불렀다.
“이리 와라, 한조.”
한조는 머뭇머뭇 옆으로 다가갔다. 일리야스의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까지 오기는 왔는데 선뜻 닿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일리야스는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한조를 끌어당겼다. 정말 치사하고 드러워서 안 먹고 싶지만 한 번 먹고 나면 그 맛을 잊지 못해 찾게 되니 지독한 중독약물이다. 
“아.”
한조는 일리야스의 무릎위에 앉았다. 앉자마자 일어나 가버린다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일리야스는 자기 무릎 위에서 다리와 허리에 힘을 빳빳하게 주고 있는 한조를 의아하게 내려다보았다. 분명 앉아있기 싫어서 최대한 힘을 주어 몸을 떨어뜨리고는 있지만 일어나서 가버리지 않는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왜···가지 않지?”
“그럼 갈까요?”
좋다고 일어서서 가려고 한다. 일리야스는 황급히 한조의 어깨를 붙잡고 아래로 내리눌렀다.
“가지 마라. 여기 있어라.”
얼씨구나 하던 한조의 얼굴이 다시 안 좋아졌다. 하지만 일리야스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는 한조의 어깨를 더 아래로 꾹꾹 눌러서 자신에게 완전히 밀착하게 한 다음 뒤에서부터 꼭 끌어안았다. 한조의 목에 뺨을 대고 그의 체취를 한껏 들이마신다. 하아···만족스런 한숨을 내쉬자 조금이나마 피로가 가시는 듯 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며 일리야스는 약간 웃었다. 그는 자신이 웃는다는 것도 모르고 웃었다.
“이제 반항하지 않는 거냐?”
“···뭘요?”
“내가 하자는 대로 가만히 있는 거냐?”
“···뭘요?”
“이제···날 밀쳐내지도 않고 독살스럽게 비꼬지도 않을 테냐?”
“···제가 언제 그랬다고······.”
“후훗.”
일리야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시치미를 떼다니, 가소롭구나······. 작게 속삭였다. 숨결이 닿은 한조의 뒷목이 뻣뻣해졌다. 놈의 숨결 때문인지 혈압이 올라서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조가 고분고분하니 일리야스의 기분은 급격히 상승하였다. 그래, 이것이 옳다. 이제야 한조도 내게 넘어오는구나. 너는 나에게 완전히 속했음을 네가 이제야 아는구나. 
자신감이 충만해지고 즐거워져서 일리야스는 그가 무슨 부탁을 해오더라도 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한조는 오늘따라 말도 먼저 걸어왔다. 그는 머뭇머뭇 뒤로 고개를 젖혔다가 무시무시하게 헤벌어진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식은땀 한 방울이 흐르는 듯하다.
“저···일리야스님.”
“뭐지?”
“부탁이···있는데요.”
“말해봐라.”
일리야스는 한조의 아랫배에 양손을 걸며 대답했다. 한조는 소름이 돋았다.
“바벳···이요. 제가 글을 배우고 싶은데요. 그러니까···바벳한테 배우면 어떨까 해서요.”
“바벳?”
일리야스가 되물었다.
“네. 바벳이··· 저기 제가 글을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바벳은 글을 알고, 또 쓰고, 읽고 하니 좋고···그래서 저도 글을 읽고 싶고. 아시다시피 전 여기서 할 일도 없고.”
일리야스는 대답이 없었다. 한조는 횡설수설했다. 도축 불가능한 음식으로 대접받고 있는데다 꼭두각시 교후라는것을 아는지라 이런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민망하고 또 자존심이 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조는 글을 읽고 싶었다. 왜냐면 할 짓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한조는 집에서 토익공부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는 취업을 걱정하고 나라 경제도 걱정하며 짬짬이 과외 자리를 찾아다니며 단발성 알바를 해서 용돈벌이를 하던 대학생이었다. 그곳에서는 한조에게도 할 일이 있었다. 목표도 있었고 공부해야할 것도 있었다. 한조는 그것들이 그리웠다. 그는 하루에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리는 것 말고도 할 일을 찾고 싶었다.
예전에는 그 눈물 흘리는 일이 엄청난 노동이자 체력을 고갈시키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렇게까지 힘든 일도 아니었고, 한조는 체력이 남아돌게 되었다.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씻겨주고 잘 입혀주는데 하는 일이 없었다. 방 한 켠에 빼곡하게 책이 꽂혀 있기는 하지만 읽지를 못하니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 공부라도 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을 읽을 필요가 있는데 바벳한테 부탁했다가 보기 좋게 딱지를 맞았다. 그녀는 새파란 눈알을 깜빡거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허락하시면 기꺼이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래서 한조는 그 폐하게 부탁을 드려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저어···앞으로 좀 더 고분고분하게 굴 테니까···바벳에게 글을 가르쳐주라고 해주세요.”
한조는 뻣뻣한 얼굴로 열심히 고분고분한 척을 했다.
“하는 일이 없으니까 심심합니다. 책이라도 읽게 해주세요.”
“바벳이라···했느냐?”
“네? 네에 바벳이요.”
“바벳이라고?”
“네. 그녀가 자기 이름을 바벳이라고 하던데요.”
“바벳이란···말이지?”
“······네.”
한조는 껴안긴 채로 식은땀을 흘렸다. 어째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있었다. 일리야스는 고장 난 축음기처럼 바벳의 이름만 부르더니 침묵해버렸다. 꽉 껴안긴 아랫배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한조는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일리야스를 잠시라도 만만하게 느꼈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매질을 하던 모습이 떠올라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바벳. 바벳.”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는데 여전히 바벳의 이름만 되뇌고 있다. 그러더니 살벌한 음성으로 이렇게 물었다.
“어째서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는 거지?”
“네?”
왜 글을 배우겠다 하느냐고 책망의 말이 내려올줄 알았는데 일리야스는 딴 소리를 했다. 한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 젖혔다가 무시무시한 얼굴이 보이는 바람에 식은땀을 흘렸다.
“왜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냐고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설마 바벳이 엄청 잘 나가는 여자라서 차마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는 신분이었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네가 바벳과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이다.”
일리야스는 코웃음을 쳤다.
“게다가 공부라고? 하, 핑계를 댈 거면 차라리 다른걸 대지 그러느냐. 너도 사내놈이라고 여자랑 같이 있고 싶은 거겠지.”
비웃는듯한 어조와 시니컬한 태도에 한조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냥 대놓고 거절해도 알아먹는다. 이렇게 비비꼬면서 놀려먹을 것까지는 없잖은가. 
하지만 한조는 점잖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일리야스가 막나간다고 자신마저 막나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요, 제가 바벳에게 바라는 것은······.”
거기까지 말하는데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한조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칠 뻔 했다. 그렇구나. 그래서 이렇게 화내는 것이구나. 한조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목석같은 양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혹시 바벳을 마음에 두고 계시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뭐라?”
그 말에 일리야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무릎위에 앉아있던 한조가 저도 모르게 찔끔 목을 움츠렸을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다.
“내가? 바벳을? 네가 미쳤구나!”
“그, 그럼 왜 바벳을 싸고도는 겁니까?”
한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난 바벳을 싸고 돈 적 없다.”
“그럼 바벳말고 누구를 싸고도시는 건데요?”
한조는 순수한 마음으로 질문을 했다. 한조의 상식으로는 일리야스가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 질문에 일리야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건?”
한조가 되물었다. 바벳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를 염두에 뒀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일리야스를 올려다보았다.
“그건······.”
일리야스는 한조와 눈이 마주치자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한조는 참을성 있게 일리야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화내는 이유를 알아야 제대로 부탁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일리야스의 얼굴 위로 온갖 표정이 지나가더니 마지막으로 무시무시하리만큼 억울한 표정이 남았다. 그는 한조를 시커먼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살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벳은 아니다.”
아 그렇습니까? 한조는 눈을 끔뻑였다. 정말로 바벳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 왜 이렇게 화를 내세요? 제가 무슨 큰 실언을 한 겁니까? 바벳을 싸고도는 게 아니면 왜······.”
“바벳 바벳. 아까부터 왜 계속 그 이름을 부르는 거냐!”
일리야스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심장이야··· 한조는 일리야스가 화를 내자 심장이 벙벙 뛰었다. 하지만 심장이 뛰는 것과는 별개로 그럴 때일수록 혓바닥은 잘 돌아가는 것이 한조의 특징이었다. 무덤을 판달까······.
“이름을 부를 만큼 사이가 좋아진 게냐? 게다가 이 심장 소리.”
그는 한조의 가슴을 세게 움켜잡았다. 한조는 신음을 흘렸다. 그는 일리야스가 무섭고 또 그에게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바벳을 떠올리자 심장이 뛰느냐? 기분이 좋은 거냐? 응?”
“미쳤군요!”
“말해봐라. 왜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냐. 얼마 전까진 눈도 안 마주치는 사이였지 않느냐.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게냐?” 
그는 언성을 낮추고 끝으로 갈수록 부드럽게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소름이 돋았다. 한조는 자신의 가슴을 주무르는 일리야스의 손을 떼어내며 외쳤다.
“왜 자꾸 이름 부른다고 그러세요. 그럼 제가 바벳을 바벳님이라고 부를까요?”
“교후인 네가 왜 일개 신녀에게 존대를 하다니!”
“그럼 어떻게 해요? 아니면 일리야스님을 하대해서 형편성이라도 맞출까요?”
“뭐라고?”
일리야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조는 덕분에 데구루루 아래로 넘어질 뻔 했으나 곧 중심을 잡았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바벳한테 글 좀 배우게 해 달랬을 뿐이잖아요.”
“그녀는 바쁘다.”
일리야스가 냉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 치사하고 드럽다. 한조는 이를 물었다.
“뭐가 그렇게 바쁜데요?”
“바쁘다면 바쁘다.”
“하긴, 자기 친자매가 죽었는데 휴가도 안내고 일한다더군요. 그렇게 바쁜 분께 제가 감히 시간을 내달라 할 수는 없겠죠. 전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빈정댄답시고 한 말인데 일리야스는 또 이상한데서 꽂혔다. 그의 눈빛은 타오르는데 얼굴에는 살얼음이 끼고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한조에게 소리를 질렀다.
“네가 그것까지 어떻게 아는 게냐! 아하, 둘이서 신변잡기라도 이야기하며 돈독한 시간을 보낸 모양이지?”
“무슨 헛소리세요!”
한조는 미치고 팔짝 뛰고 싶었다. 어쩌다 대화가 이렇게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분위기 좋았었다. 억지로 일리야스의 무릎위에까지 앉았다. 눈물을 달라고 하면 평소보다 많이 쥐어짜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돼 버린 걸까. 그는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고 또 조금 미친것처럼 보였다. 한조는 소름이 돋아서 두 팔을 꽉 감싸 쥐고 불타는 눈으로 일리야스를 노려보았다.
“바벳의 자매가 죽었건 말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너는 하루 종일 이곳에서, 아무 생각도 할 필요 없이. 그래···나만 기다리면 되는 거다.”
그 말에 한조가 분노를 터트렸다.
“싫어요!”
“왜 싫다는 거냐!”
“난 개가 아니에요! 사람이에요! 사람이라고요!”
“누가 사람이 아니랬느냐!”
“근데 왜 개 취급해요! 하루 종일 여기다 가둬놓고, 당신만 기다리라니··· 전부 다 빼앗아갔잖아요. 날 여기로 불렀잖아요. 그래놓고 당신만 기다리라고? 난 그렇겐 못해. 그건 사람이 사는 게 아니잖아!”
억울한 나머지 갑자기 왈칵 눈물이 솟았다.
“답답하구나!”
일리야스는 가슴을 쳤다. 이토록 대화가 안 통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하다못해 성청의 늙은이들도 이보다는 대화가 잘 통했다. 어떤 인물도 일리야스에게 걸리면 그의 화술에 녹아나 결국에는 일리야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게 되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결국에는 이루어냈다. 보라, 황제의 관마저 이 머리위에서 빛나게 되지 않았던가.
그러던 것이 이 작달막한 체구의 약물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일리야스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루 종일 여기서 나만 생각하라는데. 그것이 뭐 어렵다고 그러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대관식의 날에 일리야스를 본 숱한 여인네들이 그를 잊지 못해 상사병으로 드러누웠다 들었다. 그 중에는 남자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왜 한조는 그렇게 해주지 않느냔 말이다. 그것이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천천히 서로를 노려보며 잠시 침묵했다. 알 수 없는 오해와 감정의 골들이 가로세로로 얽어지며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어 서로 말을 할 수가 없다.
“난 집지키는 개도 아니고, 당신 부하도 아니에요. 이런 젠장! 젠장!”
한번 터진 눈물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한조는 손으로 벅벅 눈가를 문질렀다.
“나도 이렇게 쓰다가 바벳의 자매처럼 죽여 버릴 거죠?”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일리야스는 피곤해졌다. 그는 이미 신관들과 한차례 다투고 들어온 길이었다. 방금 전에 한조를 안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기분이 좋았었는데 한차례 물러갔던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오니 온 몸이 축 처지고 두통이 지근지근 관자놀이에서 뛰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의자위에 앉아 두 팔을 뒤로 늘어뜨렸다. 눈만 돌려 한조를 바라보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할 말을 한다.
“맞잖아요. 나도, 나도 언젠가 그 여자처럼 죽여 버릴 거잖아요. 필요가 없어지면, 그럴 거잖아.”
“아니다.”
“하지만 당신한텐 나나 그녀나 똑같잖아!”
한조는 흐르는 눈물을 어찌하지 못하고 계속 울었다.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일리야스는 피로와 두통이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한 사람은 말없이 울고만 있고 한사람은 그것을 짜증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한조가 풀이 팍 죽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애원했다.
“날 내보내 주세요. 날 좀 놔주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일리야스는 아주 웃기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웃었다고 해서 정말로 즐거운 것은 아닌 듯 눈매는 더욱 살벌하게 날이 서고 흰자는 충혈 되어 벌겋게 보인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이 한 채로 자신의 교후를 쳐다보았는데 언제라도 달려들어 물어죽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제발요.”
한조가 흐느꼈다.
“최소한 이 방 밖으로라도 보내주세요. 날 가축처럼 대하지 말아요. 난, 난 인간이에요.”
“보내달라고?”
일리야스는 차갑게 웃었다.
“너를 보내줬다가 잃어버리면 어쩌자는 거냐.”
“나를 여기 불러왔잖아요. 그러면 또 가능하잖아요.”
한조는 다급해졌다. 내보내달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는지. 자유를 꿈꾸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바깥.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곳. 자유롭게 두 발이 뻗는 대로 걸어갈 수 있는 자유 의지. 그는 그것들이 미치도록 그리워졌다.
하지만 그 그리운 것들은 일리야스에게 아무 감흥도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얼굴로 한조를 빤히 보다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기다란 몸뚱이가 한참이나 위로 올라갔다. 일리야스의 눈동자에는 기이한 어둠이 서려 있었고 얼굴에는 열기가 느껴졌다.
긴 머리채를 허리 뒤로 쓸어 넘기며 일리야스가 한조에게 속삭였는데 그 목소리에는 어떤 음침한 것이 도사리고 있어 한조는 갑자기 겁이 났다.
“바벳의 자매가 왜 죽었는지 말해주마.”
“싫어요.”
“대관식의 날에 네가 어떻게 공중에서 불길과 함께 튀어나왔는지 아느냐.”
그러거나 말거나 일리야스는 옛날이야기를 읊조리는 것처럼 그날의 참상을 설명해주려 했다. 한조는 귀를 막았으나 일리야스는 한 손으로 가볍게 한조를 저지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네가 불길 속에서 튀어나왔을 때, 그녀의 몸도 불길 속에서 타들어가고 있었단다.”
그가 작정을 하고 한조를 밀어붙이니 한조는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한조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고 마침내 벽이 나타났다. 등 뒤로 와 닿는 벽면의 딱딱한 부분에 소름이 돋았다. 일리야스는 한조의 몸에 비스듬히 자신의 몸을 기댄 채로 미소를 지었다. 이 방에는 촛불만이 유일한 빛이라 한조는 일리야스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아니면 무서워서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다른 사람을 부르면 된다고?”
일리야스가 다정하게 말했다.
“너는 우리에게, 또 천 명의 목숨을 태우라고 말하는 것이냐?”
“천 명?”
그 말에 한조는 눈알만 돌려 일리야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천 명의 순결한 목숨.”
일리야스는 한조의 입술을 꾹 눌렀다.
“성혈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황제들이 신에게 빌었을까. 수 백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천 번의 제사가 있었단다. 우리는 천명의 목숨을 태우고서야 겨우 너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내게, 천 번의 제사와 천 명의 목숨을 태우라고 말하는 거냐?”
한조는 그냥 얼이 나가버렸다. 지금 일리야스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고작 자신을 부르기 위해, 천 명을 산채로 태웠다는 말인가.
“너를 죽인다고? 너를 보내달라고?”
일리야스가 웃었다.
“내가···너를 바벳의 자매처럼 죽인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한조. 그것은 너의 큰 오산이다. 나는 우리가 번제(燔祭)한 천 번의 목숨만큼 너를 살려둘 것이다. 그리고 너 역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너는 천 명의 목숨을 태우고서야 다시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 너를 불러오기 위해 불태운 천 명과, 너를 보내기 위해 필요한 천 명, 그리고 새로운 약을 불러내기 위한 천 명. 네 어깨 위에는 삼 천 명의 목숨이 얹어져 있는 거란다.”
그리고 일리야스는 한조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한조는 주르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너를 놓아주겠느냐.”
마지막 말은 조금 쓸쓸한 듯 했다.
일리야스는 한조를 안아들어 침대로 데리고 갔다. 충격을 받은 한조의 얼굴이 핼쑥했다. 그는 잠시 울음을 그치는 듯 했으나 곧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일리야스는 한조의 목과 턱, 뺨과 눈가로 거슬러 올라가 흐르는 그것을 받아마셨다. 하지만 일리야스가 아무리 열심히 마셔도 한조의 눈물이 흐르는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한조는 슬프고 또 지친 표정으로 뚝뚝 눈물만 흘리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조심스럽게 간직하던 희망.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던 희망이 산산이 깨어져버렸다. 어떻게 천 명의 목숨을 불태우고 돌아갈 수 있겠는가. 또 그 후에 새로 불태워질 천 명의 목숨은 또 어떻게 하겠는가.
“아무리 애써도 나를 벗어날 수 없단다.”
일리야스는 울고 있는 한조를 쓰다듬으며 꿀에 절인 꽃처럼 속삭였다. 꽃에는 독이 있어 한조의 귓가로 독이 흘러들었다. 
“그러니 포기하렴. 그러면 내가 네게 좋은 것들을 주겠다.”
하지만 한조는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일리야스는 그의 얼굴을 끝없이 핥으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여 위로의 말을 읊어주었다.
“이 방에서 나가지만 않는다면, 그런다면 네 손에 금과 은을 쥐어주마. 가장 빛나는 것은 모조리 네 발 아래 깔아주마.”
하지만 한조는 금도 필요 없고 은도 필요 없었다. 그는 일리야스의 발아래 깨어져버린 빛나던 희망을 슬픈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옥으로 된 촛대를 가져오마. 네 머리통만한 초도 가져오마. 그것으로 이 방을 밝히면 낮보다 환할 것이다.”
일리야스는 한조의 감은 눈꺼풀을 계속 핥았다. 그는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달콤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꿀처럼 단 목소리로 심장에 상처를 새기니 속에서 피가 넘어온다.
“명심하렴. 네 어깨에 짊어진 삼 천 명의 목숨을. 너를 위해 죽은 그들을. 그리고 나를······.”
한조는 귀를 막고 싶었지만 황제의 강인한 손길은 한조의 몸을 위에서부터 짓누르며 오갈 길 없게 만든다. 뒤로는 푹신한 쿠션이 받쳐주고 위에서는 황제가 손수 눈물을 닦아주건만 한조는 그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등을 받쳐주는것이 쿠션이 아니라 까마득한 공간처럼 느껴져 끝도 없이 추락하는 기분이 들고 위에서 짓누르는 황제의 몸무게는 폐를 짓눌러 숨을 쉬기 힘들게 했다.
“나의 약, 나의 교후. 너는 나를 벗어날 수 없단다. 왜냐하면 내가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흐으······.”
한조가 서럽게 우니 황제가 그의 교후의 눈물을 닦아주며 쉬쉬, 소리를 낸다. 마치 엄마가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동작이었다.
“오냐. 그렇게 울고 운명을 받아들이려무나. 그러면 네 마음도 홀가분해 질 것이다.”
살이 맞닿는 따뜻한 감촉은 그리운 것이었지만 하필이면 일리야스의 것이라 한조는 더욱 슬펐다. 이 남자 하나를 위해 희생된 천 명의 목숨과 자신의 기구한 처지와 이 남자를 떠났다가는 또 다시 희생돼야 할 이천 명의 목숨 때문에 심장이 끊어질듯 아파왔다.
운명은 잔인하다. 한조의 인생은 이제 시작했는데 이 야만스런 곳으로 불려와 피를 바치고 눈물을 바치며 평생을 썩어나라 한다. 사랑했던 사람들은 지상과 저승만큼 멀어져버렸고 이곳에서 유일하게 정 준 이는 죽어버려 다시는 만날 수가 없다. 송곳니가 튀어나오고 손톱이 길고 괴수같이 생겼던 얼굴이 보고 싶어 애간장이 녹아 난다. 너는 못나도 나를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가엾구나.”
일리야스는 한조가 자못 불쌍하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목에 키스도 해주었다.
“천하에 불쌍하구나. 내가 친히 네 슬픔을 핥아 주마.”
촛불의 빛이 닿지 않은 어디 구석에서, 바벳의 죽은 자매가 자신을 지켜보는 환상이 보였다. 그녀는 타다 남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족쇄로 당신을 잡아두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황제를 위해···영원히 여기서······.
일리야스는 한조를 꼭 끌어안으며 웃었다. 그리고 그의 작은 머리통에 키스를 해주었다. 그의 키스를 받은 부분에서부터 한조의 몸은 유리처럼 연약하게 되었다. 옥 같은 눈물은 황제를 위한 것이고 속은 텅 비어 흔들면 구슬소리가 난다. 골방에 갇혀 창백하게 질려 본래의 색도 잊고 주검처럼 차가워지게 되면 황제는 유리 교후를 부숴버릴 것이다.
“쉬, 쉬······.”
황제는 다정하지만 한조는 눈에서는 헛된 눈물만 넘치게 흘렀다. 




백색궁의 이른 아침 조례시간. 정신에 병이 깊었던 악시아 황제의 뒤를 이은 일리야스 황제는 행동이 빠르고 결단력이 있으며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와 회의를 하는 대신들은 늘 팽팽하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의 대신들은 왠지 모르게 살짝 헤이해진 모습이었다. 그들은 바쁘게 서류를 넘겨보지도 않았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누가 먼저 얻어맞나 마음속으로 내기를 걸지도 않았다. 
그들은 황제를 보고 있었다. 얼굴에 요상한 빛을 띠고 눈가는 은은하게 물들인 황제를 말이다.
“폐하께서······.”
내무대신이 중얼거렸다.
“말이 없으시군요.”
재경부대신이 말을 받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으니 더 불안 하외다.”
“또 누구 모가지를 댕강 자를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닌지······.”
대신들이 불안해하거나 말거나 일리야스는 자기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 없이 흐려지고 눈썹은 한껏 위로 치뜨였으며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어렸다. 
일리야스는 뛰어난 미남자지만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이상 멍청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런 황제의 모습을 보고 재밌어하기는커녕 무서울 따름이었다. 얼굴은 게게 풀어졌으나 그 속에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광기가 흐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신들은 그 표정을 알고 있었다.
마치 세월을 뛰어넘은 듯, 아름답고 총기 넘쳤던 악시아 황제가 병이 깊어지기 전에 종종 짓던 표정이었다.
‘저리 가세요.’
서류를 넘기는 척 하며 일리야스는 싱긋이 웃었다. 굵고 빽빽한 서류뭉치 사이로 나긋나긋한 손이 튀어 올랐다.
‘뭐하는···! 이러지 않아도 드리겠습니다.’
‘내가 취하리라.’
일리야스는 한조의 고개를 바로잡으며 속삭였다. 그러자 한조는 눈에 띄게 당황하여 발버둥을 쳤다.
‘어느 사냥꾼이 자신의 벌꿀을 남이 취하게 하더냐.’
‘저는 벌꿀이 아닌데요.’
안타깝게도 교후는 직설화법만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기죽지 않고 계속 시도했다.
‘꽃처럼 사지를 벌려보려무나. 내가 그 속에 들어가 놀리라.’
한조의 얼굴이 짙붉어졌다. 그는 숫총각이었고 뭘 벌리라는 말과 어디로 들어간다는 말만 들으면 얼굴이 붉어졌다.
‘이게 정말 눈물을 취하기 위해선가요?’
‘물론이지.’
‘됐어요. 그냥 찔러요. 이건 고문이에요.’
‘그냥 찔러 넣는다라······.’
일리야스는 여기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거워야하지 않겠느냐.’
‘즐겁지도 않은데요?’
‘나는 즐겁다.’
‘아니 제가 말입니다. 일리야스님 말고 저요.’
‘너도 곧 즐거워지리라.’
그리고 일리야스는 한조의 목덜미를 쭈욱 빨았다. 한조는 비명을 질렀다. 혀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로 씹는 감촉도 느껴졌다. 목에 키스를 한 적은 몇 번 있으나 이렇게 진하게 자극한 적은 없었다. 온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고 팔 다리가 빳빳해졌다.
한조는 화급히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일리야스의 무게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한조는 한국에서는 건장하고 평범한 청년이었으나 이곳에 온 뒤로는 쪽도 못 쓰고 있었다. 바벳만 해도 한조보다 힘이 세고, 일리야스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열네 살에 기사가 되니 검술 창술에 능한지라 약력도 악력도 평범한 남자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비록 병을 앓는 동안 원래의 기운을 많이 잃었으나 한조의 눈물을 취하면서부터는 서서히 과거의 위력을 되찾게 되었다.
한조는 도끼자루를 내어준 나무처럼 눈물을 내어주고 황제를 강하게 하여 자신의 입지를 약하게 만들게 되었다.
‘하지···마! 앗!’
일리야스가 어찌나 빨았는지 한조의 목덜미는 침투성이가 되었다. 살갗을 떼어먹고 싶다는 듯이 집요한 입술이다.
‘자, 이제 눈물이 나느냐.’
‘네, 납니다.’
한조는 울면서 말했다. 이제 일리야스가 건들기만 하면 자동이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더 많은 눈물을 요구했다.
‘이것으로는 나를 축이지 못한다.’
‘하앗!’
다시 다리가 꼬이고 모가지가 돌아가고 손발이 뒤엉켰다. 일리야스는 한조의 다리를 너르게 하고 그 사이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 이리저리 분방하게 움직였으며 머리는 독사의 대가리마냥 집요하게 한조의 목덜미를 노렸다.
야단스럽고 폭이 너르게 한조의 몸을 돌아다니던 일리야스의 손가락이 어느 순간 허벅지 안쪽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한조는 저도 모르게 악, 새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짓이야! 하지 마요!’
‘하아···여기는 만지지 말란 말이냐?’
‘거기를, 거, 거기를 만졌다간 눈물 말고 다른 게 나와요오!’
‘왠지······.’
일리야스는 잠시 고민했다.
‘보고 싶구나.’
‘난 싫어요! 싫다고! 당신하고 그런 거 보기 싫어! 놔요!’
한조의 팔꿈치가 일리야스의 눈알을 찔렀다. 일리야스가 위축된 사이 한조는 재빨리 침대에서 뛰어내리더니 어느 순간부터 쓸모없어진 금잔에 눈을 대고 뚝뚝 눈물을 흘렸다.
일리야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있었다. 한조는 금잔을 내밀며 외쳤다.
‘자요! 받아요!’
‘······빠르기도 하구나.’
일리야스는 입맛을 다셨다.
‘감사합니다.’
한조는 헉헉대며 말했다. 아니 칭찬은 아니다만······. 일리야스는 한조가 숨을 고르는 모습을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았다. 왜일까. 자꾸만···그를 만지작거리고 싶다.
일리야스는 한조의 흐트러진 옷차림을 눈여겨 살펴보았다. 상의는 위로 말려 올라가 있고 하의도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일리야스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날름거렸다. 속이 바싹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한조의 속살이 드러난 것을 보니 만지고 싶었다. 저 빛깔이 고운 살결과 아담한 뼈대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싶고 또 쓰다듬고 싶고, 아래로도··· 그 아래로도 손을 미끄러트리고 싶다.
‘글을 배우고 싶댔지.’
일리야스가 입을 열었는데 몹시 쉬고 탁한 목소리였다. 왠지 그 목소리를 듣자 한조는 몸이 간지러워졌다.
‘내가···직접 가르쳐주마.’
‘아니요, 필요 없습니다.’
‘배우고 싶댔잖느냐.’
‘됐거든요!’
한조가 야멸치게 거절하자 일리야스의 눈빛이 음침하게 변했다. 그는 눈에서 불꽃을 튀기며 물었다.
‘혹시 너······.’
한조는 일리야스의 박력에 밀려 움찔했다.
‘바벳한테 배우고 싶은 거냐?’
‘네?’
일리야스는 자신의 혀를 멈출 수가 없었다. 
‘나한테···배우기는 싫다는 거냐?’
‘네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한조는 난감해졌다.
‘바벳에게 배우고 싶은 거로군! 그런 거로군! 내 당장 이년을!’
‘아니요! 아니요! 배, 배울게요. 일리야스님한테 배울게요!’
한조는 허겁지겁 외쳤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일리야스를 말리지 않았다가는 업무상 과실치사로 바벳역시 죽을 것만 같았다.
‘배운다고요. 배워요.’
울상을 지으며 배우겠노라 말하던 한조의 얼굴을 떠올리자 일리야스의 얼굴이 다시 게게 풀어졌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한조가 예스를 외치는 장면이 벌써 백번쯤 재생 중이었다. 
나를 싫어하고 나를 무서워했지······.
일리야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내게 배우면서 나의 부드러운 면을 보게 되리라. 나의 지식과 지혜로움을 알고 내게 반하리라.
지금까지의 기억은 전부 없애 주리라. 다시 한 번···내게 미소 짓게 만들어주마.
그 못난 남자를 안아주던 두 팔도, 사랑스런 눈빛도, 키스를 거부하지 않던 입술도. 모두 처음부터 내 것이었으니······.
황제의 얼굴에 점차 드러나는 야욕에 대신들은 고개를 외면해버렸다. 그들의 황제의 포부는 원대하여 그의 신하들마저 그 속을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리야스는 자신을 미워하는지도 모른다······.
라고 한조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일리야스가 자신을 돌, 개, 가축, 벽, 음식, 약, 지나가던 재수 없는 개구리 등으로 여긴다고 생각해왔지만, 이제는 그가 자신을 미워하고···혹은 증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증거로······.
한조는 힐끔 일리야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도깨비처럼 얼굴이 시뻘게진 일리야스가 보였다. 눈은 튀어나올 것 같고 입술은 앙 다물렸으며 주먹은 꽉 움켜쥐고 있다. 잘생긴 놈이 화를 내자 박력도 두 배다. 한조는 심장을 움켜쥐고 신음했다. 차라리 나를 패라, 패. 그는 속으로 외쳤다.
“어째서 모르는 거냐.”
일리야스는 입술은 악 다문채로 말을 했다. 무시무시한 복화술 실력이었다. 한조가 백일주 먹고 들어와 이불에 오줌 쌌을 때 엄마가 꼭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왜···모르는 거냐.”
“잘못했어요.”
저도 모르게 용서를 비는 말이 튀어나갔다. 그러자 일리야스가 빗금으로 그어 내린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나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는 목석같은 손가락을 움직여 한조의 양피지를 꽉꽉 눌렀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또 여기. 여기와 여기.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그리고 여기도. 틀.렸.잖.느.냐.”
“잘못했어요.”
한조는 울고 싶었다.
“하,하,하. 나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니까.”
위대한 신의 핏줄, 신성제국 그란사나의 황제는 과감하게 자신의 관용을 자랑했다. 그러자 역시 신성제국 성청의 지배자이자 신의 그릇인 그란사나의 교후 한조는 넓죽 엎드려 황제의 성은에 망극해함을 온 몸으로 표현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하,하,하.”
황제는 눈에서 불꽃을 튀기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본 교후는 사지가 오그라들었다.
‘이것은 새로운 눈물 받는 법인가.’
한조는 떨면서 생각했다.
‘공부못한다고 구박하면서?’
차라리 패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한조는 대한민국 입시지옥, 살아생전 스카이 문턱 밟아보면 그걸로 인생 성공한 거 아닌가요를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동안 겪어왔다. 그리고 보통의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그런 것처럼 너 못생겼다보다 너 공부 못하게 생겼다는 말이 더 가슴에 상처가 되었다.
그런 것을. 불타 죽어 이 이상한 세상에 와서까지 공부 못한다고 구박이라니······. 한조는 가슴을 부여잡고 질질 짰다. 세상에서 공부가 젤 싫어요. 글 가르쳐 달랄 때는 언제고 한조는 지금 공부하기 싫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말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데는 왕도가 없다. 꾸준히 읽고 듣고 쓰면서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글자를 배우는 데만도 최소 한 달은 걸리지 않나? -한조는 그랬다-
그런 것을 이틀 만에 제대로 못 쓴다고 구박을 받으니 우울하다 못해 목에 줄 걸고 죽고 싶어질 정도였다.
“죄송해요. 저 못 배우겠어요. 그만할게요.”
한조는 울면서 부탁했다. 그러자 도깨비 같은 얼굴로 웃고 있던 일리야스의 얼굴에서 그나마 웃음기마저 싹 지워지더니 이렇게 물었다.
“나한테 배우기 싫다는 거냐?”
“네?”
한조는 울다말고 일리야스를 쳐다보았다.
“나한테···안 배우고······.”
“헉!”
“그렇다는 것은···나 말고··· 바벳한테 배우겠다는 거냐!”
“아, 아니에요!”
“그 말이 그 말이지!”
“어떻게 그 말이 그 말이에요!”
공부하기 싫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열등생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일리야스는 양피지를 좍좍 찢으며 외쳤다.
“내 당장 이년을!”
“악! 아니에요! 공부할게요! 공부 할 테니 화내지 마세요!”
“나는 화내는 게 아니라니까!”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배움에 대한 열의를 드러내는 한조였다.


37편   
“대체 자기는 예전에 낫 놓고 기역도 몰랐잖아.”
끔찍한 공부의 시간이 지나고 한조는 심장을 부여잡고 쓰린 속을 토해냈다. 그러자 묵묵히 방을 청소하던 바벳이 참견했다.
“그분은 세 살 때 글을 깨우치시고 열 살 때 대학자들과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한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세 살 때 자기가 뭘 했는지 떠올렸다. 걷다가 자빠지고 있었다. 열 살 때는 뭘 했나 떠올려보니 구구단 못 외워서 벌섰던 기억이 났다.
“열 넷에 기사가 되어 전장을 누비셨고 미왕의 호칭을 받아 왕좌에 올랐습니다.”
한조는 열 넷에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딱지를 맞고 있었다. 물론 열다섯 살에도 열여섯 살에도 열일곱 살에도 열여덟 살에도······.
“그러니 그분께서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실은 나도···라는 눈빛으로 여인이 한조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보자 한조는 기가 팍 죽었다. 하지만 한조가 몰랐던 사실은, 여기서 맨날 빨래와 청소및 각종 부엌데기 일을 하는 바벳 역시 엘리트중의 엘리트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일리야스가 병환에 걸리기 전부터 황제의 최측근에서 비밀스럽게 일하는 요직인사였다.
비록, 너무 비밀스러운 일만 하다 보니 아무도 그녀가 요직인사인줄 모른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하지만 공부가 문제가 아니야.’
잠시 의기소침했던 한조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더 싫은 건 놈의 태도다.’
원래 한조는 단순하고 뒤끝이 없어 누가 자신에게 못되게 해도 금방 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뒤끝이 없는 대신 앞 끝은 있는지라 일리야스의 옛 모습을 떠올리면 요즘 그가 하는 행동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자꾸 만지는지······.
한조는 두 팔로 자신의 몸통을 감쌌다. 난방이 잘 되어 있는 방에서 혼자 오싹하다.
왜 자꾸 더듬는지, 왜 자꾸 입술을 대는지.
‘술잔에 술이 넘치듯 네 눈에 눈물이 넘치니 내가 핥아 서러움을 닦아주마.’
그리고 그 느끼한 말들은 대체 어디서 듣고 온 건지.
모든 기억과 미모를 되찾은 후, 일리야스는 한조를 소 닭 보듯 했다. 약으로만, 꼭두각시로 쓰기 좋은 교후로만 보았고 또 그렇게 대했다. 그들의 관계가 한때 좋았던 적도 있었지만 그 남자는 이제 없고 모든 것은 한조의 착각이었다. 그래서 한조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리야스를 소 닭 보듯 보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이 관계가 변한 듯하다.
‘내게 글을 배웠으니 너는 내게 은혜를 하나 입은 것이 아니냐.’
일리야스는 뻔뻔스러운 말을 하며 한조의 어깨를 주물러댔다.
‘저···이제 겨우 모음 다 외웠는데요?’
‘그만하면 너로서는 잘 한 것이다.’
공부를 가르친지 사흘째. 한조에 대한 일리야스의 기대치는 한없이 낮아졌다. 그는 한조가 모음을 전부 쓸 수 있게 되자 진심어린 미소를 씩, 지었고 그 미소를 본 한조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는 요사스러울 만큼 아름답고 옛날의 일리어스는 그냥 요상했지만 둘 사이의 공통점을 처음으로 찾은 기분이었다.
‘이리 온, 한조.’
일리야스는 당당하게 요구했다. 무릎을 너르게 벌리고 두 팔을 앞으로 뻗어 개 부르듯 불렀다.
‘오늘 잘 했다. 상을 줄 테니, 이리 온.’
한조는 탐탁찮은 표정으로 탁자 위를 쳐다보았다. 분명 얼마 전까진 저기 금잔이 있었는데······. 
눈물받이용으로 늘 거기 있던 금잔은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평범한 잔을 사용해서 눈물을 받아 디밀었더니 이번에는 방 안에 잔이란 잔은 전부 사라져버렸다.
‘이리 오래도?’
일리야스의 목소리에 슬슬 힘이 실렸다. 한조는 할 수 없이 일리야스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아!’
그러면 일리야스가 한조의 팔을 잡아당기고, 이윽고 한조는 일리야스의 품 안에 갇히게 된다. 그는 덩굴처럼, 혹은 땅 끝처럼 한조를 옭아맸고 한조는 그 속에 잡힌 작은 새나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져 한조는 신음을 흘렸다.
‘눈물을 드릴 테니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랬지.’
‘내게 관심가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것도 그랬지.’
‘그런데 왜 자꾸 이래요?’
한조는 거미줄 같은 일리야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내 맘이다.’
일리야스는 얄미울 정도로 똑 부러지는 대답을 했다. 그랬다. 지 맘이었다.
‘나는 황제고, 너는 교후이자 내 신하다. 황제가 신하를 가까이하니 이보다 훈훈한 광경이 어디 있느냐.’
한조는 훈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황제가 그의 신하의 허벅다리를 꽉 움켜잡기 때문이었다.
‘나는 결심을 굳혔다.’
일리야스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원래 나를 좋아했어. 그렇지?’
‘그거야 그랬죠! 옛날에는!’
하지만 일리야스는 한조의 뒷말은 쏙 빼먹고 앞의 말만 기억했다.
‘넌 나를 좋아했어.’
그는 한조의 뺨을 부비며 중얼거렸다.
‘나도 네 마음을 받아주마.’
받아주긴 개뿔이······. 한조는 갑자기 속이 쓰려와 미간을 콱 찌푸렸다. 그는 황제의 마음 따위 필요 없었다. 서로를 소 닭 보듯 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혼자 진도를 빼더니 이제 한조도 자신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눈물의 의미를··· 내가 이제야 알겠다.’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알지 못해서··· 내가 미안하다.’
한조는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났다. 그것을 일리야스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다정하게 위로해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아니야······.
한조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니가 아니니까 저리 좀 가줄래?
이러지 마. 그 잘생긴 면상 저리 치워. 내가 보고 싶은 얼굴은 네가 아니야. 그는 이미 죽었으니까 다시 만나지 못해.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조는 심장이 저려서 반박의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는데 일리야스가 상처를 건드렸다. 그가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한조는 마치 얹힌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황제 일리야스는 과거에 한조가 좋아했던 시체 같은 남자를 떠올리게 했다.
바벳이 마지막 식사를 내어가고 어느새 일리야스가 올 시간이 되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펜과 잉크를 들고 자세를 비스듬히 했다.
살짝 기울어진 고개를 따라 보랏빛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물결쳤다. 마치 짙은 포도송이처럼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촛불에 비친 얼굴은 희고 깨끗하며 달처럼 곱다.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한조를 쳐다보며 웃는다. 반겨줄 것을 기대하는 눈빛이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본 한조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저 남자다. 저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죽이고 자신을 아프게 하고 학대하고 홀대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우리는 같은 사람이니 사랑해 달라고 말하고 있다. 
일리야스는 한조가 울자 서둘러 다가와 두 팔로 껴안아 주었다. 한조는 그 손을 뿌리쳤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과거에 한조가 일리야스에게 주었던 것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누가 너를 아프게 하느냐.”
일리야스가 물었다. 한조는 고개를 흔들었다. 한조를 아프게 하는 건 일리야스였으니까.
‘당신을 보고 싶은 게 아니야.’
한조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자꾸 찾아오는 거야. 왜 자꾸 그 못난 남자를 떠올리게 해. 보고 싶어 일리야스. 넌 대체 어디로 간 거니?’
거기까지 생각한 한조는 우는 것을 멈추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내가 마치 그를 사랑하는 것 같잖아?’
이 감정은 고3때 한조를 찼던 여자애가 같은 반 남학생과 다정하게 놀아나는 것을 보았을 때 받은 느낌과 꼭 같았다.
‘하지만 일리야스는 이제 없는데······.’
한조는 자신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일리야스를 눈만 굴려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다정했지만 한조는 저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세상에 없는데··· 이럴 수가, 이젠 거절당하기도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죽어버리기까지 하잖아?’
뒤늦게 자신이 실연당했음을 안 한조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하지만 스스로를 조소하는 그 비웃음은 손가락 사이로 힘없이 빠져나가더니 곧 신음이 되어 흘러내렸다. 괴이한 미소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른다.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새는데 입은 웃고 있었다. 32번째 실연이 저도 모르게 지나간 것이다.
“왜 우느냐.”
일리야스의 얼굴도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의 예리한 감이 이상한 것을 잡아내었다.
“누구를 생각하고 우는 거냐.”
“당신을 생각하면서 울었습니다.”
한조가 대답했다.
“······그 놈이로군..”
한조를 잡고 있는 손아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 놈을 생각하면서 우는 거야. 그렇지?”
“제발 저를 가만히 두세요! 전 지금 실연당했다고요!”
“실연? 왜 네가 실연을 당했느냐. 내가 여기 있잖느냐.”
“당신은 그 사람이 아니에요.”
“같은 사람이다.”
일리야스는 성급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당신은 그 사람이 아니에요.”
한조는 서럽게 울다 말고 느닷없이 일리야스의 얼굴을 양손으로 그러잡았다. 한조의 손길에 일리야스는 뻣뻣하게 굳었다. 마치 그때 같았다. 슬프게 울며 눈물을 주겠다 말하던 그때 같았다. 잠시라도 가까워졌다 생각했는데 다시 그때와 같이 멀어져버렸다. 강과 바다가 가운데 흐르고 그 위로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인다.
“그 사람은 날 때리지도 않았을 거에요.”
한조는 일리야스를 보며 웃었다.
“제발 오지 말아요. 당신을 보면 그 사람이 생각나요. 제발···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 당신을 보기 싫어요. 오지 마세요. 건드리지 말아요. 날 내버려두세요. 놓아주지 못한다면···그거라도 들어주세요.”
한 마디 한 마디가 송곳처럼 마음을 후빈다. 얼음장 같던 마음에 폭우가 치니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몸을 던져버리겠다. 단호한 검은 눈동자가 당신은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는다. 그 선의 안쪽에는 그 못난 놈이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조는 일리야스의 입술에 눈물을 찍어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무릎에서 일어나자 따뜻한 온기도 사라지고 전신에 한기가 든다. 마치 이 방의 모든 따뜻한 것은 한조가 가져가버린 것처럼 추위를 느꼈다.
한조의 뒷모습을 멍하니 눈으로 쫓으며 일리야스는 어떤 말이라도 하려고 했다. 약이 자신의 마음을 알면···자신도 약에게 마음이 있고, 예전처럼 지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면··· 약이 다시 기뻐할 줄 알았다. 미소 지어줄줄 알았다. 그런데 이 대우는 뭐란 말인가. 살면서 이토록 끔찍한 느낌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성혈의 저주로 죽음 같은 잠으로 빠져들었던 그때에도. 이런 까마득한 기분은 느껴보지 못했다.
한조는 탁자에 몸을 기대고 격하게 숨을 골랐다. 이로써 된 거다. 그는 오만하니 이만큼 했으면 떨어져나갈 것이다. 칼로 손목을 그을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당신은 그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 사람이 아니다. 더 차갑고 야멸치다. 얼음 같은 그 마음에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다.
‘그거면 된 거야.’
한조는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괴로웠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거면······.’
“더는 오지 말라고?”
한참 만에 일리야스가 말했다. 한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몸에···손대지 말라고?”
한조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라면 너를 때리지 않았을 거라고?”
“그래요.”
한조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따뜻한 숨결이 목덜미를 덮치는가 싶더니 이내 커다란 손이 한조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강제로 고개가 꺾어져 뒤를 돌아보니 시커먼 눈알이 번뜩거린다.
소리를 지르려 하나 황제의 힘이 세어 한조가 당해내지 못한다.
“아윽!”
이내 황제의 입술이 한조의 입술을 짓누르고 그 속살을 열어, 혀를 집어넣는다. 그가 한조의 입술을 탐하며 윗도리를 찢어발기니 한조는 놀라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싫어!”
비명을 질러보나 황제의 힘을 막을 수가 없다.
일리야스는 한조를 번쩍 들어 올려 침대로 올라갔다. 마치 첫날밤을 치르는 신랑처럼 자못 진지한 모습이다. 함께 무너져 침대위로 넘어지니 일리야스에게 깔린 한조는 철근에 깔린 기분이 들었다. 황제는 건장하고, 또 힘이 좋으니 한조가 상대할 바가 못 되었다.
“그놈이 너를 때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나?”
일리야스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나도 그놈이고, 그놈이 나다. 네 환상을 박살내주마.”
바지가 벗겨지고 홀딱 벗은 하체가 드러났다. 일리야스는 거칠 것이 없었다. 몇 번 움직이자 그의 하체역시 완전히 드러나게 되었다.
“다음엔 너만 보여주겠다고 했지?”
“시, 싫어.”
한조는 벌벌 떨며 기어갔다. 일리야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녹을 것처럼 달콤했다.
“이제···그 약속을 지켜주마.”
일리야스는 한조의 가는 발목을 잡고 쭉 잡아당겼다. 한조의 흰 손은 일리야스의 등 뒤로 뻗어나가 불길한 어둠을 한 움큼 그러잡았다. 그 손의 끝을 잡고 바벳의 자매가 한조에게 속삭였다. 황제의 것이 되어··· 영원히 이곳에서······.
“싫어어어―!”

신성제국 그란사나의 성스러운 백색궁. 그 궁의 가장 깊은 곳, 황제의 침실에 숨겨놓은 작은 새장.
그곳에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지닌 교후가 있어 황제가 그를 어여삐 여겨 심히 총애하였다. 
그 사랑이 깊어 누구도 교후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교후와 말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황제가 교후를 총애하는 마음이 깊음에 질투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