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고장나면(프롤로그~제 10화) prologue. 기찻길. 문명에만 따라가는 인간들이 만든 기찻길. 이 사이에 내가, 우리가 서 있다. 칙칙칙, 치익. 거리며 출발하는 기차. ていし. 라고 써있는 표지판과 여전히 시끄러운 기차소리. 이미 낡아빠진 기찻길은 듣기 싫은 소리 덕에 그 누구도 오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근데 이곳에. 우리가 서 있다. 왼쪽, 오른쪽. 앞에 내려진 안전봉을 사이로. 기차가 지나가는 사이로. 희미하게 니가 보인다. ‘안녕.’ “오른손 들어 너에게 인사하지만 보이지 않는가보다.” “왼손 들어 너에게 인사하지만 보이지 않는가보다.” 하늘에서는 빵을 굽다 남은 밀가루 반죽을 가지고 장난치는 아이가 던지는 것 같은 그런 눈이 떨어진다. 그리고. 그 눈이 내리는 길목으로 떠가는 비행기. 칙칙칙, 치익. 거리며 사라지는 기차. 이제야 비로소 니 모습이 보인다. 우리 모두 털로 짠 목도리를 메고서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눈을 보면서 얘기 하는 우리들. “...심장이고장나서.” “......심장이고장나서.” “.........심장이고장나서.” “............심장이고장나서” 똑같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들. 다른데. 우린 태어난곳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른데. 왜 눈이 닮아있을까. 아니? 그 이유를 아니? 넌? ‘몰라.’ 난 아는데. ‘뭔데.’ 아파서 그러는거야. ‘어디가.’ 서로가 슬픈 만큼 아파서 닮은거야. ‘무슨소리.’ 서로의 행복 만큼 아파서 닮은거야. 그런거야. 우리는 그래서 닮은거야. 눈이 닮아서 사랑했고, 내 눈을 닮은 니가 힘겨워해서 떠났고, 니가 눈을 감아서 나도 눈을 감은거야. 라는 이런 슬픈 변명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심장이 고장나면..” ていし. → '정지' 라는 뜻. 제 1화 어쩌면. 운명이라는건 우연보다 쉬운건가보다. ※※※※ 살짝 토끼 모양처럼 생긴 인천 국제 공항 안은 시끌거렸다. 안내 방송에 사람들 북쩍거리는 소리까지. 나는 선지와의 이번 여행을 아주 뜻깊게 생각한다. 내 마지막 여행이될 수도 있으니까. 심장병이라는 병에 걸려서 지질이 복도 없이 이런 투병 여행을 떠나야 하는 나이다. 선지와 나는 입.출국서를 제출했다. 우리는 바로 비행기에 탑승했고, 얼마되지 않아 비행기는 이륙했다. 선지는 타자마자 졸립다며 잠을 청했고, 나는 둥근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보았다. ‘새하얀 하늘처럼 내 병도 하얗게 사라지면 좋을텐데.’ 그렇게 우리는 대략 2시간 여 만에 간사이 공항에 도착했다. 간사이 공항에 도착해서 여러 가지 소속을 밟고서는 우리는 인포메이션 데크로 가서 바로 간사이스룻패스를 샀다. 오사카 시내까지 편히 라피도 알파 열차를 타고향했다. 니혼바시 반짝거리는 간판들이 수없이 보이는 도시에 도착한 선지와 나. “멋있는걸?” 상가가 줄을 잇고 있는 이곳은 말할 것도 없이 반짝거리는 별이 모여있는 것 같았다. “선지야, 나 뭐 좀 사가지고 올라갈게.” “뭐를? 한국에서 다 가져 왔잖아.” 나는 아무말도 묻지마라하며 선지의 어깨를 툭쳤다. 주황빛이 감도는 가로등이 인도를 비추고, 내몸은 한 상가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상가 안으로 들어갔다. 구경 온 사람 인냥 티내고 들어간 나였다. “디기 예쁘다.” (물건 살껀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본말 중 할줄아는건 あリがとうございます。와 ちよなら 뿐인데. 내옆에 팔짱을 끼고 계속 날 지켜보는 주인. ‘왜 그러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돌아다니며 물건을 살펴보았다. (안 살거면 나가!) 폭발이었다. 주인장은 나를 밀어냈고, 나는 아무런 항의 없이 그렇게 쫒겨났다. “뭐야, 난 그냥 구경 했을 뿐 인데.” 나는 옷을 탁탁 털고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또 다시 한 상가 앞에 섰다. 문 앞에는 ‘KOREA’ 라고 써있었다. “한국?” 나는 상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한국 사람이 꽤 눈에 보였다. 이리저리 들려오는 한국말. 나는 편안히 구경하였다. (일본 사람?) 나에게 와서 말을 건네는 한 여자. 나는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국 사람?” “네.” “아, 죄송해요. 일본 사람인 줄 알았어요.” 하하하하. 입을가리고 웃는 그여자. 나는 살며시 웃어보이고는 잡고 있는 물건을 다시 빤히 쳐다보았다. “이거 얼마예요?” “그거 우리나라 돈으로는 3만원 정도에요.” 하지만. 난 지금 돈이 없는걸. 아까 선지가 같이 가방을 들고간 바람에. “다음에 다시 올게요. 지갑을 놓고 와서.” “그러세요.” 그 여자는 상냥하게 웃어보였다. 아까 그 일본 상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곧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여기 맞나?” 어떤 빌라 앞에선 나였다. 아까 선지가 여기라고 했는데. 우선 들어가고 보자! 나는 달려 들어갔다. 쿵. 부딫혔다. “아야.” 나는 어깨를 감쌌다. (뭐야.) 무뚝뚝해 보이는 남자였다.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본 말로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대답해. 나는 그저 고개숙여 ‘죄송하다’ 라고 표현했다. (일본 사람 아니야?) 또다시 갸우뚱. 나를 한번 스윽 쳐다보던 그 남자. “일본 사람 아니야?” “아닌데.” 오늘만 벌써 2번째 듣는 소리이다. “무튼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서는 문 앞에 섰다. “선지야! 문열어!” 나를 빼꼼히 쳐다보는 그 남자. “왜요?” 나는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말 없이 가버리는 남자였다. ‘뭐야.’ 그 남자가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 선지는 문을 열었다. “이 괴팍한 년아, 문을 때려 부시냐?” “니가 빨리 열어야지!” “근데, 아까 그 무시한 괴음은 뭐 였어?” “괴음?” 아. 괴음이라는건 내가 ‘아야.’ 한것이었다. “그게 왜 괴음이야!” “넌 괴물이잖아.” 나는 뾰루퉁한 입을 내밀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내 가방 어디있어?” “니 방에있지.”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방에서 지갑을 빼내었다. “어디가 또?” “맘에 드는게 생겼어.사러 가게.” “잘 갔다와.” 선지의 마지못해 하는 배웅을 뒤로하고 나는 집을 나왔다. あリがとうございます。 →'대단히감사합니다'라는뜻 ちよなら →'영원히안녕'이라는뜻 제 2화 그리고는 바로 가게로 달려갔다. “오셨네요?” 눈이 휘둥그레진 주인 여자. “헤헤, 돈 가지고 왔어요.” 나는 물건을 향해 걸어갔다. “갖고 싶었던 물건이신가 봐요?” “네. 무척 갖고 싶었던거예요.” 나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내가 그렇게 달려가서 돈까지 가져 올 만큼 갖고 싶었던 건 조그만한 고양이였다. 싼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워낙 좋아하는 고양이이니까. 맘 먹고 사는 것이였다. 나는 돈을 지불하고는 고양이를 안았다. 야옹. 그리고 싱글벙글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선지는 나에게 아픈 사람이 무슨 동물이냐며 가서 환불해 오라고 했지만 나는 똥고집 으로 키우겠다고했다. 다음날 아침을 알리는 차갑고 시린 바람이 나를 깨웠다. “누가 베란다 문을 열었지?” 나는 선지 방에 들어갔다. 선지는 아무것도 모른채 자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나는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에는 류가 있었다. “류?” 야옹. 내가 류라고 부르니 야옹. 이라고 대답한다. “니가 문 열었어?” 하긴, 이렇게 물어보면 어느 고양이가 대답하겠어. 그저 류는 내 다리에 고개를 비비적 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류를 품에 안고서 방으로 들어왔다. 징. 하고 울리는 내 핸드폰. 좀 오래되서 낡은 내 핸드폰 액정에는 낯선 번호가 적혔다. “여보세요.” [누나?] 누나? 내가 누나라구? “누구세요?” [내 목소리 잊어 버린거야?] 목소리. “음,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래요? 맞혀 볼 테니까.” [누나.] “..연하?” 조금 뜸을 드리고는 연하라고 말했다. [빙고!] 연하였다. 우연하라는 사람은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내가 아끼던 미술과 동생이었다. 나를 좋아한다고만 안 했더라면 의남매 이상이었을 수 있었을 미래였는데, “국제 전화 아니야? 돈 많이 나오잖아.” [나 한국 아닌걸?] “그럼?” [일본이야.] 일본이라고? 그럼 나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거네? “어딘데?” [도쿄야.] 도쿄라. 꽤멀다. 대략 8시간 거리인걸. “일본에 있다고 하니까 괜히 보고 싶다.” [멀잖아. 내가 누나 있는대로 놀러갈게.] “알았어. 그래 끊어.” 전화를 끊었다. 침대에 걸터 앉아 류를 품에 앉고 다리를 팔랑팔랑 흔들어댔다. “만날 자신감도 없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고백을 받은 이후. 그리고 내가 아프고 난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연하였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만나게 되다니. 지금까지 가슴 졸인게 왠지 허망한 것 같다는 기분이든다. 쿵쿵! 무슨소리야? 나는 방에서 뛰어 나왔다. 누군가 문을 쿵하고 두드리는 것 이었다. 선지는 눈을 비비며 자기 방에서 나왔다. “누구야?” “몰라, 나도.” 우리 둘은 찰싹 붙어가지고는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었다. (쓰레기 누가 이런데 버리라고 했어요.)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일본말. 어제 충분히 들어서 귀가 따갑다. 나는 귀를 막고서는 고개를 들었다. 어제 그 남자였다. 나를 보더니 일본어를 멈췄다. “쓰레기 누가 이런데 버리라고 했어요.” “하하. 죄송해요, 저희가 어제 한국에서 와서요.” 선지는 아주 상냥한 척 연기를 했다. 선지야. 니연기는 어째 날이 가면 갈수록 호연이냐? 나는 구린 표정으로 눈을 아래로 내렸다. “내 말 안 들려요?” “들려요.” “근데 왜 안 치워?” 왜 말이 짧아졌니? “치울건데?” 나 역시 대드는건 마찬가지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는 쓰레기봉투를 들었다. “어디다 놓으면 되는데요?” “이틀 후에 내다 놓아.” “알았어요, 선지야. 들어가자.” “야! 초원유.” 나는 문을 쾅 닫았다. “하하, 제가 성격이 좀 안 좋아서. 그럼 이만.” 선지는 고개를 숙이고는 인사를 꾸벅 했다. “야, 너 왜 그래.” “나한테 왠 태클? 그리고 반말은 뭐냐구.” 선지는 내 머리를 톡 쳤다. “너도 했지 않았습니까.” “저 사람이 먼저 시작 했잖아.” “이런 애가 뭐가 좋다고 쫒아다니는 애들은 많았는지. 원~” 낸들 어찌 알겠냐. 근데 생각할수록 드럽네? 어제부터 쳐다보지를 않나. 오늘은 태클에 반말? 짜증난다구! 호연 →'아주좋은연기'또는'연주'라는뜻 제 3화 그 날 저녁 한국에서는 이사를 하게 되면 격식으로 이웃들에게 떡을 돌린다. 그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다. 근데 이걸 굳이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도 해야하나. 궁금하다. “하자구! 내가 다 사왔단 말야.” “그럼 니가 갔다 줘.” “나는 옮겨야 하잖아.” 결국은 그랬다. 나만 힘든거 시키고 자기는 쉬운 것을 하려는 선지의 잔머리. “어떻게 아픈 애한테 힘든걸 시키냐?” 선지는 뜨끔했나보다. “아, 알았어! 그럼 내가 3, 4층 돌릴테니까 1, 2층은 니가 돌려.” “피, 알았어.” 나는 떡을 2층부터 돌리기 시작 했다. 어떤 집은 안 먹는다며 가져가라고 했고, 어떤 집은 감사하다며 인사를 꾸벅하기도 했다. 마지막 1층 집. 우리 집 바로 옆 집이다. 띠링.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나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집 안에는 아까 그 반말한 싸가지가 들어 있었다. “뭔데요?” 다시 길어졌군. “떡이요, 이사 왔으니까.” “안 먹어요.” 안 먹는다며 문을 닫으려는 그 남자. “자, 잠깐만요!” 나는 문을 잡아당겼다. “사람이 갖다 준 성의가 있잖아요.” “됐다니까요.” “먹으라고!” 나도 성질이 나왔다. “나름 화해 모드로 가려고 했더니 말을 들어먹지를 않는구만?” 그 남자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더 해봐.” “이깟, 떡! 먹기 싫음 먹지마! 내가 먹고서 살 디룩디룩 찌면 되니까.” 나는 잡고있던 문을 놓았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화해 모드 였으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거 아니야?” 이제 와서 화해 모드? “그런거 있지도 않았네요!” 나는 문을 쾅! 닫고는 집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너 그러고 다니면 땅 무너져!” “입 다물어!” 나는 선지에게 승질을 잔뜩 부리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 자식은 사람도 아니야.” 야옹. 류만의 내 말에 대답해줬다. 이럴 때는 은영이가 내 말을 잘 들어 줬는데, 나는 결국, 은영이가 그리워 국제전화를 사용하기로 했다. “은동아.” 은영이의 별명이다. [원유가?] 은영이는 부산에서 살다가 서울로 온 아이였다. 고등학생 때 정말 웃겼는데, 선생님한테 이 말투로 대들다가 선지하고 나하고 같이 혼났었는데. “그래. 나다. 이 기집애야.” [왜 이제 전화 했나, 일본은 잘 간기가?] “응. 잘 왔지. 너는?” [나야, 항상 그랬듯이.] 본론은 까먹은지 오래였다. [국제전화 아니가?] “내가 은동이 목소리 들을려구, 한번 했지!” 그런데 은영이는 괜히 화를 냈다. [그만하라, 돈 억수로 나온다.] “괜찮,” [퍼뜩 끊으라, 나 끊는다.] 은영이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뭐야, 나는 더 말하고 싶었는데.” 지금 생각 났다. 본론이. “이런 바보 자식.” 다음날 선지는 아침부터 좋은 카페가 있다며 나를 끌고 나왔다. 이름은 sweet cafe 였다. “어서오세요.” 한국 사람이 하는 카페 였나 보다. 근데 전혀 한국 사람 안 같은걸? “주문 하실래요?” “레몬에이드하고 커피, 그리고 초코쿠키 주세요.” “알겠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가는 점원은 예뻤다. 나보다, 선지보다 어려보였다. “몇 살일까?” “물어봐.” 선지는 나에게 시켰다. 그리고 쿠키와 음료가 나오고 나는 물었다. “저기요, 몇 살이에요?” “네? 저요?” 나와 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21살이요.” 많이 어릴 줄 알았는데 우리보다 고작 1살 어리다니, “한국 사람이에요?” “아, 혼혈아예요.” “아.” 혼혈아였구나. “자주 올 테니까, 말 놔요.” “아니에요.” “나는 이미 놨는걸?” “헤헤.” “근데 혼자 하는거야?” “예전에는 엄마가 하셨는데, 지금은 몸이 안 좋으셔서.” “그랬구나.”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잠시 레몬에이드 안에 들어 있는 빨대를 놓았다. 그리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사람은 모두 병들고 약해 질 수 밖에 없는거야. 너는 단지 그 일이 빨리 진행 된 것 뿐이지.’ “원유야!” “어,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야, 아무것도.” 나는 웃어보이며 쿠키를 집었다. “다음에 연하 만날 때 여기서 만나야겠다.” “연하?” 연하는 선지도 잘 알고있다. “아, 말 안 해줬지? 연하 일본에 있대.” “정말?” 한때 선지는 연하가 귀엽다면서 좋아 했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다른 사람이 좋다며 포기했지만. “근데.... 볼 용기가 없어.” “왜?” “내가 연하, 차 버렸잖아.” “언제 적 이야기야.” 선지는 잊으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제 4화 다음날 “아함.” 나는 큰소리로 하품을 했다. 류도 역시 다리를 쭉피고서는 입을 쫙 벌렸다. 징. 아침부터 왠 전화? “여보세요?” [누나, 나 오사카야!] “여, 연하야. 벌써 왔어?” [보고싶다면서.] “너 힘들잖아, 아침 일찍 와서.” [괜찮아!] 연하는 일정한 스타카토 형식으로 말했다. “아, 연하야.” [어?] “누나가 좋은 카페 아는데.” 약속 장소는 어제 그 곳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볼을 사정 없이 때렸다. “어쩌지? 어쩌지?” 내가 이러는 이유는, 도저히 연하를 만나서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4시간이나 훌쩍 지나가 버렸다. “나갔다올게.” “올때 나 그 때 먹은 쿠키 사다줘.” “알았어.” 나는 신발을 신고 집을 나왔다. 쿵. 옆 집 문이 열렸다. 어떤 여자와 나오는 싸가지. 나는 먼저 말했다. “어디 나가나 보네?” 시비조로. “그러는 당신은?” 그 싸가지 역시 시비조였다. (누구야? 켄지?) 켄지? 저 자식 이름이야? 일본 이름? (옆 집 여자.) (옆 집 여자로만, 끝나는거지?) 일본 말로 씨부렁거리는 남녀였다. ‘나 약올리는거야?’ “야, 싸가지. 방해해서 미안한데 좀 비켜줄래? 나가게.” 나는 어깨를 툭쳤다. “나 싸가지 아니거든?” 꼭 싸가지 없는 것 들이 싸가지 아니라고 하더라. 확실한 통계는 아니었지만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실생활 참조를 하여서 따져보면 말이다. “청푸름.” “뭐?” “내 이름은 싸가지가 아니라 청푸름이라고.” 지 이름을 말하는 싸가지, 아니 청푸름. “어, 어쩌라고.” “보통 말해주면 자기 이름도 말하지 않나?” “난 다르거든?” 그리고 나는 빌라를 나왔다. 지가 청푸름인데 어쩌라는거야? 이마에는 만화처럼 표현하자면 빠직 표시 여러개 정도였다. sweet cafe “언니, 안녕하세요.” “응, 설아도 안녕.” 저번에 왔을때 금새 친해졌다. “선지언니는요?” “아, 약속이있어서. 조금 있다가 쿠키 좀 줄래? 선지가 갔다 사다달래.”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고, 설아도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해줬다. 딸랑. 방울소리가 들리고, “누나!” 연하 목소리였다. “연하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라진 연하였다. 한 2년 전? 그래, 거의 2년 전이었다. 그 때 만해도 아직 애티도 못 벗은 꼬맹이 같았는데, 이렇게, 변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그 때야 알았다. ‘시간은 꽤 빠르구나.’ “왜 이렇게 많이 변했어, 못 알아 볼 뻔 했네.” “누나는 안 변했어, 하나도.” 연하는 의자에 앉았다. 레몬에이드와 오렌지쥬스가 테이블에 올려졌다. “아직도, 레몬에이드만 먹는거야?” “그러게, 아직 레몬에이드네.” 고등학교 2학년 때 인가? 좋아하는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가 레몬에이드를 좋아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먹게 된 레몬에이드인데, 아직 입에 대고 있다. “언젠가는 없어지겠지.” 나는 웃어보였다. “심장은.” 심장은, 이말에 잠시 나는 멈칫했다. “아직, 병원을 못 구했어.” 나는 금방 고개를 숙였다. “누나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사람은 모두 다 아픈걸?” 그래, 이 말은 맞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픈걸? “유학 아예 온거야?” “응.” 그렇구나. “미술, 계속 하고 있어?” “나는 미술 밖에 없는 걸.” “하하. 나도 한때는 그랬었는데, 미술에 모든걸 걸었었는데.” 그랬다. 나는 미래가 밝은 미술과 학생 중 한명이었다. 이미 홍익대에 붙은 상태였었으니까. 조그만한 심장에 통증 뿐이었는데, 그 때까지는 그렇게 무난하게 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악화되어서 이렇게 커다랗게 변해버릴줄은, “나으면, 나하고 같이 그리자.” “아니, 이젠 미련 없어.” 나는 웃어보였다. “근데, 학교는?” “거리에서 그림 그리면서, 학비하려고.” “힘들 것 같아.” ‘같아’가 아니라 ‘같다’일텐데. 제 5화 “여기, 설아야.” 나는 돈을 냈다. 설아는 돈을 테이블에서 밀어냈다. “됐어요. 언니.” “받아.” “안 받아도 돼요.” 웃어보이며 안 받겠다는 설아. 하지만 결국 내가 우겨 돈을 주고 왔다. 한 쪽 손에는 쿠키가 들어있는 종이 가방을, 한 쪽 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누나.” “어, 어?” “내가 그림, 그려줄게.” 나에게 그림을 그려주겠다며, 공원에 있는 벤치에 나를 앉힌다. “예쁘게 좀 웃어.” 나는 웃어보였다. 조금 상기 되어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30분이 지나고.. “다 됐다.” 나에게 그림을 주는 연하. 그림 속에는 슬프게 울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여, 연하야.” “내가 그리는 건, 겉모습이 아니라, 누나의 눈이야.” 내 눈? 연하는 내 옆에 앉았다. “내가 아직 고2, 어린애인 줄 알아?” 나는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나도 알아, 누나 나 불편한거.” “연하야.” “근데..” 연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누나 아직 못 잊어서, 아직 누나 좋아해서.” 좋아... 한다고? “누나 계속 불편 해야 되겠다.” “연하야.” “나 가봐야겠다. 안 그럼 도쿄 못 가.” 말을 뚝 짤라버리고는 가버리는 연하. 멀찌감치 서서는 인사를 한다. 나는 소심하게 인사를 했다. ‘누나 계속 불편 해야 겠다.’ 빌라 겨울이라 그런지, 8시 밖에 안됐는데도 하늘은 검은색 물감으로 덕지덕지 칠한 것 처럼 어두웠다.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고 있었다. “싸가, 아니 청푸름?” 청푸름이었다. 술을 잔뜩 먹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기에 1층은 술 냄새로 진동을 하고 있었고 말이다. “괜찮아?” “......” 아무말도 안하는 청푸름. 걱정을 해줘도 저러면 어쩌자는건데, 나는 홱 돌아섰다. “야.” 낮게 들려오는 중저음의 목소리. “뭐?” 나를 벽쪽에 밀치는 청푸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내목 바로 앞에 청푸름의 팔목이 놓여져있었다. 벽에 기대고 있던 손은 어느새 내 어깨로 내려왔다. “뭐, 뭐야.” 심장이 너무 두근거린다. 이러면 안되는데, “청푸.” “왜 닮았냐.” 누굴, 닮아. “왜 그렇게 닮았냐.” 내 어깰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파.” “왜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닮은거냐.” 보고 싶은 사람? “왜 내가 증오하는 사람을 닮은거냐.” 보고싶은데, 증오하는사람이라니, 나는 눈을 감았다. “그게, 누군데?” (엄마.) 일본어였다. “난, 일본에 와 있어도 아는건 あリがとうございます。하고 ちよなら 밖에 없어.” “......엄마.” 엄마, ‘심장이, 너무 아파.’ 내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내 눈물은 청푸름의 팔목에 떨어졌다. 벽에 기대어 있던 내 몸은, 벽에서 멀어지고, 내 목 앞에 있던 청푸름의 손은 나를 감쌌다. “니가, 왜 울어?” “너는, 왜 울어?” 다음날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 침대가 아닌 청푸름의 침대에서. 나는 꾸역꾸역 옷을 입었다. 하지만 뜻대로 옷이 잘 입어지지 않으니까 나는 침대에 앉았다. ‘초원유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 내 생각이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 쉬울 줄은 몰랐다. 근데, 왜 이 싸가지한테 내 눈물을 보인걸까? 다시금 일어서 옷을 입고 방을 나왔다. 아무도 있지 않았다. 뭔가 휑한 집이었다. ‘아무도 없는거야?’ 나는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정말 아무도 없는 것 이었다. 탁자 위, 편지가 보인다. [이곳저곳 돌아보지말고, 그냥 나가. 많이 알면 알수록 니가 힘드니까.] 이자식, 예언자야? 뭐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거야? 나는 편지를 꾸겼다. 그리고는 그 편지대로 그냥 그 집을 나와버렸다. 바로 옆에 있는 내 집을 두고, 다른사람 집에서 자다니. 띠링.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곧바로 문은 열렸다. “초원유!” “선지야, 나 약 좀 갖다줄래?” “야, 야!” 나는 픽 하고 쓰러졌다. 제 6화 눈 앞이 아른거린다. ‘..엄마.’ ‘엄마는 너 키우기 힘들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내 귀 안에 울려퍼졌다. 나하고 닮은 그 여자, 엄마. 눈이 오는 날이다. 내 쪽으로 걸어 오는 그 여자. 나는 뒤로 뒷 걸음질 쳤다. 근데, 내몸을 통과해버렸다. 스윽. 어린 남자 아이는 나를 쳐다봤다. ‘엄마.’ 그 남자아이가, 청푸름으로 변해버렸다. “하아, 하아.” 내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꿈이었구나.” 방문이 열렸다. “괜찮아?” 선지였다. “괜... 찮아.” 놀란 듯 싶다, 심장이. 그 날 저녁 선지와 나는 쇼파에 앉았다. 지금은 NHK를 시청 중이다. “병원 빨리 찾아야겠다.” 선지가 말했다. “더 이상 약 가지고 버티는거 보기 싫어서 그래.” “할 수 있는데 까지는 약으로.” “몇 년이야. 벌써 2년 이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과다복용, 안 좋잖아. 너 지금 니 몸을 버리고 있는거라고.” 그래, 과다복용이지. “알아.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내 힘으로 나를 조절하고 싶어. 어차피 수술하지 못 할꺼라면 할 수 있는데까지 버텨 볼 거야.” 난, 나에게 모든걸 걸었어. “초원유, 너.” “무모한거, 나도 알아.” 선지는 두 팔을 힘없이 내렸다. “만약에, 내가 이렇게 가 버리면 오히려 나을수도 있어.” “그런 말 하지마.” 선지는 나를 안아줬다. “이 기집애야. 너 좋으라고 이러는거야.” “마찬가지야.” 다음날 류가 아침부터 나를 괴롭힌다. “류, 왜.” 야옹. 야옹거리며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류. 내 방에 있는 베란다였다. “류, 여기는 왜 오...” 베란다 옆에는 청푸름이 서 있었다. 나는 류를 안았다. “고양이도, 기르냐?” “비꼬는 말투 하지마.” “비꼬는거 아니야. 단지 궁금한 것 뿐이지.” 궁금한 것도 많아. 야옹. 청푸름은 난간에 기대었다. “나는, 너에 대해.... 알고 싶어.” 나는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근데 너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나에 대해선 알려 줄 수 없어. 단지 이름은 청푸름이며, 나이는 22살인 남자라는 것 뿐.” “나는 모든 걸 알려 줄 수있는데, 이름은 초원유이고, 나이는 22살. 그리고 병에 걸린 여자라는거.”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생일은 12월 25일이고, 미술을 전공했었고, O형인 여자.” 청푸름은 아무런 말없이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이게 형식적인거지? 아마 그럴거야. 이런게 보통 자기소개이겠지.” 나는 류를 내려 놓았다. “형식적이지 않고 식상하지 않는 소개는, 한국에서 가장 사랑하던 아빠를 잃고 혼자 학교를 다녔었어.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병에 걸린 걸 알게되었고, 일본으로 수술을 하러 오게 된거야.” 팔짱을 끼고 나는 말을 이어갔다. “어떤 걸 원하는거야? 내 몸을 원하는거야. 아니면 내 마음을 원하는거야?” “둘 다 원한다면 줄 수는 있는거냐?” “욕심이 과한거 아니야?” 나는 웃어보였다. “단지, 내가 너희 어머니를 닮아서 알고 싶다는거야?” “아니, 니 존재를 알고 싶어.” 내 존재? “신비로워. 뭔가 달라보여. 다른 사람들하고도, 나하고도.” 베란다에 기대었다. 우리 둘 다. “구름 같아. 알 수 없는 구름.” 구름? “흐리다가, 맑다가. 그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내가 그런가?’ “알고싶어, 널.” 이게 무슨 기분일까?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야. 뭔가 물컹거리는게 머리하고 가슴에 생겨 버린 것 같아. “동거....” “....?” “같이 있고 싶어.” 얼떨떨하다. 갑자기 프로포즈 같은 느낌이다. “잠시 뿐이야. 너에 대해서 알게 되면 그땐.” “청푸름.” 나는 말을 가로막았다. “정말로. 알고 싶은거야?” 진심이었으면, 좋겠어. 니 마음이... “응.” “생각해볼게. 오늘 저녁 8시. 여기로 다시 나와.” 나는 류를 데리고 베란다를 나왔다. 동거?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나는 선지 방에 들어갔다. “선지야.” “왜.” “나, 동거할까봐.” “뭐?” 선지는 놀란 듯 싶다. “동거.” “누, 누구하고?” 누구냐고 물어보는 선지. “혹시, 연하?” “미쳤어. 애하고 무슨.” “그럼 누구?” 제 7화 “너 미쳤어?” “미쳤겠지.” 선지는 나를 팍팍 때렸다. “야, 너 몇 번이나 봤다고?” “몇 번 안 봤지, 열 손가락으로 세기도 쉬운 걸.” 나는 손을 쫙 폈다. 선지는 내 손바닥에 자기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초원유, 정신차려.” “정신없어.” 선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니 맘대로해, 니인생이잖아. 이 기집애야.” 선지는 뒤돌아섰다. 선지 눈에서 무언가 뚝 하고 흘러내렸다. “니가 왜 울어. 이 기집애야.” “눈물나는거 어떡하냐!” 나도 괜히 울게 됐다. 친구가 몇 번보지도 않은 남자하고 동거하겠다고 한다면 울 친구가 얼마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정말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몇 안돼는 친구를 내 옆에 데리고 있으니까. 나는 선지를 안았다. “바로 옆인데, 울긴 왜 울어.” “너는 왜 우냐! 바로 옆인데.” “니가 우니까!” 우리 둘은 그렇게 정처없이 울기만 했다. 그 날 저녁 나는 상가에 갔다. “에? 왜 이렇게 안 왔어요.” 예전에 류를 샀던 가게였다. “상자, 있어요?” “어떤 상자?” “짐 같은거 넣어 두는거요.” 여자는 나에게 상자를 갖다줬다. 나는 돈을 지불하고 상자를 들고서는 집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가서는 옷장을 열었다. 많지않은 옷, 상자에 꾸기적 집어넣었다. “도와줄까?” “됐어.” 나는 웃어보였다. 선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내가 선택한거니까.’ 다음날 드디어 입성. 띠링. 초인종을 눌렀다. 몇분이 지났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 나는 발로 문을 쿵 찼다. 문이열렸다. “잠깐만, 기다려.” 좁은 문틈 사이로 보이는건 저번에 본 여자였다. 나를 그사이로 차갑게 쳐다보는 여자. 기분이 이상하다. 뭔가 불안하다는 느낌이 든다. 10분이 지나고, 문이 열렸다. “뭐야?” (켄지, 난 이 여자가 맘에 안들어. 되도록이면 멀리해.) 뭐라는거야, 그 여자는 그렇게 멀리 사라졌다. 나는 청푸름에게 짐을 밀었다. “니가 들어.” “내가 왜?” “남자잖아. 그리고 왜 밖에서 기다려야 되는데?” “상관마, 사생활이야.” 사생활 침해는 하지 말자 이거지? 나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하나도 안 치웠냐?” 어제와 똑같았다. 지저분한 식탁 위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피 뭍은 붕대들. “너, 위험한 일 해?” 아니라며 고개를 흔드는 그 녀석. “이거는 뭐야?” 나는 붕대를 들어올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애써 붕대를 뺏어서는 서랍에 넣어버렸다. 나는 식탁 위에 손을 얹었다. 먼지투성이었다. “내가 치워주길 원하는거야?” “조금은.” “아픈 사람한테?” “별로 안 아픈 것 같아서.” 나는 인상을 구겼다. “뭐야!” “봐봐, 이렇게 소리 지르는거 보면 멀쩡한거야.” 이런 싸가지 없는 놈! 이런 놈하고 같이 살겠다고 나온 내가 한심하다. “그럼, 너도 도와줘.” “뭘?” “청소.” 우리는 그렇게 청소를 시작했다. “내가 빨래 할 테니까 니가 청소해.” “야, 빨래는 세탁기가 하잖아.” “청소도 청소기가 다 하잖아.” 나는 창문을 열었다. 그제서야 햇빛이 들어온다. “이렇게 살면 안 답답해?” “별로.” 무감각이다. 나는 하루라도 이렇게 살면 죽을 것 같을텐데. 옥상 “제대로 해! 꾸겨지잖아.” “이것도 제대로야.” 나는 푸름이가 널어 놓은 걸 다시 펴서 널을 수 밖에 없었다. 빨래줄은 빈틈을 찾아 볼 수 없도록 빨래가 무장해버렸다. “하, 허리 아퍼.” 자기가 한게 뭐 있다구, 그러더니, 옥상 난간에 앉는 그 놈. “야, 위험해!” “하나도 안 위험해.” 나는 푸름이 옆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야!” 나를 잡아당기는 푸름이. 심장이 덜컹거려 죽는 줄 알았다. “야! 아프잖아.” “경치 좋지?” 동문서답이었다. 제 8화 나를 난간에 앉히는 푸름이. “나 내려갈래.” “경치 좋잖아.” “빨리, 내려줘.” 내 손을 꼭 붙들고 놔주지 않는다. “청푸름.” “가끔 가다가 이렇게 내려다 보면 좋아.” “이거 놔 봐.” “정말 좋아.” “푸름아.” “지금이 좋아.” 지금이 좋다고? 나는 싫은걸? 심장이 쿵덕거려서 싫어. 높은 곳이 싫어서 쿵덕거리고, 니가 손잡고 있어서 쿵덕거리는데. 정말 좋다고? 난 싫어. 그 날 저녁 “집이 얼마나 좋아.” “그러게.” 나는 푸름이 머리를 팍 때렸다. “이제 좀 치우고 살자?” “응.” 나는 쇼파에 앉았다. “있잖아, 아까.” “뭐?” “그 여자, 누군지 알려주면 안돼?” “사생활.” “그 여자도 니 사생활이야?” 푸름이는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그냥, 그 여자가 누군지만 알려주면 돼, 다른건 묻지 않을게.” 그래, 궁금하지만 묻지 않을게. “야쿠자가 뭔지 알지?” 야쿠자? 아, 안다. 일본의 조폭 같은거라고 들었다. “알아.” “그 여자는 야쿠자의 딸이야.” 야쿠자의 딸? “여기까지야. 위험한 여자라는 것만 알려줄게.” 위험한여자.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위험한 여자랑, 왜 아는 사이일까?’ 하는 생각 밖에 들지않았다. 하지만, 물어볼수 없었다. 아까 약속했는걸, 그 여자의 존재만이라도 알게해달라고, 그러기에 물어볼 수 없다. 푸름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난 거실 한편에 놓여진 상자를 열었다. 꾸겨진 옷을 하나하나 꺼내들었다. “젠장.” 나는 옷을 갈아입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디서 자?” “맘대로.” 저게 손님에게 할말인가? 아,손님이 아니지. “야, 그럼 쇼파에서 자?” “니 맘이지. 그건.” “내가 침대에서 잘래.” “싫어.” 나는 침대에 누웠다. “됐어! 배째!” 그러고서는 팔을 벌리고는 누워있었다. “야! 팔 안 비켜?” “그러니까, 쇼파에서 자.” “싫다니까?” 결국 우리 둘은 그렇게 싸우다 지쳐 잠들었다. 한 침대 안에서. 다음날 징. 아침부터 왠 전화야. 인상을 쓰면서 힘겹게 일어났다. “여보세요.” 하품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누나 자고 있었어?] 연하였다. “어, 어.” [내가 자는거 깨웠구나. 미안.] “괜찮아.” 하품만 늘어지게 했다. 푸름이는 옆에서 뭉기적 거리면서 말을 건냈다. “누구야?” “사생활.” [어?]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웃으며 방을 나왔다. [누나, 나 아는 병원있는데, 거기로 갈래?] 병원 얘기 였구나. “아, 아니야. 병원 다니는 곳 있어.” [정말?] “어? 어.” [그랬구나, 아는 사람이 하는데.] “지금 다니는 곳이 있어서. 미안.” [괜찮아.] 웃는 연하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이불 속으로 바로 직행. “누구야?” “사생활. 너도 어제 그랬잖아.” “나는 누군지는 알려줬잖아.” 나는 피 거리며 말했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알던 동생이야.” “그래?” “그렇단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서는 자려고 했는데, “너 병원 다녀?” “아니.” “다닌다고 했잖아.” “거짓말.” 모두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내가 아는 형이 의사인데.” “그래.” “거기로 갈래?” “그래.” “그럼 조금 있다가 가자.” “어.. 그래.” 졸음이 밀려온다. 제 9화 몇시간 뒤, 잠에서 슬슬 깨어났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니 푸름이는 없었다. 거실로 나오니 옷을 입은 채로 쇼파에 누워 잠든 푸름이가 보였다. “야, 뭐해? 청승맞게.” “니가 늦게 일어났잖아.” “뭐를?” “병원 간다고 했잖아.” 병원? 언제? “지금?” “어.” “나 안 아픈데?” “한군데 정도는 가 보는게 좋아. 아는 사람이고.” 나는 인상을 구겼다. “빨리 옷이나 갈아 입어.” 병원 거대한 병원 앞에 섰다. 펄럭거리는 치마를 부여잡고는 푸름이를 쳐다봤다. “나중에 오면 안될까?” “지금이건 나중이건, 오는건 마찬가지야.” 나를 밀고 병원으로 들어왔다.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바깥 풍경이 다 보인다. “몇층이야?” “5층.” “니가 아는 사람이 무슨 전문의인데?” “니 병 전문의.” 그렇구나. 누군지 궁금하다. 띵.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진료하러 오셨나요?) (네.) (카드 있으신가요?) (아니요. 오늘이 처음입니다.) “뭐라는거야?” 나는 푸름이의 옆구리를 쿡쿡 찍었다. (이름하고 생년월일을 적어주시겠어요?) 볼펜과 종이를 내미는 간호사였다. “적어.” “뭘?” “이름하고 생년월일.” [초원유, 1986. 12. 25.] 나는 볼펜을 내려놨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푸름이는 내 손을 잡고는 쇼파에 앉았다. “앉아.” “근데, 한국하고 많이 다르다.” “뭐가?” “한국에서는 정말 복잡하거든. 주민등록번호에다가 집 전화번호까지.” 일본하고 한국은 많이다르구나. 몇분이 지나고.... (초원유환자님.) “너 부른다.” “나?” “들어가.” 나는 일어서서 푸름이 손을 잡았다. “같이 들어가.” “왜?” “그냥, 너 아는 사람이라면서.” 그렇게 푸름이와 같이 진료실에 들어갔다. (어디가...) 우리를 보며 놀라는 의사. “청푸름!” “오랜만이야.” 서로 부둥껴안고 난리가 아니다. 나를 이제야 본 의사선생님. “내가 아는 여자.” 아는, 여자? 이게 죽을려고! “니가 아는 여자가 있던가?” “글쎄?” “하긴, 루야 빼고는.” 루야? 루야가 누구지? “어디가 아파서 왔어요?” 나를 쳐다보는 의사선생님. “말 놓으세요. 저 푸름이하고 나이 같아요.” 하하하하하. 거리며 어색하게 웃는 나였다. “그럴까?” “그럼 나도 말 놓을게.” “그래, 근데 정말 어디가 아파서 왔어?” “형이 전문인 병.” 놀라는 오빠였다. “심장병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뒤로한채 검사를 시작했다. .....1시간이 지나고..... “어떻게 나왔어?” “푸름아, 잠깐 나가 있을래?” “어? 어.” 푸름이는 문을 닫고 진료실을 나갔다. 카드를 보더니 나를 쳐다봤다. “원유야.” “응.” “그래, 원유야. 예전에 많이 다친 적 있었니?” “아니, 전혀.” “그럼, 뭐 큰 충격 같은거는?” “없었는걸?” 왜이러지? “있지, 원유야. 너는 심내막상결손증이라는 병이야.” 심내막상결손증? “그게 뭔데?” “심방중격결손증이라는 병이 있는데 그 병에 특수한 형인데, 뚫어진 구멍이 크고, 판막까지 기형이 합병되어 중증이 되기 쉬운 병이야.” 내가, 그런 병에 걸렸다고? “이건 선천성 심장병 중 하나이지.” 원래, 있었던 병이었다는거야? “중증이 되면, 수술도 할 수 없어.” 중증이 되기 쉬운 병이라며,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건데. “청푸름한테는 말하지마.” “.....왜?” 떨리는 내 목소리였다. “말하지마. 청푸름 성질이라면 날 죽일려고 할테니까.” 제 10화 성질? 오빠를 죽이다니? “나, 난 무슨소리인지 잘 모르겠어. 내가 심내막상결손증? 이런거 걸린 이유도 모르겠고, 왜 푸름이한테 말하면 안되는지도 잘 모르겠어.” 오빠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원유야, 오빠 말 잘 들어. 푸름이는 성격이 다혈질이야. 그래서 니 심장에 가끔 무리가 올 수 도 있어.” “......” “그리고 또 가끔 푸름이 옷에 피가 묻을 때도 있을거야. 그래도 놀라지 말아야 돼. 니가 치료해줘야 하는 일이니까.” “......오빠.” “그리고, 그게 정 힘이 들 때 쯤 푸름이 한테 말해. 그 때 오빠도 허락할게.” 무슨 소리인지, 이제 대충 알 것 같기도 해. 그 날 저녁 “표정이 왜 그래?” “어?” “똥 밟은 사람 표정이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푸름이는 성격이 다혈질이야.’ 차갑다가, 따뜻했다가 하는 손난로 같아. 집에도착했다. “힘들어?” “조금.” “업어줘?” “됐어.” 나는 신발을 벗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푸름이는 머리를 긁적거리다 방으로 이내 들어왔다. “안 좋은일 있는거 맞지? 형이랑 무슨 얘기 했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나는 알면 안되는거라도 돼?” 어, 그래. 나는 그냥 홱 돌아섰다. “그건 사생활 아니잖아.” “만약 사생활이라면?” “초원유.” “왜.” 푸름이는 무언가 말하려다 나를 쳐다보고는 멈췄다. “나 피곤해, 먼저 잘게.” 이불을 뒤집어썼다. ‘미안해, 말해주지 못해서, 하지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나였다. 다음날. 어제 이후로 냉기가 돋는 집이었다. “나갔다 온다.” 푸름이는 검정 자켓을 입고 집을 나갔다. 혼자 텅하니 빈 집에 남았다. 나는 집을 나와 선지를 찾았다. 띠링. 하지만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선지는 나오지 않았다. 징. 치마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핸드폰. “여보세요?” [누나, 오늘 시간 있어?] ‘시간은 많지’ [그 때 그 카페에서 다시 만나, 3시에.] “여, 연하야!” 매정하게 끊겨버린 전화였다. 2시를 가르키고있는 핸드폰 전자시계. 액정에 살짝 비친 내 얼굴은 찡그린 얼굴이었다. sweet cafe. 2시 50분이다. “언니 안녕하세요!” 설아의 인사였다. “왜 안 들어오고 서 계세요?” “아, 약속이 있어서.” “쿠키라도 갖다 드릴까요?” “아니야, 괜찮아.” 나는 웃어보였다. “저번에 선지가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했어.” “뭘요?” “쿠키 여러가지 섞어서 줬던 걸?” 설아는 앞치마를 만지작거렸다. “아니에요.”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사이에 연하가 보인다. “설아야, 언니 가 볼게.” “안녕히가세요.” 나는 연하에게 뛰어갔다. “연하야.” “누나!” 뛰니까 조금 힘들긴하다. 연하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어?” “누나, 도쿄갈래?” 도쿄라고? “도쿄?” “내가 그림 그리는거 누나한테 보여주고 싶어.” “연하야, 누나.” “갈 수 있지?” “아.” 내 손목을 붙잡고 뛰는 연하였다. “누나 이러다가 기차 시간에 늦겠다.” “저기! 연하야!” 연하는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안돼는데, 도쿄에 지금가면, 너무 늦잖아! 도쿄 어쨌든 벌써 와 버린 도쿄였다. “누나, 내가 그림 그리는 공원 정말 좋다?” “공원에서 그림 그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연하였다. 공원에 도착했다. 자전거를 타고다니는 커플들과 이색적인 패션의 일본인들이 보였다. 그리고 분수 주변에 앉아 있는 거리의 화가들이 보였다. “너도 저렇게 그리는거야?” “응.” 그렇구나. “누나, 배고프지않아?” “조금 고프다.” 연하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뒤적였다. “짜잔!” “뭐야?” 연하가 내민건 쿠폰이었다. “이거 레스토랑 쿠폰이야, 저기 앉아 있는 백발 할아버지 있지?” 거리 화가들 중 한 백발 할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할아버지가 준거야.” 심장이고장나면(제 11화~제 20화) 제 11화 레스토랑 Por Una Cabeeza 노래가 울려퍼지는 레스토랑이었다. “크다.” “여기가 도쿄에서 가장 큰 레스토랑이라는데?” “정말?”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십자수로 세겨진 식탁보 위에는 투명한 유리가 놓여 있었다. (주문 하시겠습니까?) (스파게티 2개 주세요.) 연하는 주문을 했다. (알겠습니다.) 주문을 받은 웨이터는 서서히 사라졌다. “누나, 미안.” “뭐가?” “내가 직접 사 주고 싶은데, 쿠폰으로 스파게티 한 접시 사줘서.” “괜찮아. 누나 원래 스파게티 좋아 하는 걸?” 나는 웃어보였다.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화장실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섰다. “여기는 화장실도 좋네?” 손을 탁탁 털고 들어가려는데, 바로 맞은 편 남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남자가 보였다. 검정 자켓에 살짝 올린 머리를 한 남자였다. 왠지 푸름이를 보는 듯 하다. ‘나갔다 온다.’ 나는 여자 화장실 입구에 숨었다. 오늘, 푸름이 검정자켓을 입고 나갔는데... 고개를 숙인 그 남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반대편 손에 보이는 무언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검정색 권총이었다. 그리고 조금 묻어있는 핏자국. ‘...!’ 눈에 뭍은 무언가를 떼어내던 그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레스토랑에 울려퍼지는 Por Una Cabeeza.. 나는 입구에 주저 앉고 말았다. 눈물이, 눈물이 수 없이 떨어지고, 심장이 너무 아파왔다. 숨이 막힐정도로 아파왔다. 내 눈 앞에 일어나는게 제발, 제발 현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돼.’ 수없는 눈물 방울이 내 치마에 떨어졌다. 검정자켓, 세워진 머리, 생김새를 닮을 수도 있는거야. 그럴거야. 푸름이가 아닐거야 ‘그리고 또 가끔 푸름이 옷에 피가 묻을 때도 있을거야.’ 연웅오빠의 말이 떠올랐다. 가슴이 문드러지도록 부여 잡았다. ‘그래도 놀라지 말아야 돼, 니가 치료해 줘야 하는 일이니까.’ 놀라지말자. 진정해보자, 초원유. 하지만, 내 머릿 속 에는 손에 들린 권총 뿐이었다. 그리고 핏자국. 갑자기, 몇일 전 일이 생각난다. 거실에 널부러져 있었던 피묻은 붕대들이 말이다. ‘너, 위험한 일해?’ 아니라면서, 아니라고 했잖아. ‘이거는 뭐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날 수 조차 없다. 점점, 멀어지는 푸름이. ‘맞니? 너, 니가 청푸름이라는 사람 맞니?’ 기어가는 내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처량했다. 입구로 사라진 푸름이의 온기조차 느낄 수 없었다. “누나!” 힘이 풀려나는 나를 지탱하고 있던 팔을 내렸다. 차가운 바닥에 볼이 닿았다. 체크무늬의 차가운 바닥에는 내 눈물이 주저없이 흘렀다. 내 볼을 타고, 내 목을 타고서. “누나,왜그래!” 나를 안아드는 연하였다. “여, 연하야.” “누나! 정신차려!” “이건, 꿈인거니? 꿈인거지?” 연하는 나를 안았다. “꿈일거야, 꿈이어야 돼.” 연하의 하얀색 자켓은 눈물자국으로 축축해졌다. “어쩌지? 나 어떡해!” “누나, 소리지르지마. 누나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왜 하필, 오늘이었니? 왜 하필, 이 레스토랑이었니? 내가 조금만 일찍 들어갔다면, 내가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면. 다음날 ‘맞니? 너, 니가 청푸름이라는 사람 맞니?’ 악몽이었다. 속눈썹 사이로 살며시 보이는 곳은 병원이었다. “누나, 괜찮아?” 나를 보며 괜찮냐며 묻는 연하. “아니.” 정색을 하며 나는 허공만 바라봤다. 손등에 꽂아 있던 링겔 바늘을 빼들었다. “나 갈래.” 정처없이 걸었다. 내 뒤에서 계속 걸어오던 연하는, “누나!” “.....” 연하가 내 손을 잡았다. “오사카로 돌아가, 누나가 왜 이러는지는 나는 잘 모르지만, 이 곳에 있어서 그런거라면, 오사카로 돌아가.” 그렇지, 이 곳에 있어서 그런거지. “미안, 누나를 데려다주지는 못 할 것 같아.” 쓸쓸한 뒷 모습으로 걸어가는 연하를 맹한 눈으로 쳐다 볼 수 밖에 없었다. ‘미안, 연하야. 내 머릿 속에는 지금 그 애 밖에 없어.’ 나는 서둘러 기차에 올라탔다. 손톱을 물어 뜯어가면서, 기차 안에서 안절부절이었다. 오사카에 도착하고, 집으로 무작정 뛰었다. ‘제발, 아니었으면...’ Por Una Cabeeza →1992년에 개봉한 '여인의향기'라는영화의 테마곡 제 12화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피비린내가 내 코를 매혹했다. 그 냄새 덕에 내 눈에서는 그 냄새보다 더 진한 눈물이 떨어졌다. 침대에 앉아서 붕대를 감고 있던 푸름이는 나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처, 청푸름.” “.....” 차디 찬 냉기와 눈물만이 우리 사이를 오고 갔다. 나는 아무말 없이 푸름이 옆에 앉았다. 붕대를 움켜진 내 손에는 있지도 않은 힘이 들어갔다. 붕대를 감으려하자 뒤로 주춤거리는 푸름이. “치료, 해줄게.” 붕대를 감고 있는 내 손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아직도 머릿 속에는 그 검정색 총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많이 아파?” “.....” “왜, 아무말도 안하는거야?” “무슨 말을, 하길 원하는데.” “변명이라도 하길 원했지, 근데 내 귀가 듣기 조차 싫다고 하던데..” 정말로 듣기 싫었다. 차라리 청푸름이라는 이 인간 자체가 내 눈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니가 뭘 알고 있던, 난 너를 위해서 변하지는 않아.” 나는 붕대를 다 감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니가 변하기를 원치 않아, 다만 내 심장이 다치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어..” “.....” “약속해 줄래? 내 심장이 다치지 않게 해준다고.” “....약속할게, 니 심장은 지키겠다고.” 나는 손을 내밀었다. 살짝 핏기가 남아 있는 내 차가운 손을 푸름이가 잡았다. ‘지켜줘, 이 약속처럼 내 심장을..’ 그날저녁 아직도 차디 찬 공기는 남아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우리 두 사람. 금이 그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딱 반을 나누어 누웠다. “있잖아.” 내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 “니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대충은 알 것 같아.” “.....” “사생활이니까 더 이상 얘기하지 않을게.” 나도 이제 더 이상 말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나는 돌아서 누웠다. “그런데, 혹시 그 여자하고 관계되어 있는거..” “.....” “..맞구나?” “알잖아, 이젠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아니까.”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까 감싸주고 싶은거야, 니가 위험하니까 지켜주고 싶은거라고.” 무서워, 니가 무섭다고. 근데 나도 내가 왜 너를 지켜주고 싶은지 모르겠어.. “누구를 지켜 줄 수 없잖아, 넌.” 푸름이는 누워서 대답하였다. “지킬 수 없겠지, 나조차도 지키지 못하지만 그냥 널 감싸고, 지키고싶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너 자신을 지켜, 난 나 혼자도 지킬 수 있으니까.” 눈물이 글썽인다. 입술을 꽉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푸름이는 그저 돌아서 누워있었다. ‘나쁜 놈.’ 나는 방을 나왔다. 쇼파에 누워서 그저 푸름이가 있는 방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러다 잠들었나보다. ※※※※ 새벽이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벌컥 열고 거실을 보니, 쇼파에 누워 곤히 자고 있다. “바보.” 나는 방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 주었다. 큰 눈을 가리고있는 속눈썹, ‘변명이라도 하길 원했지, 근데 내 귀가 듣기 조차 싫다고 하던데..’ 넌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아니까 감싸주고 싶은거야, 니가 위험하니까 지켜주고 싶은거라고.’ 알면서, 도망가는게 정상인건데. 왜 내옆에 서있는건데. 내손은 자연스레 볼에 닿았다. 살짝 눈물을 닦아줬다. ‘어쩌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였을거야..’ ※※※※ 다음날 살며시 눈을 뜨니 거실이었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담요, 그리고 손등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푸름이었다 내 손등에 살며시 기대어 자고 있는 푸름이. 심장이, 두근거린다. 나는 얼른 손을 빼들었다. 그리고는 상자에 들어 있는 약통을 꺼냈다. 허겁지겁, 약을 먹었다. ‘위험해.’ 내 인기척을 들은건지 푸름이는 눈을 떴다. 띠링.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기다려.” 푸름이는 일어나자마자 바로 문으로 다가갔다. 나는 푸름이 뒤에 서서 누군지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문이 열었다 (켄지, 오늘 날씨가.) 그 여자였다. 그 여자는 고개를 들자마자 나를 본 것이었다. 나를 차갑게 쳐다보는 그 여자. 나는 인사를 했다. “안녕, 하세요.” (켄지, 뭐야? 이건.) 나는 푸름이를 응시했다. 그저 아무 말없이 무 표정인 푸름이. (나, 나 가지고 지금 장난치는거지? 그치?) (장난, 아니야.) 푸름이는 내 손을 꽉 잡았다. 울음과 원망 섞인 목소리의 여자. (뭐야, 켄지 왜 그래? 나 좋다면서!) (난, 그런 적 없어.) 푸름이를 마구 때리는 그 여자. 나는 그 여자를 말렸다. 짝. 하얀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루야!) (나 좋다고 했잖아!) 나는 볼을 붙잡았다. 눈물이 나올려고 한다. (이 여자 건들지마.) 제 13화 차가운 목소리의 푸름이었다. (이 여자가 뭔데? 당신 목숨보다 소중한거야?) (내 목숨보다, 소중해 질 것 같아.) 나는 푸름이를 잡아당겼다. “나는 무슨 얘기인지 모르지만, 그만해.”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안에 들어가 있으라며 나를 밀어내는 푸름이. (저 여자! 어떻게 해서든, 당신한테서 떼어내버릴꺼야.) 눈물을 머금고 뒷걸음질 치는 그 여자. 문이 닫히고, 난 바닥에 주저 앉아 버렸다. “괜찮아?” “야, 약 좀 갖다 줄래?” 푸름이는 약과 물을 재빠르게 가져왔다. “나도 알고 싶어, 그 여자하고 니가 무슨 대화를 했는지.” 내 귀를 손으로 막는 푸름이. 아무 영문없이 나는 푸름이를 바라보았다. 손바닥으로 막아진 귀사이로 조그만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목숨보다, 소중해 질 것 같아.” 다음날 병원에 가는 날이다. “혼자 갈 수 있어?”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뭘..” 푸름이는 내 손을 꽉 잡았다. “조심히 다녀와야 돼?” “알았어, 빨리 가.” 푸름이는 가버렸고, 나는 집에 혼자 남아 병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선지하고 같이 갈까?’ 재빠르게 옷을 입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선지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띠링. [누구세요?] “선지야!” [무슨일이야?] 목소리를 보아하니 표정도 일그러있겠군. “친구가 왔는데 무슨일인데가 뭐냐?” [잠자던거 깨우니까 그러지] “병원, 같이 가려구.” [병원? 병원 구했어?] “응, 어쩌다가. 같이 갈꺼지?” [언제 갈껀데?] “지금 가려고.” [알았다, 같이 가줄게.] 선지는 나에게 기다리라며 말했다. 10분 뒤 선지가 나왔다. 문을 걸어잠그는 선지. “요즘 소식 없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는 선지. “저번에 놀려고 집 가보니까 아무도 없던데?” “나는 뭐 맨날 집에만 있겠냐? 친구들도 만나고 해야지.” “친구, 생겼어?” “어, 한국어 학교..” 한국어학교? 이런것도 있었구나. “나도 다녀야겠다, 집에만 있으려면 심심하잖아.” “그래, 학교가서 친구들도 만나면 좋지.” 선지와 나는 팔짱을 끼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나는 카드를 내밀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깐만 기다리래.” 선지가 옆에서 통역해줬다. 우리는 쇼파에 앉았다. “너는 지금까지 일본어 안 배우고 뭐했냐.” “통역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뭐.” “배워둬, 그러면 편하잖아.” “음, 알았어.” 나는 웃어보였다. (초원유 환자님.) “너 부른다, 가 봐.” “얼른 갔다 올게.” 나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연웅 오빠가 보인다. “안녕.” 나는 웃으며 인사했다. “오늘 혼자 온거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친구하고.” 오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땠어? 3일 동안..” “약 먹으니까, 견딜만 했어.” “아프지는 않았어?” “순간 충격, 이런 것 때문에 조금..” “무슨 일, 있었구나?” 오빠는 족집게와 같았다. “푸름이가 어떤애인 줄 알았어.” “그리고.”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오빠는 표정이 굳어졌다. “오빠? 어디 안 좋아?” “호, 혹시 루야가 누구인지 알아?” 루야, 알 것 같아. “일본 여자?” 오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조심해야 할 것 같아.”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 나도. 야쿠자의 딸, 맞지?” “맞아. 하지만 그 것 때문이 아니야, 루야는 자신이 원하는거라면 죽여서라도 가져야만 하는 그런 아이야, 아직 19살이지만, 그 아이 아빠보단 루야가 더 영향력이 커.” 19살이라고? “19살 밖에 안됐어?” “어, 푸름이하고 3살 차이.” “푸름이하고, 루야라는 아이하고, 무슨 관계인지 알아?” 오빠는 당황한 것 같다. “지, 진료하자. 딴 길로 세어 버렸네.” 허겁지겁 진료 카드를 보는 오빠. “오빠.” 나는 오빠를 불렀다. 입에다가 검지 손가락을 올리고 나는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오빠는 머리를 긁적였고, 나는 살며시 웃어보였다. 제 14화 “푸름이하고 루야는 엄마는 다르지만, 남매라고 할 수 있지.” 이복.. 남매?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런데, 오빠는..” “아, 나는 아는 사람이 루야 아버지 밑에서 일해서 알게되었어.” 그렇구나. “푸름이 어머니는.. 살아계셔?” “아마, 살아 계실거야.” 살아 계신대, 니가 보고 싶어 하던 분이 살아 계신대. “널 닮으셨어, 예전에 사진을 본 적 있어.” ‘엄마.’ “미혼모인 푸름이 어머니는 협박을 받고 푸름이를 보내신거래.” “하지만, 푸름이는 그렇지...” “당연한거잖아, 누가 나 살겠다고 너 버려. 이러고 버리겠어.” 하긴... 사람이 모두 그렇지. 잠시의 침묵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나에게 울며 기대던 모습을. “주소를 알 수 없을까?” “뭐?” “만나고 싶어, 푸름이에겐 말하지 않을게.” 오빠의 손을 부여잡고는 놓지 않았다. 교토 슈우켄을 타고 온 교토. 이 곳에 있다, 푸름이를 낳아준 나를 닮은 사람이. 어두운 골목을 따라 도착했다. 사람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골목이었다. 가게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는 골목은 끝을 가르키고 있었다. (살려줘요!)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골목 맞은 편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남자가 가게에서 걸어나오고,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들고는 볼을 스치는 남자의 손. 적어도 50대는 되어 보이는 여자는 시퍼런 멍이 든 다리와 팔을 하고 있었다. 겨울인데도, 헐렁거리는 천으로 만든 치마와 너덜거리는 가디건을 입고 있는 여자. 나는 뛰어갔다. “그만해요!” 여자의 앞을 가로 막았다. 내가 있어서 인지, 아무일도 없었던 냥 걸어가는 남자였다. 심장이 떨린다. 주먹을 꽉 쥐고 여자를 쳐다보았다. “한국.. 인.” “괜찮으세요?” 나는 여자를 일으켰다. 풀린 눈으로 나를 보며 인사하는 여자. “고맙... 습니다.” 살짝은 서툴러 보이는 한국말. 가게로 들어가는 도 중. 가게옆에 살짝 붙은 주소를 보았다. 종이에 써있는 주소와 일치했다. ‘푸름이의 엄마.’ 낡은 테이블과 의자로 가득한 가게는 이미 문을 닫은지 오래인 것 같았다. “도와주셨는데 보답할게 딱히 있지 않네요.” “아니에요.” “근데, 이 골목에는 무슨일로. 여긴 볼 것도 없는 낡은 골목인데..” 나에게 물어보는 여자. “사람을, 찾고 있어요. 청푸름이라는 남자의 엄마를..” 청푸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순간 굳어버리는 여자.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절부절해 하고 있었다. “맞죠? 당신이..”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난 가진게 없...” “그런거 아니에요. 단지 푸름이가 그리워 하니까 찾아주고 싶었어요.”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군 여자. “푸름이가 그리워해요, 오해하고 있고..” “만날 수 없어요. 내가 그 아일 어떻게 다시 만나요. 나 살겠다고 버린 자식 내가 어떻게 다시봐요..”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잖아요. 17년동안 잃어버렸던 자식 찾을 수 있는거잖아요.” “17년 아픔으로 살아왔어요. 이런 나약한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 “그 쪽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우리 아이 잘 지켜주세요. 두 번 상처 받는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가슴 아픈 일이거든요.” 오사카 풀어진 눈으로 집을 향해 걸어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난 쓰러졌다. ‘이런 나약한 모습 보여 주고 싶지 않아요.’ 어쩌면 나였어도 그랬을거야. 문 앞에 누워 그렇게 생각하다가 잠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쿵쿵. 거리는 문소리였다. 문을 열었더니 내 앞에는 푸름이가 서있었다. 풀린 눈으로 푸름이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없어졌을까 봐, 달려왔어.” 제 15화 “내가 너 두고 어디가겠어.” 나는 푸름이를 안았다. 푸름이의 숨소리가 내 귀에 전해지고, “어디, 갔다 온거야?” 하긴, 집에서 이렇게 입고있는거는 불편하지. “누구 좀 만나고 오느라고.” 그게 누군지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가 없어. 내 머리를 부비적 거리고는 들어가는 푸름이. “누군지는 안 물어봐?” 나를 보며 그저 웃었다. “니가 누굴 만나는 것까지 상관하는건 침해잖아.” “그.. 렇구나.” 물어보길 바랬는데, 물어봐주길, 누굴 만났냐고. 침대에 앉아 푸름이를 바라봤다. “너희 엄마 기억나?” 나의 갑작스런 질문에 푸름이의 얼굴은 구겨졌다. “그 여자 얘기가 왜 나와?” “그냥, 듣고 싶어.” “그런 얘기 난 하고 싶지 않아.” 방을 나가는 푸름이를 난 붙잡았다. “왜 피하는거야? 널 낳아주신 분이잖아.” “무슨말이건 그 여자에 관한거라면 듣기 조차 싫어.” “왜 그렇게 못 됐니? 지금은 떨어져 있어도 널 걱정하고 있는 분인데.” 차가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니가, 어떻게 알아? 니가 뭔데!” “너희 엄마! 살아계시니까...” “뭐?”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응시하는 푸름이. 말해버렸다. “살아계시니까, 너를 그리워하고 계시니까..” “초원유, 너 뭐야?” “니가 나보고 가끔 가다 그리워하는거 난 싫거든, 차라리 만나..” “니가 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널 왜 몰라! 내가 사랑하는데! 바보같이 왜 몰라! 나는너 사랑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못되서 내 맘 모르는건데!” 심장이 아파오지만, 말하고 싶었다. 내 마음 속에서의 무언가를. “내가 뭘! 어쨌다고, 하늘은 왜 나만 아프게 하는거냐고! 도대체.” 나를 끌어당겨 안은 푸름이.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나쁜 놈아, 왜 모르니.” “미안.” 푸름이가 꽉 안은 내 몸은 거의 뼈만 앙상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미안해, 미안.” 그 날 저녁 침대에 누워 있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 푸름이. “누워.” “괜찮아.” “앉아서 그러고 있는거, 청승 맞은 거 알지?” “알아.” “그러고 있는거.” “무슨말을 하든 알아.” 그저 내 손만 만지작 거리는 푸름이었다. “엄마.” 엄마에 대하여 드디어 말을 여는 푸름이. “어땠어? 잘 살고 있기는 해?” 걱정되었나봐. “어쩌면, 안 좋은 상황이지..” 내 손을 꽉 잡는 푸름이. “너덜거리는 옷으로 몸 만가리고 있지. 전혀 보호하고 있지 않았어..” 푸름이는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나에게 보이기 싫었을지도, 눈물을 말이다. 다음날 모자를 푹 눌러쓴 푸름이와 나. 교토를 향하는 슈우켄 안에서의 푸름이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면.” “기억 하실거야, 엄마이니까.” 입가만 살짝 웃어보이는 푸름이었다. 교토 저번과 같은 골목길을 지나면서 오싹한 기분이 감돌았다. 푸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골목길, 가게 앞 맞은 편에 섰다. “용기 낼 수 있지?” “내, 볼게.” 웃으며 푸름이 손을 놓았다. 쾅. 가게에서는 무언가 굉장한 소음이 들렸다. 내 눈을 의심 할 수 없었다. 피를 쏟은 채 쓰러진 푸름이의 엄마. 눈물도, 소리가 있다는걸 이제야 알았다. 소리 없이 아무도 모르게 흘렀다. 나는 달려가 푸름이의 엄마를 안았다. “정신 차리세요!” 하지만 눈을 뜨지 않는 푸름이의 엄마. 푸름이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돌아섰다. ‘17년이라면서, 이런거 정말 싫다고!’ 피가 나오는 부분을 잡았다. “푸, 름아.” 마지막까지 자기 자식 생각이었나봐. 부모야, 이런게 부모라고, 넌 알아? 청푸름? “뒤돌아서 울지마! 그냥 슬프면 슬프다고 얘기하라고!” 어깨까지 으쓱이면서 우는거 못 보겠단 말이야. 병원 “제발.” 의사의 손길이 빠르게 움직이지만, 이미 출혈이 심한 상태이다. 푸름이의 등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묻어있었다. ‘보고 가야만 해, 안 그럼 내가 힘들 것 같아.’ 의사의 손은 멈췄다. 삐. 소리와 함께, 하얀 천은 푸름이 엄마의 얼굴을 가렸다. ‘안, 안돼.’ 눈물이 나온다. ※회상※ ‘아빠,정신차려!’ 아련한 내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병원에 있던 사람들은 나를 말리느라 고생이었다. ‘놔!아빠!’ 아빠와 그림이 전부였던 내 인생은 반쪽이 되어 버렸다. 미친 듯이 소리치며 의사들의 멱살을 잡은 난, 오히려 심장이 아파왔다. 그때서야 알게 됐지. 내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16부 사람이 죽는다는 건 한 순간. 그래, 한 순간이야. 근데 오히려 죽는 사람보다 바라보는 사람이 힘들거야. 나처럼 말이야. (운명하셨습니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느낌이었다.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바닥을 향한 손등에는 눈물이 한방울씩 떨어졌다. “안돼.” 머리를 넘기고 푸름이를 바라봤다. 담배를 피며 연기와 함께 점점 멀어져 가는 푸름이. ‘나쁜 놈, 무지 나쁜 놈.’ 이틀 후 벌써 이틀이 지났다. 텅빈 가게 안에서 오쯔야를 나 혼자 쓸쓸히 했다. 정말로, 나쁜 놈이구나. ※※※※ 죽다니, 죽었다니. 모자에 눌려진 머리를 헝클인 채로 걸었다. 교토가 이렇게 커다란 줄 몰랐다. 쓰러질 때 까지, 지쳐서 눈물이 멈출 때 까지, 걸었다. “왜, 왜!” 사람이 왜 그래? 한번 아프게 했으면, 다신 아프게 하면 안되잖아. 근데,근데! 왜, 어째서 나에게만 이렇게 하는건데. 잊고 살게 그냥 내버려두지. 기억하게 해놓고, 17년만에 만나게 해놓고, 왜 한마디 말만 하고 가는데! 내 이름 청푸름, 누가 몰라? 왜 이름만 부르고 그렇게 가버리냐고! ※※※※ “선지야, 문 좀 열어 줄래?” 문이 열렸다. “원유야!” 온 몸에 힘이 풀려 그만 쓰러져버렸다. 한참 후, 눈물에 젖은 눈을 뜨니 방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났더니, 류가 보인다. “오랜만이야, 류.” 야옹. 이 녀석은 내 맘을 아는지, 왠지 슬픈 울음 소리를 내보였다. “초원유.” 뒤를 돌았다. “너 어쩜 그래, 사람 걱정만 시키고.” “나 원래 이랬잖아.” 웃어보였다. “무슨 일이야? 싸우기라도 한거야?” 고개를 흔들었다. “둘 다, 지금 서로에게 힘들어.” “무슨 소리야?” “동거 뿐 인가봐, 우린 서로에게 마음 줄 수 없는 동거에 불과한가봐.” 류를 쓰다듬는 내 손길이 떨려왔다. “좋아하잖아, 넌.” 좋아하는게 아니라, 사랑 하는거야. “나만 바라 보는거잖아.” “너 이기적인거 알아?” 선지가 나를 쳐다본다. “일어나!” 나를 잡아당기는 선지. “너 정말 못된 년이다, 그거 알아?” “오선지. 너 갑자기 왜 그래?” “너만 바라본다고, 힘들다고? 그건 너만 하는게 아니잖아.” 류는 놀랐는지, 내 품에서 벗어났다. “어쩜 그러니? 넌 이제 고작 몇 개월, 아니 몇일이야. 근데, 연하는? 연하는 벌써, 3년이야. 알고 있긴 했어?” 난 아무말도 하지못했다. 그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기다려, 기다려야지. 무작정 갖고 싶다고 갖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어.” 선지 말이 맞아. 난 지금껏 내 생각만 해왔어. 다음날 어두운 빛 아래서 난 일어났다. 밖은, 비가 적시고 있었다. “비가와.”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건 푸름이었다. 우산을 재빨리 들고 빌라 앞으로 뛰어나갔다. 가로등 옆 벤치에 앉아 비를 맞고 있는 푸름이. “청푸름!” 신발은 비에 젖어 축축 했다. 우산을 푸름이 쪽으로 댔다. “왜 이러고 있어.” “엄마.” “..엄마 여기 있어.” 푸름이를 안았다. 차디 찬 몸으로 앉아 있는 푸름이를 안았다.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는 푸름이. “엄마가,지켜줄게” “미안해, 미안해 엄마.” 이제야, 푸름이의 진심을 알 것 같다. “미안해하지마,그런말너에겐어울리지않아” “심장 소리가 들려.” 나에게 기대어 푸름이는 말했다. “심장 소리가 너무 작은데, 귀 안으로 다 들려와.” “어떻게, 들려오는데?” “아주 슬프게,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프게.” “심장이, 고장나서 그러는거야.” “심장이 고장나면 이렇게 되는거야?” “그러는거야.” 그래, 심장이 고장나면. 이렇게 눈물 날 정도로 슬프게, 들리는거야. “심장이 슬퍼서 우는거야.” “심장도 울 줄 알아?”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면, 울고 있지.” “사랑하는 사람.” “그래, 사랑하는 사람.” 그러니까, 제발 아파하지마, 청푸름. 제 17화 차가운 검정머리로 가리고 있는 푸름이의 따뜻한 이마. 난 그위에 적신 수건을 올렸다. 콜록. 내 기침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열심히. “이렇게 아파하면,” “하.” “이젠 너 하나만 바라 볼 것 같은 나는 어쩌라고.” 모든걸 걸 수 있을 것 같아. 니가 곁에 있다면, 모든 걸 버릴 수 있을거야. 수건이 이마의 온기를 받아 따뜻해졌다. “내 손길이 니 볼에 수십 번 닿았으면 좋겠어. 그 만큼 니 곁에 오래 있고 싶어.” 들리니? 내 목소리가 니 마음 속에서 들리니? 그 날 저녁 푸름이의 팔을 내 머리 밑에 넣었다. 조금은 하얀 것 같으면서도 황색갈이 감도는 푸름이 팔. 내귓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은 푸름이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살짝 움찔거리는 손을 본 난 내 손으로 푸름이의 손을 잡았다. “내 울음이 니 울음이고, 니 울음이 내 울음이야.” 짝사랑 같은거라도, 나 사랑해 준 사람 만큼이라도 해보고 싶어. 그 아이만 너무 힘들게 한 것 같아서. 그 순간. 푸름이의 반대편 손이 나를 감쌌다. “..왜 울어.” 차가운 음성이 내 귓가에 맴돈다. “니 울음이 내 울음이라면서, 니가 울면 나도 울어야 하잖아.” “울기 싫어?” “울기 싫어.” “왜?”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면 심장이 아프잖아, 넌 그게 아니더라고 심장이 고장 나 버려서 아프잖아.” “괜찮아, 난 괜찮은걸.” “심장이 더 고장나면, 니가 떠나잖아.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아.” 손을 맞 잡고 있는 우리 둘의 손에 힘이 들어 갔다. “안녕 같은 말, 금방 하지 않을거야?” “안녕 같은 말, 금방 하지 않을거야.” “죽어도 내 옆에 있을거야?” “죽어도 니 옆에 있을거야.” 푸름이는 이제는 식어버린 이마를 내 어깨에 기대었다. 하지만, 차가운 냉기는 여전히 우리 두 사람의 경계선에 서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는 길목처럼. 빨간 털실로 지나가버린 털뭉치처럼, 우리 사이는 알 듯 모르겠다. “우린, 어떤 사이야?” “아이러니.” 아이러니라는 말이 딱딱한 심장 가운데에 떡 하니 자리 잡았다. ‘아이러니 한 사이야. 우린.’ “근데, 그 생각이 흔들려.” 흔들리다니? “우린 아이러니에서 끝나야 하는데, 점점 빠져 들어가서 심장에 박혀버려서, 헤어나오질 못하게 해.” “푸름아.” “왜 내 앞이었냐. 니가 와서 어쩌면 인간 쓰레기 보다 못한 놈인 나를 다시 깨우는데.” “아직 넌 짐승보다 못한 놈이야. 니 감정도 제대로 모르고 있잖아.” “이젠 우리 둘 다 미친거야.” “미쳐도 상관 없어. 심장이 시킨거니까.” 입술선을 타고 내려가는 눈물을 뒤에서 푸름이가 닦아주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뭐가 그렇게 미안해? “이젠 미워해야 할 일이 많을거야. 장담 못할 정도로, 미리 미안하단 말하는거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넌 또 뭐가 그렇게 사랑해? “이젠 사랑해야 할 일이 많을거야. 장담 못 할 정도로. 미리 사랑한단 말하는거야.” 다음날 푸름이는 어김없이 검정 양복으로 집을 나선다. 안녕이란 말, 하지 않기 위해서 그냥 손만 흔드는 나였다. A.M 10:24분. 푸름이가 나간지 2시간이 지났다. 징. 거리는 핸드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누나, 나야.] “오, 오랜만이네.” 레스토랑 다음에 처음으로 만나는 것 같아. [오늘 만날 수 있어?] “만날 수 있지.” [그럼 지금 카페에서 만나.] “알았어.” 전화를 끊고, 따뜻해 보이는 가디건을 하나 걸치고 목도리를 둘렀다. 그리고 바로 카페로 향했다. 그 시간, AM 10:31분 이었다. 카페에 도착해서, 연하가 올 때 동안 설아와 얘기를 했다. 요즘 선지는 통 안 보인다고 한다. 한국어 학교 잘 나가나봐. “언니,저기 왔어.” 연하가 보인다. “설아야, 갈게.” 웃으며 카페를 나왔다. “연하야.” “누나.” “오늘 왜 만나자고 했어?” “누나 집, 구경하고 싶어졌어.” “집? 어떤 집?” “어떤 집이라니, 누나가 사는 집.” 푸름이는, 어쩌지? 허락 같은거 받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연하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으로 향했다. A.M 11:02분 빌라앞에 도착했다. “여기살아?” “어.” 연하와 나는 동시에 한 걸음 내딛었다. 그 순간. 뒤에 검정 승용차 한 대가 섰다. 차에서 내리는, 그 여자 아니 루야. 그 뒤로 푸름이가 그여자의 손을 붙잡고 내린다. (루야! 갑자기 왜 그래!) (나도 그 여자처럼 켄지와 같이 살거야!) “푸, 푸름아.” 나를 쳐다보는 루야와 푸름이. 그리고 연하. (루야?) 연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유코오빠?) 루야는 연하에게 손가락을 가르켰다. 제 18화 유코오빠? (오빠가 여기 왠일이야?) (유학왔어.) (진작 말하지, 그럼 같이 다녔을텐데.) 무슨 소리야?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어. 푸름이와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둘을 지켜보았다. “연하야.” 나는 연하를 불렀고, 그제서야 내 쪽을 바라보는 연하였다. “아, 이 애는 사촌 동생이야.” 루야가, 연하의 사촌동생이라고? 그,그럼. 연하는 푸름이의 사촌동생이네? 내말이 맞지? (근데 오빠, 저 여자.. 알아?) (알지, 당연히.) 나를 스윽 쳐다보는 루야. 나는 눈을 피했다. 별로 바라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라서. 푸름이는 나를 잡았다. “왜?” 조그만한 목소리로 푸름이만 들리도록 말했다. “우리 맞바람하다가 만난거 같지?” “맞바람?” 하긴,바람같긴 하다. 푸름이는 다른 여자 손잡고 차에서 내리고, 나는 다른남자하고 같이 집에 들어가려고 하고있으니까. (어떻게 알아?)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좋아 했던 누나인걸?) 베시시 웃으면서 말하는 연하를, 푸름이와 루야가 살짝 노려봤다.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두리번 거리기만 했다. (근데, 여긴 왜 온 거야?)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 루야. (누나 집 구경 하려고.) (아, 집 구경?) (어.) (근데, 어쩌지? 저 여자 켄지하고 같이 사는데.) (루야!) 푸름이는 루야를 불렀다. (내 이름 그렇게 부르지마, 할 말은 해야지.) (무슨 소리야?) (몰랐어? 저 여자, 동거 한다고.) 굳어버린 연하의 표정. 나는 연하의 손을 잡았다. “연하야.” (집이 어딨어? 켄지한테 빌붙어 사는 더러운 바퀴 벌레 같은 여자한테 집구경?) 짝. 볼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루야의 볼과 푸름이의 오른손이 마찰되어 들린 소리였다. “청푸름!” (함부로 짓껄이지마.) (켄지! 이젠 미친거야? 감히 나, 날 건드려?) (미쳤다, 그리고 너하고 난 아무런 관련 없는 그런 존재야. 남 사생활까지 간섭하려 하지마. 그것보다 처량 해보이는 짓은 없으니까.) (괜찮아, 처량해 보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당신한테 이젠 저 여자의 존재가 커져 버렸나 보지?) (이젠, 내 소유물이야.) “청푸름!” 나는 푸름이를 팍 때렸다. 자기 품으로 잡아당겨 내 머리에 손을 얹는 푸름이. (건드리면, 죽는다.) 루야는 나를 째려봤고, 아직도 연하는 그저 굳은 표정이었다. (오빠, 더 들을게 뭐 있어?) 연하의 손을 붙잡고 가려는 루야. 나는 푸름이의 손을 뿌리치고 연하의 손을 잡았다. “우연하.” 잠시 멈춰진 시계는 2초 후 다시 째깍거렸다. “놔.” 차가운 음성의 푸름이. 연하는 내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루야와 유유히 차를 타고 사라졌다. 젠장, 이게뭐람. “뭐가 불만이어서 표정이 그런데?” “이 모든 순간이 불만이야.” “내가 있다는 그 자체도 불만이냐?”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저 녀석이 좋으면 더 잡아 보지 그랬어, 그럼 내가 그딴 말 안했고! 저 자식도! 너 안 놔줬을텐데.” 짝. “말 함부로 하지마!” “아이러니, 이래서 우린 그것 밖에 되지 못 하나봐.” “그거하고 이건 상관 없는 말이야.” 내 빈약한 어깰 부여 잡는 푸름이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니 눈물이 내 눈물이고, 내 눈물이 니 눈물이야.” “......” “엄마가 지켜줄게.” “......”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내가 했던 말 그대로 다시 말하는 푸름이. “니가 했던 말 지키지 못 할 거였으면, 말하지마. 괜히 사람 기대하게 만들지 말고! 갈거면 어서 가 버리라고.” “..내가 가 버릴거라고 생각하니?” “언젠간, 내 곁을 떠날거니까.” 한걸음, 한걸음. 푸름이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못 알아봐서.” 한걸음 사이로 떨어진 우리 둘. 푸름이는 내 머리를 손으로 감싼 채 키스했다. 눈물이 하늘 아래에서 떨어졌다. ‘미안, 거짓말 같은거 다신 하지 않을게.’ ※※※※ 굳어있는 오빠의 표정. (왜 그렇게 굳어 있는거야?) (몰라서 묻는거 아니잖아.) (내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그 여잔 말하지 않았을거야.) (그여자, 그여자, 이게 이름이냐?) (별로 그 여자 이름 말하고 싶지 않아,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누난, 여기 놀러온거 아니야, 수술하러 온 거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수술이라니. (무슨 수술?)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오빠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말해준다면, 내가 오빠를 도와줄게.) (뭐?) (그 여자를 갖고 싶잖아, 난 켄지를 갖고 싶거든.) (루야.) (어때, 좋은거 아니야? 우리 같은 짝사랑들도 원래 사랑 찾아서 좋고, 둘은 서로 아프지 않고 깔끔하게 헤어져서 좋고.) 난 유코 오빠를 스윽 쳐다봤다. 제 19화 다음날 난 가방을 챙겨들었다. 병원을 향해서 걸어가는 동안, 하얀 눈이 내 앞을 가렸다. 벌써 수북히 쌓인 눈을 밟는 기분은 묘했다. 병원에 도착했다. 카드를 쭉 내밀었더니, 바로 진료가 된다는 듯이 나를 진료실로 데려갔다. “3일에 한 번씩 오라니까, 5일이네?” “조금 바빠서.” 웃으면서 진료를 시작했다. 30분 뒤. “많이좋아졌어?” “어, 어?” “아닌가?” 오빠 얼굴은 많이 심각해 보였다. “너 힘들구나.” “응?” “구멍이, 더 커졌어.” 심장에 뚤린 구멍이 더 커졌단다. “얼마나,” “저번하고 비교해 보면.” X-ray를 비교해보니 정말로 구멍이 커졌다. “대처 할 방법은 없는거야?” “없어.” “그럼, 난 병원 왜 다니는거야?” “최소한의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한.” “난 살고 싶어! 죽기 싫다고!” 성질을 내는 나였다. 오빠는 내 어깨를 잡았다. “이젠 소리 지르지마, 니 심장 이젠 어떻게 될지 나도 몰라.” “나보고, 그저 인형이 되라는거네?” “되도록이면, 소리 같은거는 지르지마.” “그런거, 하지 않으면 얼마나 더 살 수 있는데?” 오빠는 굳은 표정을 애써 숨켰다. “이제 막 시작 했는데, 이제야 알았는데..”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오빠 뒤 창문 틈 사이로 보이는 눈처럼. “사랑 같은 것도, 널 위해서라면 하지마.” 사랑같은것도, 난 하면 안되는거야? 왜,왜! 나만 사랑도 하면 안되는거야? 왜! sweet cafe “언니, 그만 울어요.” “어떡해, 어떡해.” 설아 품에 안겨서 사정없이 눈물을 뽑아냈다. “난 사랑도 하면 안된대. 이제야 사랑 찾았는데, 내가 살려면 사랑하면 안된대.” “언니, 울면 더 아프잖아요.” 내 어깰 토닥여 주는 설아. “그 애가 불쌍해. 그 애가 너무 불쌍해서 눈물 밖에 안 나와.” “그 사람도 언니가 울면 슬프잖아요.” 그래, 내가 울면 그 아이도 울어. ※※※※ (살려줘!) (죽어.) 차가운 음성이 울리는 피비린내 나는 사무실. 그 안에는 내가 서있다. 총을 겨누고 발사하면 끝인데. 그 순간 눈물이 떨어졌다. ‘뭐지?’ 한쪽 손으로 눈물을 스윽 닦았다. ‘내 울음이 니 울음이고, 니 울음이 내 울음이야.’ 니가 울고있는거냐? 초원유? ※※※※ 문 앞에 서서 울었다. “푸름아, 푸름아.” 그 녀석 이름만 외쳐 대면서 말이다. 퉁퉁 불은 눈을 손으로 문질렀다. ‘울지 말아야지, 울지 말아야 돼.’ 그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싸한 분위기의 집. 나는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손 끝으로 스며드는 차가운 물. 옷을 벗지도 않은 채 말이다. 쿵. “초원유!” 푸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청푸름.’ 문 앞에 선 푸름이. “너 미쳤어!” 나에게 걸어와 물을 잠그는 푸름이. “그러지마.” “심장 이러면 아프잖아!” “괜찮아, 씻고 싶어서 그러는거야.” 내 손을 잡는 푸름이. “차가워, 그만해.” “그냥 딱딱하게 굳어 버렸으면 좋겠어. 오히려 차갑게 변했으면 좋겠어.” 푸름이는 나를 밀쳐내고는 자기가 물을 맞았다. “뭐하는거야!” 아무말 하지 않고 그저 몸을 적시는 푸름이. “하지마.” 나는 푸름이 손을 잡았다. “다신,이러지마” “......” “약속해, 다신 이러지마.” “..알았어.” 차가운 몸을 이끌고 물을 뚝뚝 흘리며 거실로 나왔다. 푸름이는 나를 안아줬다. “이렇게 차갑게 있으면 감기 걸려.” “너는.” “난 괜찮아.” “그런게 어디 있어.” 내가 팔을 풀려고 하자, 꽉 잡아버리는 푸름이. “그냥 이러고 있어, 5분만.” 째깍째깍. 시계는 왜이리 늦게 가는걸까? 얼른 푸름이가 옷을 갈아 입어야 할텐데. 안그럼 추워서 감기라도 걸릴텐데. 5분이 꼭 5년 같았다. 제 20화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몸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많이 아파?” “하, 아니.” 하얗게 질린 얼굴에 강조되는 푸른 입술, “입술이 파래.” “원, 원래 청색증이라서.” 내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는 푸름이. “봐! 열 많이 나잖아!” 뛰어가 수건에 물을 뭍혀 내머리에 얹혔다. “나만 아픈거 아니라, 너도 아프잖아.” “한 두 번 이러는거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그래도.” “쉿.” 푸름이는 검지손가락을 입에 갔다 댔다. “계속 그렇게 투정부리면 혼난다.” “......” 순한 어린양처럼 대답했다. 다음날 기지개를 피며 일어서니, 이마에 있던 수건이 뚝 떨어졌다. 한숨 소리가 퍼지고, 아무도 없었다. ‘벌써 간 거야?’ 눈을 비비며 나오니, 식탁에는 죽이 끊여져 있었다. ‘죽?’ 식탁 의자에 앉아 죽을 한 숟갈 먹었다. 조금 맹하기는 하지만, 먹을 만 했다. 숟가락에 묻은 밥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은 것 같다. 텅빈 유리 냄비를 들었다. “어?” 밑부분에 붙은 종이조각. 탁. 식탁위에 냄비를 내려놓고, 조금 젖은 종이를 폈다. [못 끊여서 미안한데, 그래도 꼭 먹어둬. 나는 너처럼 삐쩍 마른 사람 싫어. 먹기 싫다고 안먹지마.] 삐툴어진 글씨체로 어법상 거의 맞지 않는 그런 말을 쓴 푸름이. 웃음만 나온다. 냄비를 싱크대에 올려 놓고 쪽지를 구기적 주머니에 넣었다. 왠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노래를 흥얼 거리며 나는 쇼파에 앉았다. ‘무슨 일 일까?’ 곰곰이 생각하는 나였다. 그날저녁 10시가 넘어서야 들어온 푸름이.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일이 있어서.” 눈만 꿈뻑거리며 거실로 걸어가는 푸름이를 바라보았다. “어디 안 좋은거 아니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어보인다. ‘괜스레 걱정되는 건 뭐야.’ 찜찜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았다. 그런데 푸름이 표정이 영 아니다. 한쪽 허리를 잡고서 통증을 호소했다. “푸름아?”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푸름이가 입고 있던 티를 올렸다. 누르스름한 붕대로 이렇게 저렇게 그냥 대충 둘러놓았다. “청푸름, 이런거.” “괜찮으니까, 이런거 가지고 걱정시키면 니가 더 힘들어 하니까 이거 아니더라도 넌 충분히 힘들잖아.” “이게 뭐가 힘들어.” “힘들어보여.” 나는 푸름이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금새 내 눈을 피해버리는 푸름이었다. “이리와봐.” 나는 푸름이를 잡아 당겼고, 침대에 앉혔다. “이게 뭐야, 이러다가는 상처 덧 나 잖아.” 나는 붕대를 차근차근 풀었다. 상처는 이미 덧 나 있었다. “봐봐, 이게 뭐야.” 나는 약상자를 들고서 침대에 앉았다. “약상자가 하루도 쉬지를 못하네.” “하루는 쉬었잖아.” “농담아냐.” 피식 웃어보이는 푸름이. 웃는것도 미워 죽겠다. 말도 안들어서. 붕대로 상처를 감쌌다. “안 아프지?” “아픈데.” “엄살 필거면 다치지를 말든가, 맨날 그렇게 다치고 오면 나 없을 때는 어쩌려구.” “너.. 없을때?” “내가 언제 떠날지도 모르잖아. 근데 너 이렇게 매일 다치면 내가 어떻게 가.” “..가긴 어딜가.” 상상도 하지 않았었나봐. 난 내가 없는 이세상 생각해봤는데, 내가 없어도 이모든 것은 그저 일상처럼 돌아갈 것이고. ‘단지 날 사랑한 사람은 힘겹게 살아가겠지.’ 라고,오랜시간 생각했었는데. “만약에, 내가 이 세상에서 먼저 가버리면...” “지켜준다고했잖아” “지켜줄거야, 그러니까 만약에.” “만약은.. 없어.” 정신차려.. 청푸름. 이건 만약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 만약이라는 내말은.. 그저 널 진정시키기 위한 진정제에 불과하단말야. 더 나빠지는 내 병을 어떻게 막겠어. “그병, 고칠 수 있잖아.” 나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지켜준다고말하지나말지,그럼이렇게기대하지도않았을텐데” “기대할만큼,강한내가아니기에그저옆에있는게전부야” “왜,왜!지켜준다고했어?” “너한테필요한건그말뿐이었으니까” “상황에따라서달라지는게,그런게니말이구나” “청푸름, 이건 전혀 상관 없는 일이잖아.” 그래, 어째서 내 말 하나에 푸름이 상처에서 이렇게 서로에게 상처주는 말로 오가게 되었는지..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미안해.” 미안할 것이 전혀없는 타이밍에 내말은 어처구니 없었다 “그렇게 말한 것도 미안하고, 지켜준다는 약속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고.” 미안해야 하는게 날로 늘어나는 것 같아. 내 고개는 하염없이 숙여졌다. 자존심일까? 아니면 푸름이에게 미안해서 바라 볼 수 없는 걸까? 심장이고장나면(제 21화 ~ 제 30화) 21부 “고개 들어.”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푸름이. “창피해.”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푸름이는 내 턱을 손으로 잡아 올렸다. 긴장된 모습으로 눈을 아래로 내렸다. “나 왜 안 쳐다봐?” “창피하다구, 말했잖아.” 조금은 토라진 목소리로 푸름이에게 대꾸하는 나였다. “다음부터는 거짓말 하지마.” “알았어.” “그럼 이렇게 창피 안하잖아.” “알았어.” “착하다, 초원유.” 내 머리를 쓰다듬는 푸름이. 피식 웃어버렸다. 다음날 “집에 있어, 다른데 가지 말고..” “알았어.” 손을 푸름이 어깨 위에 올려 놓고 말했다. “아무데도 안 갈거니까, 너무 마음 갖지마.” 볼에 따사롭게 비쳐오는 해가 창문 뜸 사이로 보였다. “갔다와.” 환하게, 그 빛처럼 환하게 푸름이에게 인사했다. 기분 좋게 말이다. 처음으로, 푸름이에게 손까지 흔들면서 인사했다. 문을 닫고 들어와 허리에 손을 올렸다. “청소를 해야 할텐데, 어디부터 하지?” 띠링. 그 순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이 시간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푸름이가 다시 온 줄 알고 나는 문을 열었다. “뭐야, 청푸..” 고개를 들며 문을 열던 내 눈에는 푸름이가 아니라, 검은 양복을 입은 3명의 남자들이었다. ‘뭐, 뭐야.’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오는 한 명의 여자, 루야가 보였다. 당황하던 나는 인사했다. “안녕, 하세요.” 나보다 어린애한테 고개 숙여 인사하다니, 웃긴다, 정말.. (가 있어요.) 3명의 남자들은 일제히 빌라를 나갔다. “어쩐일로..” 내 말을 무시한 채 집 안으로 들어가는 루야. 그것도 신발을 신은 채로 말이다. 주먹을 불끈쥐다가 어차피 청소할거 그냥 치우자 라고 생각하며 그냥 풀었다. 쇼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루야에게 다가갔다. “미안해요, 대접할게 마땅히 없어서..” 한국말은 알긴 아는걸까? (당신 목소리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뭐, 대충 대답은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뭐, 먹고싶은거 있어요? 내가 지금가서라도 사올게요.” 웃으면서 루야를 바라보았다. (그런 웃음도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금방 가...” 내 손을 덥석 잡는 루야였다. (당신 목소리가 나보다 예쁜것도 아니고, 당신 웃음이 나보다 예쁜것도 아닌데!) 아프게 스며 들어오는 루야의 힘. (나는 가질 수 없는걸, 당신은 너무 많이 가졌잖아!)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지만. 뜻도 모르는 일본말이지만. 뭔가 가슴 속에서 뭉클한게 생겨버린 것 만 같다. ‘뭐가 맘에 안 드는거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나는 물었다. “왜 그래요, 뭐가 싫은건데요.” (싫어! 당신이 미치도록 싫어! 당신이 뭔데,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서 나를 미치게 만드냐고!) 오열하며 소리치는 루야. 나는 눈을 감았다. 소리가 울린다. 가슴 속으로 소리가 스며들어 울린다. 뻥하고 뚤린 내 심장으로 파고 들어간다. (10년 사랑인데, 당신이 뭔데! 다 망쳐 놓는건데!) 그저 루야의 눈물을 쳐다봤다. (미쳐버렸다고, 당신이란 여자한테 그 사람이 미쳐 버렸다고..) 애써 고개를 피해 눈물을 숨기는 루야. 누가, 나한테 해석 좀 해줄래요?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저 아이가 왜 저렇게 울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냥 아까처럼 계속 가슴만 뭉클거릴 뿐, 소리가 심장을 파고 들어갈 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 순간, 루야가 나를 향해 겨눴다. 검정색의 섬뜩한 권총을 말이다. ..! 아무말도 하지않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보야, 겁 많은 바보.’ (그 상냥하던 웃음, 어디갔어?) 땅만 바라본 채 그저 훌쩍거렸다. (이런거 나는 잘 모르지만, 사람 죽는 걸 많이 봐서 대충 잘 맞출 것 같아.) 아무런 말도 없이, 아무런 대꾸도 없이. 내 고개를 긴 손톱에 빨간 촌스러운 매니큐어를 바른 손으로 꾹 잡는 루야. (당신이, 내 첫 상대가 될 것 같아.) 두려움에 눈물이 한방울씩 떨어졌다. (이러면 곤란한데, 이렇게 약하면 재미 없잖아?) 루야의 손톱에 내 눈물 방울이 묻었다. (두려우면 당신이 떠나, 죽기 싫으면! 당신이 멀리 떠나라고.) 내 얼굴을 탁 놓고 일어서는 루야였다. 루야가 신은 높은 구두가 내 치마를 밟았다. (갈기 갈기 찢겨져서 흔적도 없을테니까.) 딱딱. 거리며 가는 구두소리가 멀어지며, 내 두려움도 조금씩 멀어졌다. 총을 꺼내는 순간, 내가 왜 주저앉았을까? 구두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는 치마를 붙잡았다. “너도 나하고 같구나.” 다르지만 이렇게 짚밟힌 것을 보면. 내 치마랑 나는 누구보다도 닮은 것 같다. 둘다 루야라는 여자에게 짚밟혔으니까. 제 22화 그 날 저녁 루야가 왔다간 다음 부터 집안은 차가운 공기만 맴돌았다. 달깍. 문고리가 움직였다. 푸름이었다. 오늘도 역시 살짝 묻은 피가 보였다. “푸름아.” “어?” 나는 푸름이 볼을 스윽 닦았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그냥, 뭐가 묻어서.” 나는 웃으면서 치마에 피를 닦았다. 거실로 들어가는 푸름이를 그저 쳐다봤다. “저녁 먹었어?” “아니.” 안먹었다는 푸름이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그러면 맛있는거 해줄게.” 주방에 들어가서 팔을 걷었다. 20분 후 식탁에 마주보고 앉은 우리 둘, 별로라고 말하는 푸름이의 표정. “맛, 없어?” “아, 아니.” 말까지 더듬을거 없잖아. “맛있어서 잘 넘어간다.” 웃으면서 크게 한 입 먹는 푸름이. 나를 숟가락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입에 들은 것도 다 먹지 않은 채 말이다. “너 안 먹으면 내가 다 먹는다?” “입에 들은거나 먹고 말해, 그러 다 튀어 나와.” 한쪽 입고리를 씨익 올리고는 꼭꼭 씹어먹는 푸름이. 그렇게 행복한 식사 시간이었다. 쾅쾅. 이 문소리가 나기 전에는 말이다. “누구지? 이 시간에.” 나는 푸름이를 쳐다보다가 걸어갔다. 문을 여는 순간, 들이 닥치는 두 남자. “누구세요!” (켄지, 어딨나.) 나는 어리둥절해서 누구냐고 물었다. (경찰이다, 켄지 어디있나.) 한 경찰은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밀어냈다. “누구세요! 당신들 누군데 남에 집에 함부로 들어와요!” (뭐야, 이 계집은!) 나를 밀쳐내는 또 다른 남자. 탁. 식탁 유리에 부딫힌 숟가락 소리였다. 푸름이가 나왔다. (켄지.) (내가 켄지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입안에 들은 음식물을 씹는 푸름이. “푸름아.” 나는 푸름이에게 걸어갔다. 손을 꼭 잡고서 놓지 않았다. 푸름이에게 걸어오는 두 남자. 나는 푸름이를 뒤로 잡아 당겼다. “푸름아.” (어서 수갑 채워!) 뒷 주머니에서 은색 수갑을 꺼내는 남자. 내가 잡고 있던 푸름이 손을 빼앗아 간다. ‘안돼!’ 이렇게 즐거운 식사 시간에. 이런 말도 안돼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청푸름!” 푸름이를 데리고 가는 두 남자. 나는 그 앞을 막았다. “이거 놔, 당신들이 뭔데!” 나는 푸름이의 수갑을 풀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수갑. (이 여자 좀 어떻게 해봐.) 한 남자는 나를 잡았고, 내팽겨쳤다. 푸름이는 또 다른 남자를 밀쳐내고서 넘어진 나에게 걸어왔다. “푸름아.” 푸름이 얼굴을 쓰다듬는 나였다. “걱정하지마, 금방 다시 돌아올테니까, 기다려.” 그 두명의 남자는 푸름이를 다시 붙잡았고, 내 손에서 멀어지는 푸름이였다. 뭐야, 뭐냐구! 푸름이가 어떤짓을 했길래. 쳐들어와서까지, 잡아가는거냐구! 다음날 어두었던 하루가 가고 눈물로 지새운 나였다. 거실 바닥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걱정하지마, 금방 다시 돌아올테니까, 기다려.’ 그래, 난 그저 지나가던 시간처럼 평범하게 있던 그대로 살아가면 돼. 그렇게 기다리면 돼, 그럼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있을테니까.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나는 집을 나왔다. 병원으로 향하는 걸음이 그저 무거울 뿐이다. 병원 “이제는 날짜 안 지키고 그냥 오는거지?” “그냥, 마음이 복잡해서.” “복잡?” 오빠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멍이 어느새 더 커져 버린 것 같아.” “뭐?” 오빠는 놀란 모습이었다. 나는 태연하고 멍한 모습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움의 구멍이 어느새 더 커져 버린 것 만 같아.” 단,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오빠는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청푸름 그 자식이 많이 힘들게 하고 있나 보네.” “나 때문에 오히려 그 아이가 지치지.” 나 때문에. 오빠는 손을 내리고는 말했다. “니가 어서 나아서 푸름이한테 환하게 웃어줘야, 그 자식도 정신차리지.” 그렇겠지. 그렇게 오늘도 치료를 받고있는 나였다. 심장의 구멍은 날로 커져만 가고 있었다. 제 23화 병원에서 나와 정신없이 걸었다.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아마 이 곳에 있겠지.’ 경찰서 앞 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끄러운 일본말이 들렸다. 하지만 떠드는 사람들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어서 푸름이를 만나고 싶은 생각만 가득 차 있었다. ‘있긴 있는걸까?’ 나는 유치소로 가까이 걸어갔다. (누구 만나러 오셨습니까?) 일본 경찰의 말이었다. 대충 알아들은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를 보러온거죠?)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켄지.” 나는 푸름이의 일본 이름을 말하였다. 일본 경찰은 나를 한번 스윽 쳐다보더니 나를 유치소 안 깊숙이 데려갔다. 차가운 한기마저 느껴지는 구석진 방이었다. ‘여기에 푸름이가..’ 나를 한쪽 모서리에 놓여진 벤치에 앉히는 경찰. 아무런 대꾸없이 나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벤치와 50걸음 정도 떨어진 방에서 달칵거리는 열쇠소리가 들렸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하루 사이 얼굴이 까칠해진 푸름이. 덜컥 눈물이 난다. 수갑으로 차여졌던 손은 수갑 자국만 남아있었다. 나를 이제야 본 푸름이였다. “청, 푸름.” (면회 시간은 3분이다.) 경찰은 그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경찰이 가자마자 푸름이를 안았다. “청푸름, 푸름아, 내가 이 이름 얼마나 부르고 싶었는데, 하루였는데 죽을 것 같았어.” 푸름이의 목덜미를 아주 꽉 껴안았다. 푸름이는 내 손을 풀었다. “왜 울어, 바보 같이.” 내 얼굴을 감싸는 푸름이 손을 타고 내려오는 손목에는 아직도 선명한 수갑 자국이 남았다. 나는 손으로 손목을 잡았다. “많이 아프지?” “안 아파.” “미안해,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서..” 푸름이는 나를 다시금 안았다. “미안해 하지마, 그냥 기다려 주기만 해줘.” 3분인데, 왜 이렇게 빠르게 가버리는지. 꼭 3분이 3초처럼 지나가 버렸다. (면회 시간 끝났다.) 다시 푸름이 손목에 수갑을 체우는 경찰. “잠깐만요, 아직 할 얘기가 얼마나 많은데..” 푸름이는 아무말 없이 수갑을 내려보았다. “헤어져 있기 싫어, 이젠 1분도 못 기다리겠어. 눈물만 나와서..” 푸름이는 숙인 고개를 들었다. “말 좀 해봐, 청푸름.” “미안해서 아무말도 못해, 지켜준다고 했는데 약속 못 지켜서.” “안 지켜줘도 돼, 그러니까..” 경찰은 푸름이를 방으로 끌고갔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그렇게 슬프게 서 있지 말아줘.” “미안, 해..” 한 마디 말만 남기고 들어가버린 푸름이였다. 그 날 저녁 혼자 덩그러니 집에 들어왔다. 이렇게 쓸쓸한지 몰랐다. 선지도 집에 있는 것 같지 않고, 하긴 요즘 학교 때문에 바쁘다고 하던데. 근데, 나 너무 나쁜 년이다. 자기 심심할 때만 친구 찾는 그런 나쁜 년 말야. 신발을 벗고 거실로 걸어가는 도 중. 징.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무런 감정없이 전화를 받아들었다. [누나.] 연하였던거다. [무슨일있어?] “아, 아니 아무일도 없어.” 연하에게 조차 내색하고 싶지 않다. 나보다 오히려 더 불쌍한 아이이기에. “왜 전화 했어?” [루야, 거기 안 갔어?] “루야?” 그 아이가 여기는 왜? [루야가 사라졌어] “루야가, 사라졌다고?” [혹시, 누나한테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 왔어, 여기는.” [만약에 루야 오면 연락해 줄 수 있어?] “알았어, 내가 연락해 줄게.” [고마워. 누나.] “고맙긴 이게 뭐가 대단한 일이라고.” 계속 고맙다고 말하는 연하를 뒤로하고 전화를 끊었다. 근데, 그 아이가 정말로 사라진거야? 혹시, 푸름이 때문에?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을거야.” 그 순간! 쿵. 하는 소리가 집 안에 울려퍼졌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누구세요.” 조심스레 물었다. (문 열어!) 루야의 목소리였다. 나는 문을 열었다. “여긴 왠일..” (당신 때문에 모든게 실타래처럼 엉켜버렸어!) 흥분해 보이는 루야의 얼굴. “진정해요.” 나는 루야의 손목을 잡았다. (이거 놔! 더러워.) 내 손을 뿌리치는 루야였다. (내가 들어가, 난 어린애가 아니니까.) 나를 밀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루야였다. 넘어질뻔한 나를 지탱해주는 차가운 벽 뿐이었다. 제 24화 들어가자마자 싱크대에서 물을 틀고 마시는 루야. ‘그 물은 먹으면 안되는데..’ 진하게 칠해져 있던 립스틱은 루야가 손으로 스윽 문질러버리니 하얀 볼로 번져버렸다. (당신은 정말로 가진게 하나도 없나봐, 켄지도 도와 줄 수 없으니까 말야.) 씨익하며 웃는 입술은 볼까지 번진 립스틱을 더 잔인해 보이게 만들었다. 섬뜩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아무말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당신 목숨도 살려주고, 켄지도 그 곳에서 풀어나게 해주고 오히려 당신에게 유리한 제안인데..) 푸름이에 관한 이야기는 맞는 것 같은데. (내 부탁은 하나야, 당신이 아주 멀리 떠나줬으면 하는 바람..) 정적은 계속 되었다. (너무 큰 부탁은 아니겠지? 내가 당신에게 해주는 이 두가지가 그에 비하면 훨씬 좋은 제안이니.) 씨익 웃으며 문 앞으로 걸어가는 루야. (생각 할 시간은 안 줄거야, 그냥 내 뜻대로 진행 해 버릴거니까.) 쾅. 하는 문소리와 함께 나가버린 루야. 그 아이가 다녀간 이 후 더 한기가 느껴지는 집이었다. ‘あなた命もいかしてくれて,その人も解いてくれてあなたにもっと有利な提案なのに’ ‘私の?みは一つよ, あなたが非常に遠く去れば良いと思う念願’ ‘考える時間は?えないこと, そのまま私の意味大道進行するから’ 귓가에 맴도는 것은 이 일본말 뿐이었다. 다음날 일어나자 마자 나는 연하에게 전화를 했다. “연하야.” [누나... 아침부터.] “루야, 들어갔어?” [아직 소식 없는 걸.] “어제, 왔었어. 전화 끊고 바로.” [어디로 갔는지 몰라?] “모르겠어, 근데 물어볼게 있어.” [물어볼거?] “번역 좀 해줄래?” 나는 어제 루야가 했던 발음을 그대로 연하에게 말했다. “あなた命もいかしてくれて,その人も解いてくれてあなたにもっと有利な提案なのに” 연하는 한참을 뜸들이다가 말을 했다. [당신 목숨도 살려주고, 그 사람도 그 곳에서 풀어나게 해주고 오히려 당신에게 유리한 제안인데..] “私の?みは一つよ, あなたが非常に遠く去れば良いと思う念願” [내 부탁은 하나야, 당신이 아주 멀리 떠나줬으면 하는 바람..] “考える時間は?えないこと, そのまま私の意味大道進行するから” [생각 할 시간은 안 줄거야, 그냥 내 뜻대로 진행 해 버릴거니까.] 이게, 어제 루야가 나에게 했던 말이라는 거지? 나와의 잘못된 거래를 요구하는 그런말이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를 꽉 물었다. [무슨일인지 물어봐도 돼?] 연하의 조심스런 말투에 나는 대답했다. “어쩌지, 내가 어떻게하면 좋을까..” [누나.] “너한테 미안해 질 것 같아. 연하야.” 한숨소리 섞인 목소리로 연하에게 말했다. 내가 갈 곳은 연하 옆 밖에는 없으니까, 비가 주르륵 오는 밤이다. 빗물이 꼭 내 눈물처럼 많이도 내려온다. 베란다 창문에 기대어 서있던 나는 하늘을 쳐다보고 말했다. “하늘이 내린 운명이라면, 따라야겠지. 하늘이 슬퍼하라면 슬퍼하고, 아파하라면 아파해야겠지. 내가 없어져서 그 아이가 행복해진다면 떠나야겠지.” 혼자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를 따라 같이 말해주는건, 시멘트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이었다. 다음날 일어나자 마자 나는 온 집에 메모지를 붙였다. 덕지덕지 붙여서 다른 건 하나도 보이지 않도록, 검정펜으로 직직 그어가는 내 글씨가 메모지 하나하나마다 쓰여지고. 어느새 집은 가득찬 메모지 뿐이었다. ‘내가 되도록이면 일찍 가버려야 돼.’ 오래 된 수첩에서 쭉하고 종이를 찢었다. 글씨 써가는 내 손이 떨려온다. ‘미안해.’ 종이는 어느새 까만 글씨로 가득찼다. 손을 가누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내가 그 아이 없이 살아 갈 수 있을까?’ 침대에 기대어 작은 가방에 옷을 집어 넣었다. 구기적거리는 옷들을 나는 그냥 눌러 담았다. ‘빨리!’ 가방에 막 집어넣고 지퍼를 잠갔다. 집을 뛰쳐나와서 나는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다. “아, 선지.” 나는 선지네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띠링. 문은 금세 열렸다. “원유야!” “선지야.” “가방은 뭐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 멀리 가려고.” “뭐?” 큰소리로 무슨 소리냐고 묻는 선지. “내가 떠나야 그 아이가 살 수 있대.” “서로 없으면 죽을 것 같던 애들이, 무슨 소리야.” 나는 선지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선지는 내 말을 듣고는 나를 때렸다. “야 이 나쁜 년아, 결국에는 너 살려고 가는거네?” “선지야.” “너 살려고 그 사람 버려두고, 이미 많이 다친 연하한테 가는거네?” “그게 아니야, 선지야.” “내가 미친년이다, 이런년을 친구로 둬서.” 선지는 나를 때리던 손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마지막일 수도 있잖아, 우리.” “그래서, 잘 있으라는말이라도 하러 온거야?” 나는 울먹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있을거니까 너도 잘 먹고 잘 살아, 사랑하는 사람 버려두고서.” 선지는 그 말만 남기고 문을 쾅 닫고 들어가버렸다. 난 정말 나쁜 년이다. 그러니까 친구도 나를 버렸겠지. 가방을 있는 힘껏 들고서 계단을 내려가는 나였다. 병원 점심 시간인 병원은 한가로웠다. 나는 진료실 문을 열었다. 서류를 보고 있던 오빠. “어, 원유야.” “오빠.” “오늘 병원 오는 날 아니지 않나?” “인사하려고.” “인사?” 제 25화 “나, 떠나려고.”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오빠. “떠난다고?” “루야하고의 약속이야.” “루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다시는 못 볼 것 같아서, 이렇게 온거야.” “무슨 소리야, 그게!” “내가 사라져야 푸름이가 살 수 있대.” “그 자식한테는 니가 전부인데, 니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 “하늘이 그렇다네.” 가방을 내려보는 나였다. “갈게, 오빠.” “너!” “오빠한테 그 동안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어, 푸름이에 대해서 많이 알 수 있게 해줬으니까.” “이대로가면, 청푸름은 어떡하라고.” “루야가, 잘 지켜줄거야.”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다. 도쿄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던 이별. 나는 이미 끝내버렸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나는 번호를 꾹 눌렀다. “연하야, 누나 좀 살려줘.” [누나, 무슨 일이야!] “예전에 도쿄 공원에서 만나.” [누나, 누나!] 나는 핸드폰을 닫아버렸다. 가방을 다시 한번 꽉 붙들고는 공원으로 향했다. ※※※※ (그 여자가 도쿄로 갔습니다.) (도쿄? 고작 간 곳이 거기야?) 나는 바르던 립스틱을 내려놨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한번 흘겨보고는 말했다. (알았어, 수고했어.) (아닙니다, 아가씨.) (가봐.) 나는 내려놨던 립스틱을 다시 손에 쥐었다. (고작 간 곳이 도쿄라니, 바보같은 계집.) 입술을 한번 꾹 누르고는 씨익 웃었다. (이제는 내 차례이군.) 빨간 원색의 핸드백을 손에 쥐고 방을 나가는 나였다. 차를 타려하는 순간, 아빠가 나를 불렀다. (루야, 어디가는거냐.) 한번 씨익 웃으며 나는 말했다. (사랑 찾으러 가요.) (혹시, 켄지를 만나러 가는거냐?) 나는 아빠를 한번 쳐다보고는 차에 올라탔다. (갔다올게요.) 문을 닫고 차는 출발했다. 경찰서 서장실 앞에 섰다. 똑똑. 나는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달그락 거리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츠모토서장님.) (아, 여긴 왠일입니까.) 나는 쇼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빨간 입술 사이에서는 진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말이다. (부탁할게 하나 있거든요.) 재떨이에는 뿌연 연기가 가득했다. (켄지를 알죠?) (네.) (그 사람을 풀어줘요.) 나는 담배를 내려놨다. (그건,) 나는 츠모토 서장을 쳐다봤다. 내 눈을 피하는 츠모토 서장, (안됩니다. 살인미수 혐의인 켄지를 풀어 줄 수 없습니다.) (당신 자식들과 당신 부인을 죽이고 싶은거야?) 나는 딱딱거리는 구두를 신고 걸어갔다. 그리고, 빨간 코트에서 총을 꺼내들었다. (아니면, 당신이 죽던가.) 미동없는 동공으로 서장을 쳐다봤다. (하지만,) (죽고 싶으면 계속 이렇게 진행하시던가.) 나는 씨익 웃고는 서장실을 나왔다. ※※※※ 공원 처음왔던 때와 같은 풍경이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외국인들과, 커플들. ‘기다려줘.’ 갑자기 푸름이 목소리가 들린다. “아, 정신차려.” 나는 고개를 흔들다가 벤치에 앉았다. “누나!” 입구에서 달려오는 연하. 가쁜 숨을 쉬며 내 앞에 서는 연하였다. “왜 이렇게 뛰어 왔어.” “무슨 일있어?” “무슨일은.” 많지, 무슨 일.. “나 너희 집에서 신세 좀 지면 안될까?” “뭐?” 나는 가방을 들어올렸다. “무거워, 들어줘.” 그제서야 연하는 가방을 들었다. “정말로 무슨 일 있는거지?” “아무것도 묻지 말고, 니 옆에만 있게 해줘.” 그 날 저녁 연하 집으로 들어간 나. 작은 집안은 온통 그림 뿐이었다. “열심히 그리는구나.” 연하는 내 가방을 내려놨다. “누나, 침대에서 자.” “너는.” “난, 바닥에서 자면 돼.” 웃으면서 나를 침대에 앉히는 연하. “연하야, 미안해.” “뭐가.” “그냥, 나는 너한테 상처만 줬고, 이렇게 너 괴롭히잖아.” “괴롭히는거 아니야, 그냥 내가 이러고 싶은거 뿐이야.” 나는 연하를 안았다. “그리고, 심장이 뛰지 않아서 미안해.” “괜찮아, 심장이 이 곳에 있지 않아도, 누나가 있는 것 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니까.” 연하는 주춤하던 손으로 내 등을 감쌌다. 제 26화 다음날 “연하야, 누나하고 머리 자르러 가자.” “머리 자르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옷 갈아 입고 나올게.”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서 나왔다. 집을 나와 우리는 거리를 걸었다. “연하야.” “어?” “너도 이런거 하고 싶었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하고 팔짱끼고 걸어보는거.” 연하는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미안해, 몰라서.” “미안하다는 말 그만해, 그럼 누나 싫어한다?” 연하는 나를 쳐다봤다. 웃고있지만, 이렇게 너도, 나도 웃고있지만. 누구보다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갖고 있는 우리인데. 미용실 (어서오세요.) 연하와 나는 미용실 안으로 들어갔다. 상냥한 여자는 우리에게 물었다. (어떤분이 자르실거죠?) (이 여자분이요.) 연하는 내가 잡고 있던 팔을 풀렀다. (앉으세요.) 웃으면서 의자에 앉히는 미용사. 나는 의자에 앉았다. (어느 정도 자르실거예요?) “누나 어느 정도 자를거야?” “이 정도.” 나는 어깨에 있는 쇄골을 가르켰다. 드디어, 가위질이 시작되었다. 싹뚝. 잘라지는 내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머리카락이 잘라지 듯 내 기억도 잘라지면 좋을텐데, 그러면 덜 아플텐데 그 아이도, 나도..’ ※※※※ 머리를 뒤로 넘기며 경찰서를 나왔다. 주머니에 손을 짚어 넣고 집으로 향하는 길. 빌라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 문을 열었다. 달그락. ‘문도 안 잠그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훵한 집안. “초원유.” 나는 원유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 대답없는 너무나 조용한 집. “초원유!” 나는 원유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미안해,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서.’ 어디있는거야, 초원유. 탁자에 손을 얹고 멍하니 쳐다봤다. 그 순간, 내 눈앞에 보이는건 메모지 뿐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하나의 메모지를 떼어내었다. [사랑한다는 말 이제는 못 해] 내 손끝을 스치는건 온통 메모지였다. 식탁에 노여진 종이 한 장. 의자를 빼내고서 나는 자리에 앉았다. 구겨진 편지를 폈다. [내 가슴이 당신을 기억해서, 그래서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써요. 잠깐 멈춰버린 심장이 다시 뛰기 전에 어떻게 내 맘을 전할 수 있을까, 오해는 마세요. 나 초원유는 당신만을 사랑해요, 당신만은 잊고 싶지 않은데 잊으면 안되는데, 훗날 내 심장 속에서 모든게 사라지고 당신마저 사라져도 내 머릿 속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기억할거예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사랑해요, 나한테 진짜 사랑 알려줘서 고마워요, 나를 사랑하게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당신이라서 사랑해요, 나는 당신을 이제 기억하지 않아요, 당신은 그냥 나한테 스며들었어요, 나는 당신처럼 웃고, 당신처럼 울고, 당신 냄새를 풍겨요, 잠 버릇에서 어느 쪽 양말을 먼저 벗는 것 까지 당신에게서 스며 들어 왔어요, 당신을 잊을 수는 있겠지만 내 몸에서 당신을 몰아 낼 수 없어요. 당신을 닮아버린 나이니까, 그저 그냥 내 심장처럼 멈춰서 있을게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ちよなら]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초원유, 초원유!” 편지를 가슴에 품고 울었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절규에 가까운 울음소리는 온 집 안을 감쌌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집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 미용실에서 나와 연하와 나는 공원으로 향했다. “머리 자르니까, 이상해?” “아니, 예뻐.”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짧은 머리는.” “잘 어울려.” 연하는 나를 보고 베시시 웃었다. ‘이렇게 예쁜데, 왜 나는 가슴이 뛰지 않는걸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걸어가는 나였다. 공원 캔트지를 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연하. “뭐 그리는거야?” “아무거나.” 웃으면서 그림을 그리는 연하를 입을 삐죽내밀고 쳐다봤다. ‘나도 그림 그리고 싶다.’ 포기한지 벌써 2년이지만, 가끔 가다 이렇게 그리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 ‘됐어.’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뭐 마실래?” “같이가.” 연필을 손에서 내려 놓을려고 하는 연하를 나는 붙잡았다. “혼자 갔다 올 수 있어, 그냥 그림 그리고 있어.” 연하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로 사 올게.” 나는 연하에게 손을 흔들며 공원을 나왔다. ※※※※ 하루 전 “형은 알지, 원유! 어디있는지..” “나도 몰라.” “형!” “정말로 몰라! 이 자식아.” 나는 형의 멱살을 풀었다. “걱정은 하더라, 근데 루야는 무슨 소리야?” “루야?” 제 27화 “모르고 있었어?” “무슨 소리야, 루야라니.” 진료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루야하고 약속 했다고 하던데, 자기가 떠난다고..’ 내가 그렇게 뛰어 도착한 곳은, 루야의 집이었다. 띠링. 초인종을 눌렀더니 큰 대문은 열렸다. 그리고 루야의 방문을 두드렸다. (루야! 문 열어!) 루야는 금세 문을 열었다. (켄지, 무슨 일이야. 집에 다 오...) 짝. 내 손은 루야의 볼에 맞닿았다. (루야, 니가 뭔데 원유를 건드려!) (켄지.) (내가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건드린 적 없어, 그 여자가 내가 한 제안을 받아드렸을 뿐이라고!) 원망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루야. 나는 루야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건드리면 니가 죽어.) 나는 루야를 밀치고 루야의 집을 나왔다. 빌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열쇠를 넣는 순간, 옆 집 문이 열렸다. “안녕, 하세요..” 나에게 인사를 하는 원유의 친구. 나는 고개를 까딱였다. “저기, 원유...” 입술을 꽉깨물며 나에게 말을 건네는 여자. “도쿄에 갔을거예요.” 도쿄? “도쿄 어디로..” “어디로 갔는지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도쿄에는 분명 갔을거예요.” “고마워요.” 그리고 나는 뛰었다. 장차 8시간이 지나고 도쿄에 도착했다. ‘어디서찾아.’ 나는 도쿄를 헤메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곳도 없었다. 마지막인 이 공원. ※※※※ 자판기 앞에 선 나. 나는 240엔을 집어 넣었다. 불이 들어오는 버튼을 눌렀더니, 커피가 나왔다. “따뜻하다.” 나는 양손에 하나씩 집어 들고 공원으로 향했다. 웃으며 입구로 거의 다 왔는데. 탁. 캔 커피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푸, 푸름아.’ 커피가 바닥으로 떨어진 소리를 푸름이는 들었나보다. 내 쪽을 쳐다 본 푸름이. 눈이 커져서는 나를 응시한다. 그 자세로 굳어 있던 나는 뒤돌았다. ‘아니야, 푸름이가 여기 왜 있어.’ “초원유!” 내 이름을 부르는 푸름이. 나를 안았다. “어디가, 나 두고서.”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내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진다. 푸름이의 팔이 내 어깨를 감싸고 있다 ‘냉정해지자, 초원유.’ 나는 눈을 찔끔 감았다. “누구세요.” 나는 푸름이의 손을 풀었다. “나는 그 쪽 몰라요.” “초원유.” “모른다고!” 나는 소리쳤다. 빗물과 눈물이 하나로 합쳐져 누구도 보지 못하였다. “너 울잖아.” 예외는 있나보다. 저 아이는 내가 우는지 알고 있나봐. “울거면서! 왜 떠났어!” “싫어졌어.” “뭐?” 나는 푸름이 눈을 쳐다 보지 못했다. “지겨워, 이제는.” “내 눈보고 말해!” “서로한테 안 맞았나봐, 우리는.” 나는 입구로 걸어들어갔다. 푸름이는 달려와 내 팔목을 잡았다. “누나!” 연하의 목소리다. 나는 푸름이의 팔을 뿌리쳤다. “안녕, 하세요.” 연하는 푸름이에게 인사를 하였고, 푸름이는 연하를 쳐다봤다. “연하야, 가자.” 나는 연하의 손을 잡았다. “누나.” “뭐해, 가자니까.” “누나, 돌아가.” 돌아가라니,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우연하.” “누나하고 여기는 안 어울려, 다시 돌아가.” “니가 안 가면 나 혼자서라도 가.” 나는 공원을 빠져나왔다. ‘뛰어야해.’ 나는 뛰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뛰었다. 하지만 금세 푸름이에게 붙잡혔다. “이거 놔.” “너 힘들잖아, 그만해.” “이제 나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 기습이었다. 숨이 차오른 나에게 더 힘든 키스였다. 뿌리치려고 했지만, 나에게는 뿌리치기 힘든 상대였다. 제 28화 “놔!” 나는 푸름이를 드디어 뿌리쳤다. “끝이라고.” “.....” “ちよなら!” 나는 사요나라라고 크게 소리쳤다. “영원히 안녕, 할 수 있어? 넌?” “할 수, 있어.” 나는 돌아서서 걸어갔다. “오사카가 너한테 잘 어울린다는 그 녀석 말.” “나한테 도쿄가 더 잘 어울려.” “도쿄라는 도시하고 넌, 달라.” 나는 돌아봤다. “다를게 뭐 있어? 살면 사는거고, 살기 싫으면 안 사는건데 닮지 않았다고 오사카로 돌아가라는 말이 어디있어?” “니가 싫잖아, 니가 싫다고 울고 있잖아.” “뭐?” 알 수 없었다. “나도 아는데, 그 녀석도 아는데, 너는 정작 왜 몰라.” 내가, 나를 모른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데. “다신 놓치지 않을게.” 나에게 한 걸음 다가오는 푸름이. “오지마.” 내 앞에 무릎 꿇은 푸름이는, 울었다. “제발, 나 두고 떠나지마.” ‘약해지지마, 초원유.’ 니가 다시 돌아가면, 청푸름이 죽어. “니가 왜 울어? 니가 왜 나한테 무릎 꿇어?”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그 흔한 이 말이 왜 오늘따라 이렇게 슬프게 들리는지. “사랑한다는 말, 이젠 나한테 하지마.” “..미안하니까.” “미안하단 말도, 나한테 하지마.” “..보고싶었으니까.” 보고.. 싶었으니까. “보고싶었다, 보고싶었다, 보고싶었.. 어..” 같은 말을 반복하던 내 입에서 진심이 나왔다. 눈물과 같이 말이다. “나는 보고싶었어, 사랑한다는말보다, 미안하다는말보다 보고싶었다는말이 더 하고 싶었어.” “보고싶었어, 보고싶었어, 보고싶었어.” 나는 무릎 꿇은 푸름이 앞에 주저 앉았다. “울지마, 바보 같이.” 푸름이 볼을 스치는 내 두손을 푸름이가 붙잡았다. “바보라서 울잖아.” “그렇지? 바보라서, 이렇게 둘 다 울고 있는거지?” “그래, 니 말이 맞아.”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는 우리를 부러워 하던 비는, 우리가 그렇게 닦은 만큼. 그치고 있었다. ※※※※ 하루 전 화장을 곱게 하고 있던 나는 울리는 초인종소리에 일어섰다. 띠링. (루야!문열어!) 큰 대문 사이로 조금씩 익숙한 모습이 보이고, 켄지였다. 나는 기쁜 마음에, 나에게 돌아온 줄 아는 착각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켄지, 무슨 일이야. 집에 다 오....) 짝. 볼에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 (루야, 니가 뭔데 원유를 건드려!) 원유, 그 여자를 말하는거겠지. (켄지.) (내가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나에게 소리치는 켄지. 단 한번도 나에게 이렇게 대한 적 없는데. (나는 건드린 적 없어, 그 여자가 내가 한 제안을 받아드렸을 뿐이라고!) 원망섞인 눈으로 나는 켄지를 쳐다봤다. 내 멱살을 잡은 켄지. (다시 한 번 말하는데, 건드리면 니가 죽어.) 나를 밀치고 집을 나가는 켄지를 그냥 울며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이를 꽉 깨물며. 땅과 제일 가까운 손을 주먹쥐며. (이해가 안 가, 그 여자가 나보다 잘난게 뭐가 있어! 켄지조차 지켜줄 수 없는 여자가 뭐가 좋다고, 나를 이렇게 무시하는거냐고!) 나는 머리를 붙잡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열받아, 북받쳐, 비참해!) 나는 화장대에 있는 모든 것을 내팽개쳐 버렸다. 아! 아주 크게, 세상에서 가장 크게, 소리 질렀다. (아가씨!) 나를 말리는 남자들. (놔, 놔! 이거 놓으라고!) 나는 절규했다. (놔줘라.) 나를 말리던 남자들은 일제히 손을 놓았다. (루야, 너에게 진실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진실? 만신창이던 내 모습은 주저앉아 아빠를 쳐다봤다. (켄지하고 넌, 남매다.) 남매? 피를 나눈 남매라고? (그, 그게 무슨말이세요, 켄지하고 제가 남매라뇨.) 아빠는 고개를 떨구었다. 말도 안돼. (미안하다.) (그런게 어디있어요, 말이 안되잖아요, 켄지는 입양아나 다름없다고 하셨잖아요.) (협박에 못 이긴 켄지 어미가 나에게 넘긴 것 뿐이지.) 기가 차서 말도 안나온다. 어떻게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을까. (켄지도, 알고 있어요?) 아빠는 고개를 흔들었다. (난, 그냥 모른 채로 살아갈래요. 그냥 계속 사랑할래요.) (루야.) (몰라요! 이제 와서 나한테 심장바꾸라는거와 같은 말이잖아요, 한번 비뚤어져 버린 심장을 한순간에 어떻게 되돌려버려요, 그냥 난 계속 사랑할래요, 못 들은걸로 할게요.) 제 29화 오사카 어느새 구름 한 점 없는 밤 하늘로 변해버렸다. 푸름이 등에 업혀서, 집으로 한걸음 한걸음 향했다. “푸름아.” “왜” “나, 씻겨 줄래?” 나를 쇼파에 앉히는 푸름이. “조금만 기다려, 내가 따뜻한 물 받아 놓을 테니까.” 푸름이가 조금씩 멀어지고, 나는 쇼파에 기대어 누웠다. 꼭 쓰다 버린 필름처럼, 깜박깜박거리는 눈. ‘졸려.’ 하나, 둘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하나하나 세어 나갈수록 졸려오는 건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으려 하는 찰나, “초원유.” 나를 흔드는 푸름이. “아파?” “아, 아니.”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를 안아드는 푸름이. “나 걸을 수 있어.” “걱정하지마, 내가 부실한 것도 아닌데.” 욕실 욕조안에 들어가있는 나.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내 모습은 앙상한 겨울 나무 같았다. 물을 주지 않아 죽어 가는 겨울나무 말이다. “왜 이렇게 말랐어.” 푸름이는 나를 보며 말했다. “나한테 냄새 나.” 동문서답이었다. “아무 냄새도 안 나.” “몰라, 사람 죽어가는 냄새가 나.” “그 냄새가 뭔데?” “몰라, 그냥 가슴에서 뭔가 물컹거리고, 답답해.” 나는 무릎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괜찮아, 아무 냄새도 안나.” “내가, 왜 떠났는지 알아?” “왜?” “니가 나 때문에, 아플까봐, 죽을까봐.” “내가 죽긴 왜 죽어.”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너 안 죽어.” “만약에, 그런다면 루야한테 가, 알았지?” “싫어.” 단호한 푸름이의 목소리. “알았지?” “초원유가 없으면 청푸름도 없어.” “.....” “청푸름이 없으면 초원유도 없어.” “..나 없이 못 살 것 같아?” “못 살 것 같아.” “근데, 우리는 어차피 이번 생이 아닌가봐,” “살 수 있어, 너 살 수 있어,” “어느 순간 내가 허무하게 떠날까봐 두려워, 너 없을 때 떠날까봐 두려워.” “이젠 내가 계속 옆에 있어 줄게.” “무서워 푸름아.” 눈물이 흐르고, 내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는 푸름이. “눈물이 왜 나온대, 지멋대로.” 나는 쓱하고 손으로 눈물을 감췄다. “춥다, 나 그만 할래.” 나는 푸름이한테 수건을 달라고 손을 뻗었다, 침대에 딱하고 누운 우리 두 사람. 멍하니 카키색 벽지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가. 깊이, 아주 깊이 잠들었다. ※※※※ 자고있다. 원유가 내 옆에서 아주 오랜만에 자고 있다. 새근거리며 자는 원유가 잠꼬대로 한 말이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다음 생이다, 우리는.” 다음 생일까? 정말, 우리는 이번 생이 아닌 다음 생일까? 손을 떨며 원유의 볼을 쓰다듬었다. ‘내 이 더러운 손으로 이렇게 깨끗한 아이를 더렵혀도 될까?’ 그래, 나는 더럽고 더러운 생 양아치 같은 놈이고, 원유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그런 깨끗한 아이이다.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나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고, 원유는 죽어야하는 사람이지만. 미친 듯 사랑하니까. 하늘이 봐줄 줄 알았다. 한 번 쯤은 우리를 비춰줄 줄 알았다. 이미 빗나가버린 화살 되돌릴 수 는 없잖아. 니가 말한 것 처럼 우리는 다음생인가봐. 이번에도 미친 듯 사랑하고, 다음에도 미친 듯 사랑하는거야. 그러자, 내 사랑아. ※※※※ 다음날 꾸물정 거리며 일어나는 나였다. 말끔히 양복을 입고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는 푸름이. “어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병원 가야지.” “병원? 가야지.” 나는 이제야 머리를 정리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옷 갈아 입을까?” “안 갈아 입어도 돼.” 내 볼을 한 번 꼬집고서는 내 손을 잡는 푸름이었다. 병원 “오빠.” “언제는 다신 안 돌아온다고 하더니?” “내가 언제, 나, 나는 그런 적 없어.” 나는 말을 더듬으며 의자에 앉았다. “형.” “왜 불러.” “원유, 입원 시켜 줘.” “뭐? 무슨 입원이야, 나 멀쩡하잖아.” 나는 무슨 소리냐며 푸름이를 쳐다봤다. “입원시켜 줘, 되도록이면 빨리.” 도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이 녀석! 제 30화 “난 싫어.” 나는 푸름이 옷자락을 붙잡았다. “입원은 왜?” “형이 가까울수록 좋은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원유가 이렇게 싫어하잖아.” “맞아, 난 싫어.” 나는 푸름이와 오빠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집이 좋아, 돌아 온 지 얼마나 됬다고 또 나가래?” “내가 옆에 있을거야.” “그래도 나는.” “너희 계속 그럴거야?” 오빠는 까닥하다간 싸움날 것 같던 우리를 쳐다봤다. ※※※※ 30분 후 원유의 진료가 끝났다. “나가도 돼지?” “껌이라도 붙여두고 왔어? 왜 그렇게 안절부절이야.” “오빠하고 푸름이가 나 병원에 감금시킬까봐.” 웃으면서 진료실을 나가는 원유.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볼게.” “푸름아, 잠깐.” 나를 부르는 형의 목소리가 다른 때 와는 달랐다. “왜.” “원유, 곧 떠날 것 같다.” 또 떠나다니? “무슨 소리야, 떠나긴 어딜 떠나.” “니가 그렇게 싫어하는 하늘로, 곧 있으면 떠날거라고.” 하,늘로. 원유의 X-ray를 보며 말하는 형. “심장에 구멍이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어.” “그게, 무슨 소리야? 심장에 구멍?”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거니까, 원유는 죽을병이야, 고칠 수 없는 선청성 심장병이라고.” 고칠 수 없다고? 그냥, 죽는 걸 지켜볼 수 밖에 없다고? “살릴 수 있는 방법, 없는거야?” “없어, 그냥 흘러가는 시간에 맡길 수 밖에.” 아무것도 몰랐다. 그 녀석에 대해서 나는 말이다. 그냥 심장병에 걸린 불쌍한녀석이고. 나를 좋아해 주는 그런 녀석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죽을 날 별로 안 남은 그런 녀석인 줄 몰랐다. 어쩌면 나는 그 녀석에 대한걸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 녀석은 다 알고있는데. 나에 대한 모든걸 거의 알고있는데. 내가 알고있는건. 고작 손가락 5개 안에도 들지 않을 정도이다. 저렇게 해맑은데.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곧 눈을 감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하늘로 떠난다니. 밉다. 정말 하늘이. 오늘따라 더 밉고, 또 미워진다. ※※※※ 기분이 울쩍해 보이는 푸름이. 오빠한테 욕이라도 들었나? 하는 마음에 뒷짐지고 걸어가던 나는 푸름이 앞에 떡하니 섰다. “청푸름, 왜 그래.” “뭐가?” “기분은 무척 안 좋아 보이고, 꼭 넋 나간 사람처럼.” “아무것도 아니야.” 웃으면서 넘어가는 이 녀석. 그걸 모르나봐. 눈은 슬프고, 입고리만 올라가고 있다는 걸. 괜스레 걱정이 되는게 나였다. 빌라 집에 들어오자 마자 나는 기지개를 폈다. “졸려.” “들어가서 자.” “나 자면 너 심심하잖아.” “심심하면, 깨울테니까 가서 자.”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들어가서 자라는 푸름이 말에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서 따뜻한 이불에 몸을 녹였다. 근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잠이 오질 않는다. 쇼파에 앉아 심각한 표정의 푸름이 얼굴만 눈 앞에 아른거릴 뿐. ‘저 녀석, 왜 그럴까? 도대체 뭐가 걱정이지?’ 근심 많아 보이는 표정을 한 시간이나 지켜보았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푸름이. 움직임이라고는 일분에 한번씩 깜박이는 속눈썹 뿐. 전혀 없었다. 혹시 생각하다가 죽은건 아닐까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물어보면안되는걸까?괜히혼자오버하고앞서나가는걸까?’ 침대 모서리에 간신히 매달려 푸름이를 계속 쳐다봤다. 한시간 후 나는 잠들었었다. 눈을 감고있었던 그 시간 동안 하늘은 어느새 노랗게 변해졌다. 하지만, 아직도 쇼파에 앉아. 한시간, 아니 두시간 전과 같은 자세로 생각 중인 푸름이. 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푸름아.” 나는 푸름이를 불렀다. 그제서야 두 시간 만에 움직이는 고개. “어?” 나는 푸름이 무릎에 앉았다. “뭐가 그렇게 고민이야.” “고민은 뭐.” “나 때문에 그래? 내가 입원 안해서?” “아니야, 그거.” “그렇게 내가 입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입원할게.” “니가 싫다고 했잖아.” 나는 푸름이 손을 잡아서 내 허리에 감았다. “니가 그랬잖아, 초원유가 없으면 청푸름도 없고, 청푸름이 없으면 초원유도 없다고,” 내 어깨에 살짝 얼굴을 기대는 푸름이. “그러니까, 니 생각이 내 생각이니까.” “고마워, 원유야.” “그거 알아?” “뭐?” “너 처음으로 초원유라고 안 부르고 원유라고 부른거?” 정말로, 처음 들은 원유라는 내이름. 가슴 깊이 기억해 둬야지, 오늘이라는 날을. 심장이고장나면(제 31화~에필로그) 完 제 31화 “나 내일 입원 할래.” “무리야, 그건.. 우리 다음 주에 입원하자.” “그냥 빨리 가자, 응?” 나는 푸름이를 쳐다봤다. 푸름이의 손을 풀며 나는 말했다. “나, 가게 좀 갔다 올게.” “같이 가.” “괜찮아 ,내가 필요한 것도 못 살까봐? 아님, 내가 어린애처럼 길이라도 못 찾을까봐?” 나는 베시시 웃으며 신발을 구기적거리며 신었다. 그리고 집을 나왔다. 싱글벙글 거리며 걸어가는 나였다. ※※※※ 차에 앉아 켄지의 집을 쳐다봤다. 그 순간, 그여자가 집에서 나왔다. 웃으며 걸어가는 그 여자, 뭐가 저렇게 좋은거지? 난 당신 때문에 미칠 것만 같은데. 검은 차의 뒷문은 열리고,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여자의 뒷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꼭 눈물나게 만들거라고, 나처럼 이런 눈물 흘리게. 나는 빌라 안으로 걸어갔다. 띠링.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문 열려 있는데 ,초인종은.” 웃고있던 켄지의 입고리가 차갑게 내려갔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손님이 왔네.) 켄지는 문을 닫으려 했다. 나는 문을 잡으며 말했다. (켄지가 그렇게 가고 나서 얼마나 속상했는 줄 알아?)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 발을 옮겼다. 내 앞을 가로막는 켄지. (켄지.) (너하고 할 얘기도 없고, 니가 집에 들어오는 것도 싫어, 가 줘.) (너무한 거 아냐?) (니가 원유에게 한 것 보다는 아니겠지.) 나는 켄지를 노려봤다.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려는 찰나. 올라오는 그 여자가 보였다. ‘지금이야, 당신 눈에서 눈물 나오게 할 때가.’ 나는 또 다시 돌아섰다. 딱. 구두의 발자국이 멈췄다. 켄지 앞에서. 내 입술에 빨간 립스틱이 반쯤 지워질 정도로, 눈을 떴다. 스르르. 그 여자 손에서 떨어지는 봉지.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그 여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당신은 끝이야.’ 나는 더 켄지의 목을 껴안았고, 드디어 내가 그렇게 보고싶었던 그 여자의 눈물을 보았다. (뭐하는짓이야!) 켄지는 나를 밀쳐냈다. (그냥, 작별인사 정도?) 나는 그 여자가 서있는 쪽을 바라봤다. 그제서야. 그 여자를 보게된 켄지. “원유야” “듣기, 싫어.” 그 여자는 흐트러진 봉지를 밟고 계단을 내려갔다. 켄지는 내 앞을 밀치고 그 여자를 향해 달려갔다. (오늘도 버림 받았지만, 나하고 똑같은 눈물을 봤어, 이걸로 난 좋아.) 나는 입술을 스윽 문질렀다. 닦은 소매에는 빨간 립스틱 뿐 만아니라, 더 진한 피가 묻어있었다. (켄지.) 이 피가 어떤 일을 초래하는지 지켜봐. ※※※※ 루야하고 눈이 마주쳤어. 차가운 눈하고 말야. 입술을 꽉 깨물고 나는 달려나왔다. 그렇게 빌라를 빠져나오는데. 연하가 보인다. “니가 여기 왜..” “왜 울어, 누나.” 왜 우냐는 연하의 질문에 눈물이 더 많이 나왔다. 나는 연하 품에 안겼다. 아주 폭 말이다. “원유!” 내 이름을 부르는 푸름이. 나는 연하 품에 안겨서 말했다. “너보기 싫어, 꺼져줘.” 나쁜 년, 나쁜 년! 너만 키스하란법 없잖아, 다른 여자하고는 하면 안된다는 법도 없잖아, 근데, 왜 잘못없는 푸름이한테 꺼지라고 해? 바보, 등신, 천치같은 기집애. “꺼지라고 하면, 꺼질게.” 등돌리는 푸름이. 잡고 싶었지만, 이대로 연하를 안고 있던 나에겐 연하를 버릴 수 없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미안해, 미안해 바보야.’ 그대로 돌아가버리는 푸름이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나는 연하 품에 안겨있었다. “누나.” 연하는 내 팔을 내렸다.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내 볼을 닦아주는 연하. “미안해, 연하야.” “무슨 일 있는거지?” “내가 너무 나쁜 년 인가봐, 내 물건도 아니고, 내 이름을 써놓은 것도 아닌데, 고작 내 마음에 있다고 그 아이에게 상처주고 꺼지라고 했어.” 엉엉 거리며 울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히려 나보다 연하가 더 슬플거니까. 내 말이 너무 잔인한거였다. ‘고작 내 마음에 있다고 그 아이에게 상처주고.’ 내 마음에는 그 아이 밖에 없다고. 확신해 버린 그런 말이었으니까 말이다. 제 32화 늦은 밤 연하와 단둘이 앉아있는 벤치는 1M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거의 100M미터 만큼 떨어져있던 것 같다. “미안, 연하야.” “내가 물어보면 안되는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동안, 소리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괜히 돌아온 것 같아, 그 아이가 더 독해진 것 같아.” “그 아이?” “루야 말야, 정말로 더 독해져서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연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눈물을 받아줄 뿐. ‘미안해, 정말로 너한테 죽을 죄를 진 것 같아서 미안해. 연하야.’ 다음날 연하의 손을 붙잡고 아침 일찍 온 곳은 병원이었다. 입원을 해야 할까? ‘집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나을거야.’ 나는 병원으로 들어갔다 연하는 나를 대신해 입원 수속을 해줬고, 나는 멍하니 병원 창문 틈을 통해 밑을 내려 봤다. 그런 사이 연하는 내 등을 탁 쳤다. “다했어. 누나.” “고마워, 연하야.”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연하. “왜?” “누나, 이거 잘하는 짓 아니라고 생각하지?” 나는 아무말도 못했다. “모르는 일이지, 그 남자는?” “알아, 입원 한다고 말했었어.” “근데, 왜 그렇게 울려고 그래, 꼭 죄 지은 사람처럼.” 니 말대로 난 지은 죄가 너무 많아. “연하야, 내 옆에 있어 줄 수 있어?” “.....” “내 옆에서 줄 수 있어?” “누나 맘에는 내가 없잖아.” 맞아, 니가 없어. 연하야. “그렇구나, 미안해.” 나는 귀를 만지작거렸다. “사랑하니까, 괜찮아.” “.....” “누나가 나 사랑하지 않아도, 내가 사랑하니까, 괜찮아.” 계속 이렇게 나는 나쁜 년이고, 계속 그렇게 너는 착한 아이구나. ※※※※ 원유가 그렇게 가고 나서 하루가 지났다. 집은 온통 어지럽혀 있고. 내게 남은건, 달랑 손에 쥐어진 술병 뿐이었다. ‘너 보기 싫어, 꺼져줘.’ 그 녀석 품에 안겨서, 나에게 꺼지라고 그런 그 아이가 밉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그 아이가 너무 밉다. 근데, 그런 아이가 계속 눈 앞에 아른거려서 미칠 것 같다. 탁. 내 앞에 보이는 빨간 구두. 나는 퀭한 눈으로 위를 쳐다봤다. 루야였다. (켄지, 왜 이러고 있어?) (니가 알 필요없어.) 나는 술병을 입에 갖다 댔다. 루야는 그런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이거 놔.) (술이라도 먹고 죽게? 그 여자 때문에 당신이 이럴 필요 없잖아.) (놓으라고!) 나는 루야의 손을 뿌리쳤다. (한 두 번 참았어, 아니 수십 번, 수백 번 참았어, 내가 언제까지 당신한테 이렇게 무시 당하며 살아야 돼?) (그럼 날 버려.) (버리고 싶어, 나도 버리고 싶다고, 근데, 이게 아니래.) 루야는 왼쪽가슴에 손을 올리고 때렸다. (이게, 이게! 안된다고 하잖아, 버리고 싶다고 아무리 머리가 생각해도, 이게 안된다잖아.) ‘심장이 고장나서.’ 갑자기 원유 목소리가 떠올랐다. (차라리, 죽고 싶어.) 루야는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들었다. (루야!) 나는 술병을 집어던지고 루야를 말렸다. (이거 놔! 그냥 죽어 버릴거야!) 머리에 총을 대고서 죽겠다는 루야. (루야, 루야! 정신차려!) 루야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나는 루야의 볼을 손으로 탁탁 치며 루야를 불렀다. (루야, 루야, 정신차려.) 이미 정신을 잃은 루야였다. 두시간 후 뭉기적거리며 일어나는 루야. (어지러워) 나는 물컵을 내밀었다. (고작 이것 밖에 안되면서 죽는다고는 왜 하냐?) (내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당신은 모르니까.) 루야는 물컵을 내려놓았다. (가 줘.)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루야를 쳐다봤다. (이제 막 일어난 사람이야, 이렇게 쫒아내고 싶어?) (혼자 있고 싶어, 나가줘.) (그 여자 자리가 그렇게 컸던거야? 당신한테?)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루야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세게 깨물지마, 쓰디 쓴 피맛을 볼거니까 말야.) 탁탁거리며 나가는 루야를 나는 쳐다봤다. 정말로, 쓰디 쓴 피맛을 보았다. 빨갛고 붉은 피를. ※※※※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하늘색으로 되어있는 환자복은 나에게는 무척 안 어울린다. 커다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밑을 내려보는 동안. 병실 문이 열였다. “누나.” 물컵을 들고 오는 연하였다. 나는 서랍에서 약봉투를 꺼내들었다. “다 버려 버리고 싶어.” “먹어야지, 낫지.” 연하는 나에게 컵을 내밀었다. 컵을 받아 들고 나는 약을 꿀꺽 삼켰다. 제 33화 다음날 입원한지 하루가 지났다. 혼자 달랑 병실에 남겨져서 일어나자 마자 물을 벌컥 마시고있다. 달그락. 문이 열렸다. “오빠.” “초원유, 너 누가 입원하라고 했어.” 영문을 모르겠다. 오빠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여기가 너희 놀이터인 줄 알아!” “오, 오빠.” “니네가 싸우고서 잠깐 쉬고 가는 쉼터가 아니라고!” 왜 그러는거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너하고 나는 아는 사이야, 하지만 그 전에 환자와 의사야, 그리고 이곳은 공공장소이고.” “알아.” 나는 침대에 다리를 올렸다. “너희가 오고 싶으면 오는 그런 곳이 아니라고.” “알아, 하지만 갈 곳이 없었어.”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또 싸웠나보네.”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조금만 이해해줘, 아무짓도 하지지 않고 그냥 병실에만 있을테니까 말야.” 오빠는 머리를 쥐어잡았다. “안될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니 마음대로 해.” 나는 베시시 웃었다. “고마워, 오빠.” 오빠는 병실을 나갔고, 나는 그대로 침대에 계속 앉아있었다. ‘정말 미안 할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지..’ ※※※※ 독한 맘 품고서 오늘도 켄지의 집 앞에 섰다. (꼭, 내 것으로 만들거야.) 이렇게 다짐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자, 진동하는 술 냄새는 맡고 있는 것 조차 술에 취할 정도였다. 나는 삐걱거리는 구두를 신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일이야.) (당신을 협박하려고.) 나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멍하고 아무것도 비치지 않을 정도의 검은 눈동자로 날 쳐다보는 켄지. (당신이 나에게 오지 않으면, 그 여자를 죽여 버릴거야.) 비참하지만, 협박으로라도 당신을 갖고 싶었어. (어차피 원유는 죽어.) (내가 먼저 죽인다면, 당신은 가장 소중한 걸 잃게 되는거야.) (그냥 둬, 그 녀석.) (도대체 당신 맘은 뭐야? 그 여자를 살리고 싶은거야, 아니면 나를 흔드는거야?) (둘 다.) 술을 입에 대고서 말을 하는 켄지. (멋대로 해, 나는 내가 그냥하면 되는 일이니까.) (루야.) (그러니까, 나한테 오라고, 마음까지 줄 필요 없으니까 그냥 내 옆에 있으라고.) (그러면 그 아이가 상처 받아.) (그럼 죽게 만들거야!) 나는 소리쳤다. 아이라인이 다 보이도록, 진한 아이쉐도우가 다 보이도록, (당신이 그 여자를 놓아 주고 나한테 와야, 모두가 상처 받지 않아.) 아마도, 우리 모두 다 조금의 눈물은 흘리겠지만. 아마도, 우리 모두 다 조금의 아픔은 있겠지만. 나중에는 모두들 웃을수 있을테니까 말야.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것보다는. 서로에게 원망이 되는 것보다는. 잠시 지나가는 악연이라고 생각되는게 낫잖아. ※※※※ 일주일 뒤 푸름이를 보지 못한 지 벌써 9일이라는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하루가 24시간이니까. 벌써 216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내 옆에는 항상 연하가 있었고, 푸름이 옆에는 루야가 있었을거다. 아마도 말이다. “누나!” 문을 쾅하고 열은 연하. 나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놀랬잖아.” “미안, 근데.” 연하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헛것이라도 본 것 마냥 말이다. “루야하고, 그 남자가.” 푸름이..? “떠난대.” 떠난다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말도 안돼.”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맨발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럴 리가 없어.” 쾅. 문 앞에서 나는 쓰러졌다. “누나, 누나!” 흐릿해져서, 이젠 아련하기까지 한데. 이제 영영 못 본다는건가? 그러면 안돼. 또 내 반쪽이 사라지잖아. 잃고 싶지 않아. 잃을게 이젠 더 이상 있지 않아서. 중환자실 산소 호흡기를 하고서 나는 심장 박동기 옆에 누워 있다. 눈을 깜박거렸더니. 참았던 눈물이 귓불을 타고 흘렀다. 심장이 아프다. 많이 쓰리고 있다. ‘떠난대.’ 계속 아까 연하가 했던 말 때문에 눈이 아플 정도로 눈물이 나온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내 손에 꽂아 있던 심장 박동기를 떼내었다. ‘조금 따갑네.’ 손을 어루만지는 나였다. 제 34화 삐. 울리는 심장박동기. 문이 벌컥 열렸다. “누나!” 놀라보이는 연하. “연하야.”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연하를 쳐다봤다. 연하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연하는 나를 침대에 앉혔다. “왜.” “가다가 또 쓰러지면 어떡해.” “괜찮아. 이제는.” 나는 일어섰다. “내 앞에서, 그 남자 때문에 쓰러지는거 보고 싶지 않아.” 반응하는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 녀석이 내 가슴에 박혀서 나오질 않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누나가 날 바라보지 않아서가아니라, 누나가 아프니까.” “걱정하지마, 니가 걱정할만 한 가치조차 안되는게 나이니까.” 나는 스윽하고 눈을 비볐다. “나, 병실로 돌아 갈래.” 중환자실을 뛰쳐 나가는 나였다. ※※※※ 오늘도 술로 보내는 하루. ‘당신이 그 여자를 놓아 주고 나한테 와야, 모두가 상처 받지 않아.’ 정말로, 내가 원유를 놓고 루야한테 가야 모두가 상처받지 않고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눈물이 앞을 가려 비틀거렸다. ‘나 초원유는 당신만을 사랑해요.’ ‘당신이라서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ちよなら’ 이제는 내가 영원히 안녕이잖아. 내가 널 버려야 하잖아.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이렇게 헤어져야 돼.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아무런 해답도 나오지 않는다. 계속해서 술만 내 몸에 차오를 뿐. ※※※※ 벌써. 1월이 다 되어 가는 것 같다. 병원에 있는지는 알수 없을 만큼 지나갔고. 어깨에 왔던 머리는 어느새 가슴과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녀석은 한번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진 후 말이다. 어쩌면 한 편의 동화처럼 남아있는 옛날 얘기 같다. 나중에는 약간 슬픈 웃음 지으며 말할 수 있는 그런. “하.” 나는 왼쪽 가슴을 부여 잡았다. 침대 옆 서랍 위에 놓여진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한결 나아진 것 같다. 병원에만 틀어 박혀 산 나. 단 한번도 나가지 않은 것 같다. 그냥 연하나 오빠가 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해주는게 전부. 나는 이미 세상과 단절 된 지 오래이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녀석.’ 비가내리는 오늘이 왠지 더 그리워 지는 날인 것 같다. 청승맞게 말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링겔 착용대를 끌고 병실을 나왔다. 환자로 가득한 병원. 나는 비틀거리며 밖을 나갔다. 아직도 내리고 있는 비. 나는 삐쩍마른 앙상한 손으로 비를 붙잡았다. 금세 그쳐버린 비. 소나기였나? 나는 위를 쳐다봤다. 파란 색깔이 내 위를 덮고 있다. 옆을 보니, 연하가 우산을 들고 있었다. “누나, 춥게 왜 나왔어.” “그냥.” 나는 웃으며 착용대를 잡았다. “휠체어에 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맨날 앉아 있었더니, 걷는 법을 잃어 버린 것 같아.” 나는 착용대를 붙잡았다. 내 손에 고여있던 빗물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고. ※※※※ 누나는 말이다. 웃음을 잃은지 오래이다. 내가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그저 웃는 시늉만. 아무리 웃긴 프로그램을 봐도. 그냥 힘 없는 눈으로 쳐다보기만. 그 남자 때문일까? 내가 옆에 있어서, 내가 그 남자가 아니라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말라가는 누나. 저번 검사 때 몸무게는. 39kg. 비정상적일 정도로 걸어다니는 누나를 보듬어줄 수 없는 내가 너무 한심하다. 왜 이 모양이라서. 사랑을 못 받는걸까 하는 죄책감 때문에. 매일 저녁 본다. 나는 누나가 우는 걸. 침대에 가녀린 어깨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우는 누나를. 나도 알고 있다. 누나가 우는 이유를 말이다. “바보.” 나는 그렇게 우는 누나에게 이 말 밖에 하지 못한다. 사랑한다는말도, 미안하다는말도 할 수 없으니까. 누나에게 그렇게 바보라는 그 말만 남기고 간다. ※※※※ 병실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이리쿵, 저리쿵, 비틀거리며 박치기를 했다. 그 때마다 연하는 나를 휠체어에 태우려고 했고. 그 때마다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하였다. 제 35화 나는 또 다시 병실에 있는 네명의 친구를 만났다. 나를 가끔가다 즐겁게하는 TV. 그리고 나를 재워주는 침대. 또 내가 숨을 쉴수있도록 해주는 가습기. 마지막으로 내 옆에 서있는 연하. 또다시 이 친구들을 만났다. 어쩌면 마지막 내 인생의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 아마도. ※※※※ 1월이다. 그 녀석은 잘지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많이 나았는지, 아니면 많이 안 좋아졌는지. 알 수가 없다. 내 옆에는 루야가 있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무것도 아니야.)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묻는 루야. 괜스레, 그 녀석 생각이 난다. 비가 오는 날이니까 말이다. 이틀 후 (기다려.) (어디가는데?) (잠깐.) 루야는 나에게 어디가냐며 물었다. 나는 형을 만나러 간다고 차에서 내렸다. 입술을 한번 꾹 깨문 뒤. 병원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나는 병원 냄새. 나는 5층으로 갔고, 진료실에 도착했다. 똑똑. 나는 달그락거리는 문을 열었다. “형.” 오랜만에 불러보는 형이다. “청푸름, 니가 여긴..” “나는 오면 안되는건가?” 나는 머쓱해 하며 자리에 앉았다. “니가 올 이유가 사라졌으니까.” 하긴, 난 아파도 절대로 병원에는 오지않으니까. 그 녀석 때문에 들린 병원이었으니까. “작별 인사.” “작별 인사라고?” “나, 일본에서 떠나.” 내 말에 형은 많이 놀란 듯 싶다. “루야하고 떠날거야, 멀리.” “미친놈.” 형은 나에게 말했다. 욕들어도 나는 괜찮다. 그게 옳은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게 끝이야, 잘 있으란 말 안해도 되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형은 말했다. “39kg에 앙상한 뼈, 거기에 일주일에 두 번씩 왔다 갔다 거리는 중환자실, 심장에 구멍은 이제는 찍어보지 않아도 알 정도로 커졌어.” “.....” “버리고 참 잘 간다, 청푸름.” “갈게.” 나는 목 맥힌 목소리로 진료실을 나왔다. 그렇게 병원을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원유를.. 보게되었다. 구토를 하고 있는 원유 뒤에는 예전에 그 녀석이 있었다. “괜찮아?” 라고 물어보는 그녀석을 나는 쳐다봤다. 아무도 모르게. “누나!” 원유가 쓰러졌다. 가고 싶었지만, 입술을 깨물고, 걸음을 돌렸다. ‘모든 걸, 다시 되돌릴 수 없어.’ 하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 속이 쓰려 미칠 것 같다. 심장도 아프고, 내 몸도 미칠 것 처럼 아프다. 힘이 풀려 나는 쓰러졌다. “누나!” “괜찮아.” 나는 괜찮다며 손을 짚고 일어났다. 나를 부축해주는 연하. “창피하다, 이제는.” “괜찮아.”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휠체어에 탔다. 그리고 병실로 돌아가려는 찰나. 오빠가 진료실에 뛰어나왔다. “원유야!” “.....” 나는 아무말도 하지않은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다가 연하에게 귓속말로 “자리좀비켜줄래?” 라고 말했다. 연하가 자리를 비켜주고, “왜, 그래?” “그 녀석, 못 본거야?” “누구?” “청푸름 그 자식, 못 봤어?” 청.. 푸름. 동화 속 주인공이다. “하.” 나는 가슴을 또 다시 부여잡았다. “푸, 푸름이가.. 어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초원유!” 나는 휠체어에서 떨어졌다. “괜찮아.” 나는 일어서서 걸었다 이미 벗겨진 슬리퍼를 멀리 두고 말이다. ‘그 녀석이 이 곳에 있어, 이 곳에 말야.’ 나는 그렇게 걸었다. 가슴을 부여잡고서. ‘향기라도 남겨. 너를 추억 하기라도 하게.’ 5층에서 1층까지 걸었다. 하지만 병원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 녀석은 없었다. 제 36화 ‘어디 있어, 제발.’ 이리 돌아보고, 저리 돌아봐도. 보이지 않는 그 녀석. 나는 그렇게 주저앉았다. “하.” 그 녀석이다. 뒷모습만 보고도 알아볼 수 있다. 아픈 가슴을 붙잡고 걸었다. ‘제발,’ 문을 열고 나가는 푸름이. ‘놓치면 안돼.’ 나는 달렸다. 달팽이처럼 아주 느리게 달렸다. 그렇게 병원 입구 앞에서 그 녀석을 봤다. “가지마!” 나는 푸름이에게 달렸다. 꽈악. 놓치지 않을 정도로 세게 푸름이의 허리를 안았다. “사랑해, 푸름아.” 내 목소리를 들었다. “초원유.” “가지마, 제발.” 울며 있는 힘을 다해 안았다. “이거 놔.” “못 놔, 가지마.” 내 손을 잡은 푸름이. “나 떠나게 그냥 내버려 둬.”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른다. “싫어! 정말 싫어!”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내가 왜 떠나는데!” “내 옆에 있으라고, 떠나지 말고, 내 옆에 있으란 말야!” 나는 손에 힘이 풀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너 심장에 구멍 뚫려서 죽는다고, 사랑하면 심장 터져 죽는다고!” “그래서, 사랑해!” 나는 울며 소리쳤다. “너니까, 사랑하니까, 너라면 죽어도 괜찮으니까.”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드는 푸름이. “심장 터지면 어떻게 되는 줄 몰라? 죽는거야, 죽는거라고! 나 때문에 니가 죽는다는게 말이 돼? 나 같은 인간때문에 니가 왜 죽어!” “내가 사랑하잖아.” “사랑하지 마라고! 그러니까!” 푸름이는 내 어깨를 아주 세게 흔들었다. “당신 뭐하는 짓이야!” 그 순간, 연하가 푸름이를 때렸다. “누나 환자야, 소리 질러도 안되고, 세게 만져서도 안되는!” “연하야!” 나는 연하를 쳐다봤다. “당신은 안돼! 가질 자격 없다고!” 탁. 구두소리가 들린다. 루야였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루야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뒷걸음질 치며 루야를 피했다. (당신만 사라지면 돼, 그거 알아?) (루야!) 연하는 루야를 붙잡았다. (루야, 누나 건드리지마.) (이거 놔, 오빠도 이 여자가 없으면 오히려 마음 편하지 않아?) (털 끝 하나라도 건들지마.) 푸름이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청.. 푸름.” 나는 메마른 눈으로 푸름이를 쳐다봤다. (건들지마.) (켄지, 당신 왜 이 여자 편을 드는거지? 당신 옆에 있는건 나인데 왜 이 여자 편을 드는거지?) (불쌍하니까.) ‘알아 들을 수가 없어, 난.’ (먹구름 같이 슬프고, 흰 구름처럼 너무 깨끗해서 불쌍해.) 차가운 바람을 사이로 뒤죽박죽 서있는 우리들. 아니, 쓰러진 푸름이와 나. 그리고 서서 우리를 내려보는 루야와 연하. 푸름이가 일어났다. 루야의 손을 잡은 푸름이. (가자.) 루야는 탁탁 거리는 구두를 신고 푸름이에게 끌려갔다. 검정 승용차의 문을 열고 루야가 들어갔다. “다신, 만날 일 없을거야.” 푸름이가 탄 승용차는 그렇게 병원을 떠나갔다 한 편의 소나기처럼 말이다. 아직도 주저 앉아 있는 나. 연하는 나를 잡았다. “놔.” 나는 연하의 손을 뿌리쳤다. “니가 뭔데, 푸름이한테 주먹질을 해.” “누나 옆에 있는 건 나니까.” “누가 그래? 내가 그랬니? 누가 그런 말하니? 내 옆에는 아무도 없어, 아니 청푸름이라는 사람 밖에 없어.” 연하는 눈물을 흘렸다. 왼쪽 볼로 스쳐지나가는 차가운 바람과 한 방울의 눈물. 내 것이 아니다. 연하의 것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럴 줄 알았는데, 영영, 나는 안되는건가봐.” “.....” “미안 누나, 내가 죽을 죄를 졌어.” 연하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그렇게 돌아섰다. 결국, 남은 건 나 혼자였다. 병원 안으로 쓸쓸히 들어갔다. ‘다신,만날일없을거야’ ‘미안 누나, 내가 죽을 죄를 졌어.’ 누구를 잡아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 둘 다, 잡을 수가 없어. 나한테 너무나 버거워서. 한명은 너무 사랑해서. 한명은 너무 미안해서 말야. 평생 혼자 그냥 살까? 평생 혼자 아파하며 살까? 하긴 내가 가장 나쁜 년이니까. 악녀인 루야보다는 훨씬 내가 더 나쁜 년이니까. 혼자서 아파하면 내가 그 벌 달게 받는거니까. 아무도 아프지는 않겠군. 제 37화 연하가 없어진지 3시간이 지났다. 혼자서는 감당 못할 내 몸. 3시간 동안의 고비는 벌써 5번이다. 이리저리 베어버린 구토 냄새. 그리고 내가 쥐어짜며 아픔을 참은 담요는. 침대에서 떨어진지 오래이고, 바닥에 나뒹굴어 있는 나를 감싸고 있다. 가슴을 부여잡고 울고있는 나. “아파, 너무 아파.” 울음이 밖으로 세어나가지 않게 입을 꾹 다물었다. ‘안돼, 참아야 돼.’ 나는 수십 번 가슴을 두드렸다. ‘제발, 제발 멈춰 줘.’ 그제서야 멈춘 심장 박동. 언제또 다시 아플지 모른다. 서랍에 있는 약통을 모조리 꺼내어 손에 쥐었다. ‘과다복용, 안 좋잖아. 너 지금 니 몸을 버리고 있는거라고.’ 선지의 말이 머리를 울렸다. 하지만. 이게 아니면 더 참을 수가 없어. 나는 약을 입에 넣었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조금 살 것 같아.’ 나는 침대 위에 올라갔다. “후” 하고 한숨을 또한번 내쉬는 순간. 오빠가 병실 문을 열었다. “초원유!” “괜찮아, 잠깐 그런거야.” 널부러져 있는 약병을 들고서는 나를 쳐다보는 오빠. “수술하자.” “..뭐?” “수술하자고.” “수술해도 살 수가 없잖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수술하자, 더 이상 오빠가 아닌 의사로서 바라 볼 수 없어.” “수술하면, 그 녀석 볼 수 있어?” “.....” “수술하면, 원래 멀쩡한 새 심장 가질 수 있어?” “그래도, 이깟 약으로는 니 병 고칠 수 없잖아.” “마음은 이게 더 편해.” “수술하자, 응?” 입을 꾹 다물고 한 5초간 있었다. “생각해볼게, 하루 정도.” 나는 침대에 누웠다. ※※※※ 집에 도착했다. (켄지, 정신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없어.) (당신하고 장난치는거 아니야.) (알아.) 나는 켄지를 쳐다봤다. (그 여자가 거기 있다는거 당신은 알았잖아.) 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면서, 그 여자 보려고 그렇게 간 거야? 나한테는 그런 핑계를 대고서?) (아니야, 그런거.) (그런데 어떻게 그 여자가 당신이 거기 있는 줄 알아!) (난 절대 그런 짓 안해, 미련 없어.) 미련이 없다고? 하, 웃음만 나온다. (당신 거짓말은 다 보여, 그런 거짓말 하지마.) (진심이라면?) (그럼 2주 뒤, 나하고 정말로 일본을 떠날 수 있어?) 켄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떠.. 날거야.) (그 약속 잊지마, 당신이 나하고 떠난다고 했어.) 나는 켄지 방문을 세게 닫고서는 거실로 나왔다. 탐탁지 않지만. 당신이 내 오빠라는걸 알지만. 갖고싶으니까, 내가 만약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 여자에게 그냥 줬을텐데. 내가 이렇게 나쁜 계집이 되지 않았을텐데. 19살. 아니 이제는 1월이니까 20살. 내 나이에 당신한테 모든걸 걸어버려서. 아깝잖아, 내 세월이. 당신에게 걸음 내 세월이. 오빠라도 좋아, 우리는 이복남매이니까 말야. ※※※※ 다음날 나는 오빠의 말을 승낙하였다. 수술을 하기로 하였다. 성공 확률 1% 정도. 수술을 하다 죽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내가 새 삶을 살 수 있을 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내 주치의인 오빠조차도 말이다. 진료실에서 나와 착용대를 끌고 병실로 향하였다. 텅빈 병실. 연하는 그 이후 한번도 오지않았다. 그래서 외롭다고한다. 내가 말이다. 그렇게 못되게 말하고서는 나에게 다시 돌아오길 바란다는건가? 수술을 하게될 3일 뒤. 그때도 내 옆에는 아무도 없을까? 그런다면. 너무너무 슬플텐데. 내가 아무리 나쁜 년이지만. 한번 쯤은 용서해주지. 죽기 전 선물이라도 말이야. ‘미안하다, 원유야.’ ‘아빠는 그게 무슨 소리야.’ ‘미안한게 너무 많아.’ 눈앞에 아른거리는 예전 한국에서의 추억. 아빠가 보고싶다. ‘딸, 아빠는 딸을 가장 사랑하는거 알지?’ ‘딸도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거 알지?’ 웃으며 기억 한편에 자리 잡은 추억. 만약,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나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갑자기. 아빠의 목소리에서 푸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신차려, 초원유.’ 제 38화 3일 뒤 벌써 수술을 하게 된 날이다. 심장은 오늘따라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다. 좋은 예감인가? 아니면, 그냥 그런건가? 드디어 수술실 앞. 아무도 없다, 내 옆에는 말이다. 쓸쓸히 수술실에 들어갔다. 마취를 하게되고, 흐릿해지는 눈. ‘제발, 살려주세요.’ 하늘에게 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 케리어를 끌고 도착한 곳은 공항이 아닌 병원이다. 3일이 지났다. 누나는 잘 지내고 있는지. 케리어를 쥐고있는 손에는 비행기표와 하얀 봉투가 쥐어져있었다. 병원에 들어가보니. 어느 때보다는 한가해보인다. 누나의 병실은 아무도 없었다. 침대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 ‘산책하러 간건가?’ 나는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기다려도 오지 않는 누나. 시계를 바라보니. 비행기 시간이 다 되었다. “보고 가고 싶었는데, 못 보겠다.” 나는 하얀 봉투를 침대 위에 올려놨다. “갈게, 누나.”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서는 병실을 빠져나왔다. 병원에서 나와, 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비가 잠깐왔다. 소나기 같은 비가 말이다. ‘미안해, 바보 같이 혼자서 이렇게 돌아가는 날 용서해.’ 누나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 이렇게 혼자 한국으로 떠나게 된 나를 말이다. 누나를 그렇게 사랑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걸 그 날 알았다. 옆에 있으면 나는 좋겠지만, 누나는 좋지 않다는걸. 그 날에서야 알았다. 아주 늦은 시기에 말이다. 한가한 공항. 비행기에 타기 전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는 내 뒤. ‘잘있어, 누나.’ 한줄기 눈물을 보이고 나는 돌아섰다. ‘만약 돌아올 수 있다면, 기억해줘.’ 그렇게 나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아주 비겁하게 돌아갔다. ※※※※ 수술이 계속 되고,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누나 안녕.’ ‘연하야?’ 멀리 보이는 연하. ‘누나, 나중에 우리 다시 보자.’ ‘어디 가는거야.’ ‘누나 잘 있어.’ 희미하게 돌아서서 가버리는 연하를 나는 잡지 못했다. 5시간 뒤 드디어 수술은 끝이 났다. 나는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수술의 결과는 내일 모레 쯤이라고 한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나는 그 꿈을 생각했다. ‘누나 안녕.’ 왜 이렇게 가슴이 또 아려오는지. 수술때문인가? 그런데, 눈물이 흐르는건 뭘까? 싸한 이 느낌은 또 뭘까? 뭐야. 도대체 뭐 때문이야. 산소호흡기를 한 채. 심장박동기를 쳐다보며 난 그렇게 또 한번의 한숨을 내뱉었다. 일주일 뒤 나는 원래있던 내 병실로 돌아왔다. 결과는 뭐 똑같지만. 더 좋아질수도 있다는 오빠 말에. 기분이 너무 좋아졌. 기지개를 피고 침대에 앉았다. ‘뭐지?’ 손에 집힌 하얀 봉투. 나는 쭉하고 봉투를 찢었다. 종이가 접어져 있었다. [누나, 내가 정말 미안해서 이렇게 편지를 써, 누나한테 내가 필요 없는 존재라는거를 너무 늦게 알아버렸어, 그 동안 내가 옆에 있을 때 얼마나 힘들었을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미안했어, 누나 이제야 떠나는 날 용서해. 정말로 이 종이 한 장에 내 마음 다 적을 수는 없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적고 싶어, 만약에 누나가 한국에 오게 된다면, 아니면 다음 생에 우리가 다시 만난 다면, 한번 쯤은 기억해줘, 나란 인간을 말이야.] 눈물이 뚝 하고 흘렀다. ‘누나, 안녕.’ 꿈을 꾸지 말 걸. 연하가 가버렸어. “미안해, 연하야.” 나는 편지를 붙잡고 울었다. “정말로 미안해, 사랑 한번 주지 못 해서 미안해.” 한번이라도 더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왜, 하필 지금이었니. 가장 필요하고, 가장 서러울 때. 떠나면. 내가 더 미안해져서. 어떡하니. 나 이렇게 나쁜 년 만들어 놓고,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하니. 제39화 그 날 저녁 침대 위에서 꿈틀거리며 아픔을 호소했다. “하.” 크게 소리치고 싶지만, 아무도 없어. 내 옆에는 아무도 없어서. 지르지도 못한다. 수술했는데, 어쨌든 수술한건데. 이렇게 금방 다시 아파오는건 뭐야. 잠시의 평온이었나봐. 빨리 데려가려고 잠깐 행복하게 해준건가봐. 이불을 아무리 붙잡고서 참아봐도 계속해서 아파오는 가슴이다. “미칠 것 같아.” 갈라지고 힘없이 자그만한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퍼졌다. ※※※※ 3일 뒤면 이 곳을 떠난다. 일본이라는 이 나라도 떠나고, 그 녀석 기억에서도 떠난다. 가방을 챙기는 동안,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사랑해.’ 눈물이 흐른다. 한번 스윽하고 눈물을 닦아냈다. 이윽고 가방을 쳐다보며 애써 눈물을 참고 짐을 쌌다. ※※※※ 다음날 “오빠.” 진료실 문을 열었다. “나, 왜 이러는거야?” 나는 오빠에게 걸어갔다. “무슨 소리야.” “나, 수술했는데, 수술했는데 왜 이렇게 아픈거야?” 나는 오빠를 때렸다. “살 희망이라도 주지 말지, 괜히 살 수 있다 희망가져서, 그녀석 더 보고 싶게 만들어 놓고서는..” 그렇게 나는 주저앉았다. “미안.. 하다.” 오빠의 말이 더 슬프게 들린다. “정말로 미안하다.” “나, 죽는거야. 그렇지?” 나는 오빠를 올려봤다. “.....” 아무말도 하지못한 채 고개를 돌려버리는 오빠. “나, 살고 싶었는데. 죽어야 하는거네?” 가슴을 부여잡고서. 나는 그렇게 서글프게 울었다. 그 날 저녁 병원 한 쪽에 위치한 공중전화.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입술을 한번 깨물고는 번호를 하나하나 눌렀다. 삐. 전화를 받지않는다. ‘말하고 싶었는데, 떠나기 전.’ 넌 내가 많이 미워졌구나. 청푸름. 그렇게 공중전화 박스를 멀리두고, 착용대를 끌고 병실로 올라갔다 텅 빈 병실은 차가운 공기만 맴돌았다. 옷장에서 옷을 꺼내들었다. 침대 옆 서랍 위에 곱게 접어 옷을 올려놨다. ‘내일 돌아 가야겠어.’ 그리고 서랍에 들어있던 약통들도. 가방에 집어넣었다. ‘집에 가야겠어.’ 그렇게 속으로 되세기며 침대에 누웠다. 마지막으로 입어보는 하늘색 환자복. 오늘따라 이게 그렇게 따뜻하다. 이불도 덥지 않은 채. 그렇게 병원에서의 마지막 잠을 청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나는 병원을 빠져나왔다. 가방은 가벼웠고, 마음은 무거웠다. 병원을 한번 뒤돌아 본 뒤. 나는 마음을 잡고 걸었다. 그렇게 집으로 향했다. 조용한 빌라.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올라갔다. 열쇠로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로, 이제는 나 혼자이네.’ 신발을 벗고 들어간 집은. 널부러져 있는 술병들로만 가득했다. 그리고 구겨져있는 종이. 조심스럽게 앉아 그종이를 주워들었다. 내가 쓴 편지. 축축하게 졌어있는 편지는 이미 다 번져간 펜 때문에 알아볼 수 없었다. 눈물을 참고 나는 술병을 붙잡았다. 그리고 싱크대에 갔다놓았다. 텅텅 빈 주방. 눈 앞에 아른거리는 내 모습. 죽을 먹고서는 웃고 있다. ‘어?’ 밑부분에 붙은 종이조각을 발견한 나. 나는 한걸음 다가갔다. [못 끊여서 미안한데, 그래도 꼭 먹어둬. 먹기 싫다고 안 먹지 마라고.] 편지를 읽고서 웃으며 주머니에 종이를 넣는 내 모습을 지켜 보고 있다. 슬프다. 저런 때도 있었는데, 라는 생각 때문에, 지금은 그러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앉았다. 내가 앉은 옆자리를 어루만졌더니. 푸름이가 생겼다. 아니, 기억이 되살아났다. 내가 붕대를 감아주고 있고. 푸름이는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눈물이 나온다. 왜, 추억이 묻어 있는지. 더 아프게 말이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커다란 침대는 삐쩍 마른 내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크기였다. ‘이렇게 침대가 컸던가?’ 하는 생각에 귓볼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푸름이가 옆에 있었다면. 어느 때보다 따뜻했을텐데, 라는 생각에 나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 날은 기억 때문에 울고 지새운 날이었다. 제 40화 다음날 베란다로 나가니 눈이 내리고있다. 요즘 매일 비만 오다가 눈이 오니까,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진다. ※※※※ (켄지,내일이면우리떠나네?) (어.) 켄지의 기분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슬퍼보였다. 아마, 그 여자 때문이겠지. (어디로 갈까? 호주?) 아무말도 하지않은 채 멍하니 앉아있는 켄지. 나는 빨간 입술을 한번 깨물고서는 켄지에게 팔짱을 꼈다. (켄지, 우리 호주 가서 약혼하자.) 나는 켄지에게 그렇게 말했고, 켄지는 역시 답이 없었다. 나는 넋이 나간 켄지를 두고 집을 나왔다. ‘그 여자 때문이야.’ 이렇게 또 그 여자를 만나러 간다. ※※※※ 추워지는 날씨 때문인지. 나는 한기를 느꼈다. 눈앞은 점점 깜깜해지고. 무서워 온다. 저녁은 가까워오고, 가슴은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하...” 지금까지 아팠던 것 보다 더 아파오는 가슴. 숨이 넘어갈 듯 아파온다. 침대에 기대어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쉬기 힘든 숨을 쉬며 나는 번호를 눌렀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신호. ‘제발, 한번만.’ 간절하게 빌며 받기를 기도하였다. [여보세요.] 받았다. 드디어, 내 전화를 받았다. 말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푸, 푸름아.” 가슴을 부여잡고 내가 말한 이름. [.....] 아무말도 하지 않는 푸름이. “푸름아, 청푸름.” 울면서 나는 그 녀석 이름을 계속 불렀다. “아마도, 일찍 갈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 [.....] “우리,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 아마도 그 때 우리가 사랑할 것 같아서.” [.....] “한 50년 쯤 뒤에, 우리 다시 만나서 사랑하자.” [.....] “..만나서 반가웠어. 안녕, 내 사랑아.” 그렇게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사랑했었고, 미안했었고, 고마웠었어..’ 애써 웃음지으며 나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 2시간 후 탁. 하는 구두소리와 함께 나는 켄지의 집에 들어왔다. 조용한 집. ‘병원에 없다면, 이 곳에 있겠지.’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쓰러져 있는 그 여자. 나는 한걸음 더 다가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들었다. (만약에, 우리가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친구라도 될 수 있었을텐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당신이란 여자는, 참 불쌍해. 나같이 독하고 나쁜 계집을 만나서, 이렇게 죽게 되니까.) 나는 총을 그 여자에게 겨눴다. (잘 가, 바보 같은 여자.) 탕.탕.탕. 총 세 번의 총알이 날아갔다. 이제, 내 것이야. 근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건지. 알 수 없었다. ※※※※ 전화가 울려퍼진다. “여보세요.” 잠시 주춤거리더니 내 이름을 부른다. [푸, 푸름아.] 원유였다. “.....”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푸름아, 청푸름.]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계속 부르는 원유. 그러다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일찍 갈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 “.....” [우리,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 아마도 그 때 우리가 사랑할 것 같아서] 지금도 충분히 사랑하고 있는데. “.....” [한 50년 쯤 뒤에, 우리 다시 만나서 사랑하자.] 50년 뒤. 우리가 다시 만난다? “......” [..만나서반가웠어 안녕, 내 사랑아.] 안녕.. 내사랑아. 2시간 후 나는 그렇게 2시간동안 핸드폰을 붙잡고 소리없이 울었다. 그런데. 내 귀로 들리는 목소리. (만약에, 우리가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친구라도 될 수 있었을텐데.) ..루야였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당신이란 여자는, 참 불쌍해. 나같이 독하고 나쁜 계집을 만나서, 이렇게 죽게되니까.) 왜, 루야가 거기 있는거지? 나는 핸드폰을 세게 쥐었다. (잘 가, 바보 같은 여자.) 탕.탕.탕, 총 세 번의 총알이 날아갔다. 루야가 원유를.. 죽였다. 나는 멍하니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왜, 그랬어. 루야.’ 넋이 나간 내 눈에는 검정색의 권총만이 보였다. ‘안녕, 내 사랑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 손에는 권총이 쥐어졌고. 내 머리에 꽂혔다. “그래, 우리 50년 뒤에 만나자.” 탕. 정말로, 한 50년 뒤면 우리가 만날 것 같아. ※※※※ 집에 불을 질렀다. 그 여자의 흔적조차 없애기 위해서. 검정색 승용차에 올라타 재빨리 그 곳을 빠져나왔다.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내 눈물은 멈추었고, 하늘에서는 눈이 내렸다. 창문을 내리고서 그제서야 멍하니 슬픈 웃음을 지었다. ‘나, 잘한거지? 내 사랑 때문에 이런거니까.’ 또 다시 나올려고 하는 눈물을 참았다. 네온사인이 나를 비치고, 내 눈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비쳤다. ‘내가 이긴거야, 모든 걸.. 근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오려고 하지?’ . . . 사랑을 찾으려고 사람을 죽였지만. 그 사람이 죽음으로서 사랑을 죽여버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루야는. 그렇게 네온사인 불빛 아래에서 슬픈 웃음을 지으며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보게 될 자신의 슬픔을 모른 채 말이다. Epilogue 분명, 우리의 약속은 진실이 되었다. 조금은 빗나가 버렸지만 말이다. 50년 후. ‘푸름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 . 초............원.............. 벌떡 일어났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낡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또, 이 꿈이야.” 벌써 30번 째. 매일같이 이 꿈을 꾸는 나이다. 그 여자가 누군데, 내 이름을 그렇게 애절하게 부르는지. “누구지?” 50년 전. 야쿠자 밑에서 자랐던 청푸름. 50년 후. 결혼이라는 것을 밥 먹듯 해 온 가난뱅이 청푸름이 된다. 50년 전. 심장이 고장나버렸던 여자 초원유가. 50년 후. 첼로를 연주하고 싶어하는 가난한 소녀 가장 김유나가 된다. “우리가 사랑해도 될까?” “안 될건...... 없어,” 이들이 다시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50년 전, 약속했던 마지막 말을 지키기 위해서... THE END